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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15화 (115/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5화

“리어먼드 공작님께 제가 아주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마리나 라커가 고개를 깊게 숙여 보이고 있었다.

나와 레이커스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 짧은 사이에 생각을 정리한 것 같았다.

레이커스는 사과를 받아 줄 생각 같은 건 없는지 차가운 눈으로 마리나의 정수리를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상황을 중재했다.

“자자, 그런 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에요.”

마리나는 고개를 들고 나와 레이커스를 번갈아 바라보곤 또랑또랑한 눈으로 말했다.

“랑비엘 맥레이라면 저희 마탑과도 꽤 친분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뒤통수가 얼얼하군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협력하겠습니다.”

나는 마리나의 우아하고도 똑 부러지는 태도에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아깐 꽤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는데도 마음을 다잡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우리에게 협조하겠다고 말하는 게 대단해 보였다.

과연 이런 커다란 마탑의 수장 정도 되려면 어지간한 정신력으론 안 될 테지.

라떼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우리 셋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굴려 댔지만, 마리나가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는 듯 손을 쥐며 만류하자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소파에 몸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그럼 드디어 본론을 꺼내 볼까.’

난 오래도 걸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저…… 그럼 다름이 아니라, 마탑 인근의 지하를 살펴볼 수 있을까요? 랑비엘이 이 인근에 아지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떤 경로로 알아냈거든요.”

마리나는 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작은 신음을 흘렸다.

라떼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참견했다.

“응? 이 일대는 마탑이 부지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편이라서, 지하에 뭐가 없을 텐데?”

마리나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눈썹을 살포시 찌푸리며 라떼의 말을 받았다.

“지하…… 지하라…… 글쎄요. 라떼의 말대로 마탑이 차지한 부지에는 지하까지 모두 마탑의 시설들이 들어서 있어서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레이커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짓씹듯 내뱉었다.

“돌려 말하는 것엔 선수군.”

“그것이…….”

마리나는 레이커스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듯 바닥 쪽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라떼도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는 듯 눈을 깜박였다.

“양지의 마탑과는 다른, 음지의 부분이 있단 거 아닌가?”

레이커스가 내뱉은 말에 마리나가 길게 한숨을 쉬곤 결심이 서지 않는다는 듯 이쪽저쪽을 바라보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봉인되어 있습니다.”

“봉인이라뇨? 왜죠?”

마리나가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축이고 레이커스 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오래전…… 마탑의 실험실은 지하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봉인해 버렸고요.”

실험실이라는 말로 애매하게 표현했지만, 레이커스를 힐끔거리는 마리나의 시선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키메라와 관련된…… 시설이 있는 건가?’

“안내하지.”

레이커스가 단호하게 명령하듯 말하자, 마리나가 곤란하다는 듯 웅얼거렸다.

“……말씀드렸듯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봉인이라.”

레이커스는 눈앞에 놓인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곤 내 손을 놓고 오른손으로 제 왼팔을 훑어 내렸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 새까만 장검이 들려 있었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마리나와 라떼만큼 나도 놀랐다.

레이커스는 내가 뭐라 만류하기도 전에 그 검을 휘둘렀다.

깜박.

쫘르륵.

한 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레이커스 앞에 놓인 차가 찻잔의 형태를 벗어나 허물어지듯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말끔한 한 번의 동작에, 찻잔이 깨어지지도 않고 정확히 두 동강이 나 받침 위를 굴렀다. 그리고 찻물로 흥건해진 차받침은 한 점 깨어지거나 금이 간 구석도 없었다.

깜박.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언제 그렇게 흉흉한 물건을 꺼냈냐는 듯 레이커스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묘기 같아.’

어떻게 받침을 건드리지도 않고 그렇게까지 정교하게 칼을 휘두르는지.

하지만 마리나는 나와는 전혀 다른 감상을 느꼈는지,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레이커스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마리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할멈과 긴 이야기를 나눌 기분은 아닌데. 세 번 말하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지금 당장, 안내해.”

마리나가 입술을 꼭 깨물자, 라떼는 그제야 뭔가를 알아챈 듯 멍한 눈으로 레이커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게 맞는다면…….”

“라떼, 쉿, 조용히 해라.”

마리나가 엄하게 타이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삼십 년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그녀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레이커스와 나를 바라보곤 어렵게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하지요. 따라오십시오.”

