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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14화 (114/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4화

마리나 라커는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 연쇄살인 사건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전 경찰이 아니에요. 그런 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굳이 관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난 금방이라도 나를 피해 지나가 버릴 듯한 마탑주를 향해 급히 말을 덧붙였다.

“레이커스 리어먼드 공작은 범인이 아니에요.”

마리나 라커는 그사이에 십 년은 더 늙은 것처럼 눈그늘이 잔뜩 내려앉은 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의심하고 계시는지 알았냐고요?”

마리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작게 웃으며 핼러윈 장식으로 범벅인 마탑의 로비 쪽을 흘끗 눈짓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이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거냐는 내 무언의 암시를 알아챈 마리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우리는 2층에 있는 마탑주의 응접실에 모였다.

라떼의 아지트와는 달리 베이지색과 갈색으로 물건들과 벽의 색을 통일한 정갈한 공간이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의 마리나 라커와, 제 할머니까지 끼어든 상황에 더 놀란 듯한 라떼 라커와, 마탑에 있는 것 자체가 불쾌하단 얼굴의 레이커스가 둘러앉았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소파 옆에 놓인 기계 팔 같은 것이 튀어나와 음료 메뉴판을 내밀었다.

“내가 만든 거야.”

라떼는 아직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도 거의 습관적으로 제 자랑을 했다.

그 말을 끝으로 응접실에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리나 라커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세 번째 한숨을 쉰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아르비체 님. 당신, 그냥 사람들의 호의를 사고 다니는 데 재능이 있는 잘난 가정교사라고만 들었는데…… 그냥 그 정도가 아니군요. 아주, 눈치가 빠르고 영리해요.”

[마리나 라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98/99)]

난 입술을 당겨 웃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리나 라커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며 우리에게 그제야 차를 권했고, 우리 앞엔 각자 따뜻한 꽃차가 한 잔씩 놓였다.

시종이 기계 팔을 데리고 물러났고, 그제야 마리나가 따뜻한 차에 용기를 얻은 듯 본론을 꺼냈다.

“무슨 볼일로 이 늙은이를 이렇게 몰아세웠는지 들어나 보지요.”

나는 그 자리에 앉은 면면을 한번 둘러보았다.

라떼 라커는 사건이 벌어질 때 나와 함께 있었다.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난 천천히 입을 뗐다.

“레이커스 리어먼드 공작이 범인이 아니라는 건, 증명해 보일 수 있어요.”

마리나 라커는 연쇄살인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레이커스 리어먼드라는 거물이 얽힌 것을 내가 이렇게 쉽게 입에 올리는 것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라떼는 눈을 굴리며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듯하더니 신이 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데? 범인이라는 걸 입증하는 것보다 아닌 걸 입증하는 게 더 어렵다고 하던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렵지.

하지만 내겐 이게 있었다.

난 왼손을 들어 검지에 끼고 있던 투명한 유리 반지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라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밀로라드의 비밀 상점에 있던 거 아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밀로라드에게 총알을 살 때, 호감도 덕분에 얻었던 덤이다.

[진실의 반지 : 말의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0/1)]

눈앞에 뜬 상태창을 보며 난 작게 심호흡했다.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반지다.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아끼면 똥 된다고…… 꼭 필요한 곳이 있으면 뭐든 써야 해.’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여러모로 생각했었는데, 지난번에는 너무 고심만 하다가 써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마리나를 설득하는 데 쓸 수 있다면 오히려 너무 잘 쓴 셈이 되겠지.

마리나 라커도 내 손에 낀 반지를 알아본 건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습니다. 그거면 믿도록 하죠.”

순조롭다고 생각하며 레이커스에게 질문을 하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난 그제야 내 옆에 얌전하게도 앉아 있던 리어먼드 공작님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언제나 나를 보면 상냥하게 휘어지는 눈과 부드러운 잿빛으로 반짝이며 내 모습을 투영하곤 하는 눈동자, 늘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매.

딱딱하고 무서울 수도 있는 대단한 신분의 그를 친근하게 느끼게 해 주던 그것들이 지금은 홀랑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그는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를 조각내 놓을 듯 섬뜩한 눈으로 마리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섭지 않아.’

레이커스의 무력이라면 나 하나쯤 죽이는 건 아주 쉬운 줄 아는데도, 내게 사격을 가르쳐 주는 순간에조차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않으려 애를 써 주었던 그니까. 그토록 그를 의심했음에도 내가 수없이 많이 헷갈리고 심장 떨려 해야 했을 정도로 계속해서 나를 배려해 주었던 그니까.

그런 그니까, 무섭지 않았다.

난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팔걸이 위에 널브러져 있는 레이커스의 손을 당겨 쥐었다.

그의 손은 아주 차가웠다.

