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3화
라떼가 내 허리를 와락 껴안았고, 나도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놓아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르뮈에가 가 보라고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진짜, 진짜 진짜 고마워. 나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잖아. 우리 우정 영원하자, 정말.”
라떼는 내게만 들리게 소리를 죽여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에 나는 다른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라떼가 너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들렸던지 라떼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명도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라?’
그 순간 거만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레이커스를 보곤 거드름피우던 자세를 고쳐 앉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탑주로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여자가 우리 쪽을 보고 공포에 질린 듯 얼굴을 구기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보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레이커스와 무슨 악연이라도 있나?’
뒤를 흘끗 돌아보았지만, 정작 레이커스는 이 상황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는지 로비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아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갔을 눈치였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적을 알아챘는지, 라떼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소개가 너무 늦었네. 이쪽은 우리 할머니, 마리나 라커. 그리고 이쪽은…… 헤겐 그레이. 내상 전문 병원 쪽 병원장 아들이야.”
“아…….”
“할머니, 이쪽은 아르비체…….”
마탑주가 손을 내저었다.
“소개하지 않아도 안다. 마탑은 정보의 중심지이기도 한데, 이렇게 유명인을 몰라뵐 정도면 은퇴해야지. 아르비체 그린 양,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서자 키가 꽤 작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조금 고집스럽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지 까만 단발머리를 한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의 라떼와 무척이나 닮은 얼굴이었다.
“아,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누며 살펴보니 아까 보았던 경계심 어린 두려운 시선 같은 것은 이젠 찾아볼 수 없었다.
마탑주는 덤덤한 눈으로 나와 레이커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 손녀가 바쁘긴 하지만, 이런 중요한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요. 리어먼드 공작님께서도, 여기까지 찾아 주시다니…… 그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뜻밖에 마탑주까지 낀 대화가 부담스러워 샐쭉 웃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저희 손녀가 결례를 범할까 걱정이 되어서 그럽니다. 헤겐 씨께는 죄송하지만 다음에 뵈어야겠군요.”
말이야 결례니 뭐니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라떼를 해코지하기라도 할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워낙 완강한 태도에 후줄근한 차림새의 헤겐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가 버렸고, 나는 라떼와 함께 얼결에 자리에 앉았다. 레이커스는 정말로 내키지 않는지 한참 우리 쪽을 노려보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다가와 앉았다.
마탑주는 나이에 비해 꽤 고운 손을 깍지 껴 탁자에 올리며 우리에게 물었다.
“그래요. 그래서 무슨 볼일로 이렇게 귀한 분들께서 행차하셨을까요?”
“할머니! 제 손님인데요.”
“너는 가만히 있거라. 네가 상대할 분이 아니다.”
라떼는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그래도 제법 어른스러웠는데, 할머니와 함께 있으니 영락없이 어린 손녀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우리의 볼일을 떠올리며 레이커스를 흘끗 돌아보았다.
‘연쇄 살인마가 마탑 근처 지하에 기지를 차려 놓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해도 괜찮을까?’
레이커스의 잿빛 눈동자는 줄곧 나를 보고 있었던지 곧장 내 시선을 받았다.
그는 어떤 의견도 표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이지 그 잘생긴 얼굴의 눈썹 하나, 입술 하나의 움직임만으로도 그의 생각을 아주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마음대로 하라는 뜻인 모양인데.’
라떼는 믿을 수 있지만, 마탑주는 글쎄.
게임을 할 때 마탑주는 직접 얼굴을 내미는 일이 없는 설정상의 인물에 불과했다.
아무리 범인이 확정적으로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모리슨 알터의 말에 따르면 범인에게 여자 협력자가 있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 다 협력을 구하다간 오히려 랑비엘에게 달아날 여지를 만들어 주는 셈이 된다.
‘랑비엘을 워낙 믿었으니까. 그가 피해자라고 철석같이 믿다가 일을 여기까지 망쳐 버렸잖아. 이젠 실수하면 안 돼.’
나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드리다가 한 번 떠볼 셈으로 말을 꺼냈다.
“저번에 라떼에게 부탁한 게 있었거든요.”
라떼가 그런 게 있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탑주가 라떼를 한 번 쳐다보고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뭐죠?”