끝까지 따라오겠다고 우기던 라떼를 떼어 놓은 마리나는 제 집무실에 들러 등불과 열쇠 꾸러미 같은 것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레이커스와 나를 데리고 마탑 바깥으로 나갔다.

우리가 설전을 주고받는 사이에 밖은 이미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온전한 밤이 되어 있었다.

마리나는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마탑을 반 바퀴 빙 돌아갔다. 그녀가 멈춰선 곳은 입구가 없는 마탑의 뒤쪽 벽 앞이었다.

“……여깁니다.”

랑비엘이 나를 데려가려 했던 곳도 이 부근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마리나가 내려다보고 있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바닥에는 파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지하도 입구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다. 그것은 주위의 다른 돌들과는 달리 사람의 손이라도 탄 듯 이끼가 없었다.

마리나가 그것을 치우자, 큼지막한 자물통과 쇠사슬로 얽혀 있는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으로 들어 올리는 문처럼 생긴 구조였다.

그리고 그 문에는 양각으로 어떤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PARK에.]

덜컥.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문구를 본 적이 있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이 게임 속에 있으면서, 내내 게임적인 요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문구까지 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살인자들의 밤>의 최종장에 입장할 때 본 문구였다.

‘도대체 이게 여기에 왜 적혀 있는 거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마리나가 천천히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더니 레이커스를 돌아보곤 자물통으로 다가갔다.

달칵.

아주 낡고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자물통은 의외로 말끔한 소리를 내며 한 번에 부드럽게 열렸다.

줄곧 팔짱을 끼고 마리나를 노려보고만 있던 레이커스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 안은 위험할 겁니다. 아직은 그 목걸이도 없고요. 저 할멈과 둘이서 우선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이제 와서요?”

“물론 아르비체의 사격술이 꽤 훌륭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괜찮은 스승을 만난 덕분에요. 하지만 그대가 이 이상 위험에 노출되는 걸 바라진 않습니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상황인데도, 레이커스의 얼굴에는 긴장이라곤 한 줌도 비치지 않았다.

달빛에 빛나는 새하얀 얼굴에는 그저 담담함과 차분함이 섞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레이커스의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이제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니까. 최대한 조심해야 해. 하지만 이건 아니야.’

“……하지만 레이커스, 그 말도 맞지만…… 랑비엘이 절 언제 노릴지 모르잖아요. 마탑에 있는 게 안전할 수도 있겠지만, 레이커스의 곁에 있을게요.”

레이커스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나를 가볍게 껴안았다.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서야, 나는 오늘이 꽤 추운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지켜 드리죠.”

“응, 믿어요. 그리고 제 총이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요.”

난 내가 가진 특수 총알을 떠올리며 종알거렸다.

그를 마주 껴안고 놓아주자, 마리나가 바닥에 붙은 문을 열었다.

끼이익-.

척 보기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 거기 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치 리어먼드 저택의 지하실 같아.’

마리나는 성냥을 그어 등불에 불을 붙이곤 그 어둠 속으로 머뭇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더니 발을 재촉해 아래로 걸어 내려가 금방 머리가 지면 높이보다 낮아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레이커스도 그 뒤를 따라 내려가는 것을 멍하니 보던 나는, 바닥에 놓인 자물통을 주워들었다. 뭔가 글씨가 쓰여 있는 것 같았는데, 워낙 사방이 어두워서 양각으로 새겨진 그 글씨를 읽을 수는 없었다.

“너무 떨어지진 마십시오.”

레이커스가 내 쪽을 보며 다그쳤다.

나는 자물통을 주머니에 넣고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마탑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디좁았고, 꽤 가팔랐다. 게다가 레이커스의 지하실만큼 어두워서 나는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레이커스의 몸에 바짝 붙어, 거의 매달리다시피 앞으로 전진하던 나는 문득 어떤 소리를 들은 듯한 섬뜩한 감각에 발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레이커스가 부드럽게 내게 속삭였다.

“……아니에요. 제가 신경이 과민한가 봐요. 자꾸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등불로 레이커스가 제 왼팔을 더듬듯 쓰다듬는 게 보였다. 어느새 긴 칼을 꺼내든 그가 내게 등을 보인 채 말했다.

“신경이 과민한 게 아닙니다. 제게 딱 붙어 계십시오.”

쐐애애애액-!

쐐애애애액-!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 저쪽 아래에서 거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수는, 수십 마리는 될 듯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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