내가 그의 손을 잡는 순간 레이커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감고서, 내가 잡은 손의 반대쪽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아르비체가 원한다면 협력은 하겠습니다. 다만, 할멈. 당신은 말의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마탑주라는 자가, 내가 누군지 알면서 나를 의심했다. 하. 이건 뭐 코미디도 아니고.”

마리나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레이커스의 기세가 워낙 무서워서, 아까까진 이 사태가 재밌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라떼도 낯을 창백하게 굳히고 있었다.

나는 미리 조회해 봤던 사용법대로 유리 반지를 손에서 빼내고 그것을 레이커스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내 검지에 살짝 헐렁했던 반지는 레이커스의 약지 두 번째 마디에 걸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푸른색이면 진실이고, 붉은색이면 거짓이었던가요. 전대 마탑주님께서 만든 물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거였구나.

마탑의 주인인 마리나에게 내가 일일이 사용법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레이커스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아주 낮게 깔린 목소리에 증오와도 닮은 감정을 닮아 내뱉듯 말했다.

“파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내가 아니다.”

굳이 이런 걸 말하고 있는 상황이 기가 막히는지, 레이커스의 말끝은 거의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목울음 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우리 모두가 침묵으로 지켜보는 사이에 아무런 색도 없이 투명하기만 하던 유리 반지가 서서히 박동하듯 색이 변했다. 아주 옅은 하늘색을 거쳐 부드러운 푸른색으로 변한 반지는 더 이상 색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멈췄다.

“……세상에!”

“……세상에.”

라떼의 입에서 신기한 물건을 본 것에 대한 경탄이, 마리나의 입에서 지금껏 레이커스를 의심해 왔던 것이 물거품이 됐다는 허탈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이딴 조잡한 물건이 있어야 믿다니.”

레이커스가 혀를 차며 반지를 다시 빼서 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그 와중에, 그의 손이 내 검지를 찾아 반지를 끼워 주는 그게 뭐라고 자꾸 시선이 가고 심장이 넘칠 듯 두근거렸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레이커스는 손을 물리지 않고 내 손에 제 손을 깍지 껴 제 무릎 위에 올리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간지러워.’

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오감이 민감한 그가 내 손에서 빠른 박동을 눈치챌까 봐 자꾸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제 협력해 줄 생각이 좀 드시나?”

어쩐지 오랜만에 듣는 듯한 레이커스의 거만한 음색이 또 다른 매력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걸 보면 진짜 문제는 문제다.

난 정신을 차리려고 입 안쪽 살을 살짝 깨물었다 놓았다.

마리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뭘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나는 라떼와 마리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입을 떼 설명을 시작했다.

다만 레이커스와 내가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것이나, 파크의 시간이 계속해서 어느 지점을 향해 되감겼다가 재생되고 있다는 것 같은 건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

진실을 모두 공개해 봤자, 혼란만 줄 뿐이니까.

“레이커스와 저는 줄곧 랑비엘을 쫓고 있었어요. 그자가 범인이에요. 레이커스와 제가 목격했어요.”

“……목격했다고요? 언제요?”

내일. 미래에.

진실을 털어놓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내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다는 듯 레이커스의 손이 내 손을 힘을 주어 쥐었다.

지독히 마탑에 오기 싫었던 눈치의 그를 데리고 온 건데, 이렇게 매 순간 나를 위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난 진실을 적당히 섞어서 둘러댔다.

“절 납치한 게 랑비엘이었어요.”

라떼와 마리나가 깜짝 놀란 얼굴로 황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으면…… 좀 더 일찍 말하지 그랬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조력자가 있었어. 그래서……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수가 없었어. 레이커스가 범인을 쫓고 있었기 때문에 비늘이 범행 현장에 떨어져 있었던 거기도 하고.”

라떼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와 마리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비늘에 대해서 다들 아는 눈친데…… 그게 뭐였어요, 할머니?”

마리나가 입을 달싹이려다가 레이커스 쪽을 보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리어먼드 가문 자체가 파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핏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핏줄을 만드는 데 마탑이 관여했다고도 했어.’

레이커스가 이 공간 자체를 싫어하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내가 배려가 부족했다.

새삼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속삭였다.

“레이커스. 내일이 지나고, 랑비엘을 감옥에 넣고 나면요, 이 빚은 그때 꼭 갚을게요.”

레이커스가 딱딱하던 표정을 허물며 내 목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드러난 내 목을 물기라도 할 듯이 고개를 바짝 숙인 그가 내게만 들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빚이라…… 저희 공작가의 재정이 나쁘지 않아서,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탕감을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진 모르겠는데, 뇌쇄적인 목소리로 귓가에 속살거리니까 어딘가 퇴폐적으로 들렸다.

‘지금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얼굴이 불타오를 것 같아서 황급히 커다란 찻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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