“감정 의뢰를 한 물건이 있었어요.”
라떼가 그제야 손뼉을 한 번 크게 쳤다.
“헉, 맞다. 비늘! 그거 나 혼자서는 감정이 안 되기에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할머니도 모르겠다고 했었어. 일찍 말해 줬어야 했는데…….”
‘알아내지 못한 건가?’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탑주의 안색이 다시 한번 어두워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부산스레 눈앞에 놓인 종이와 펜으로 뭔가를 자꾸 메모하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냐. 마탑주는 알아본 거야. 그 비늘이 레이커스의 것이라는 걸.’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만약 알고도 라떼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면, 마탑주 역시 내가 했던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능청스레 말을 덧붙였다.
“요즘 연쇄살인으로 파크 안이 온통 흉흉한 건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현장에서 주운 물건이었습니다만…….”
띠링!
경쾌한 알림음 때문에 순간 나는 말을 흐렸다.
[마리나 라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80/99)
호감도 이벤트 : 쪽지]
어디에서 획득한 아이템인지, 숨기지 않고 이야기해서 호감도가 오른 건가?
‘마탑주도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궁금해한 건가?’
난 묘하게 서로를 떠보는 듯한 이 상황이 갑자기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나 라커는 나를 한참 살피듯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러 오신 거라면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마리나 라커는 안색이 어두운 채로 레이커스의 눈치를 살피곤 다시 손으로 뭔가를 습관적으로 적어 대며 말했다.
“……알아내기 쉬운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난 속으로 확신했다.
‘마탑주는 레이커스가 연쇄살인의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픽.
지금까지 줄곧 이 대화를 방관하고 있던 레이커스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흘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한 흉포한 짐승의 미소 같았다.
“재밌는 말을 하는군, 할멈. 마탑주가 키메라의 비늘에 대해 모르는 바가 있나?”
그 음산한 말투에 나까지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라떼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눈알을 되록되록 굴렸고, 마리나 라커의 얼굴은 한층 더 새하얗게 질렸다.
“제, 제가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그보다 이렇게 대접도 못 해 드리는데 볼품없는 로비에 앉아서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공작님께서는 다음에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마리나는 그 이야기를 끝으로 대화를 마칠 생각인지 라떼를 재촉해 일으켜 세웠다.
“다음에 또 찾아 주십시오. 그땐 이런 정신없는 차림이 아니라 좀 더 단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겠네요.”
최대한 뻔뻔하고 유들유들하게 인사를 했지만, 시선에 서린 공포는 채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잡을 새도 없이 라떼와 마탑주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나는 손아귀에 뭔가가 쥐여지는 것을 느꼈다.
시선만 떨궈 소매와 손가락 사이로 쪽지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주위를 조심하세요.
나중에 혼자 다시 오세요.]
‘……내게 경고를 해 줄 생각이야.’
나는 가슴이 찡 울리는 기분이었다.
마탑주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경찰과 레이커스가 대단히 인연이 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마탑주는 아무도 몰래 단독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마탑주는 내가 의뢰를 맡긴 비늘 때문에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야. 믿어도 돼. 확실하게, 믿어도 괜찮은 사람이야.’
“잠깐만요!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났어요.”
난 막 칸막이를 지나치려는 라떼와 마리나를 붙잡듯 외쳤다. 하지만 마리나는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라떼의 손님이신 건 알지만, 다음에 약속을 잡고 다시 와 주세요.”
그녀의 태도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괜히 위험한 사건에 제 소중한 손녀와 이 마탑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하지만 내겐 하트가 고작 하나 남았어. 더 이상 망설일 수도 없고, 호감도를 올려 가며 사람들을 느긋하게 설득하고 있을 시간도 없어. 당장, 당장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든, 내일 결판을 봐야 한다.
랑비엘이 어떻게 움직일지 뻔히 다 알고 있는 내일.
파크라는 공간 자체를 공포 사건의 배경으로 만드는 범인을 잡고 진엔딩을 봐야만 했다.
‘그건 레이커스를 줄곧 오해하고 그를 범인이라 여긴 내 속죄이기도 해.’
나는 다급하게 달려가 마리나의 손을 꼭 쥐었다.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내 태도에 마리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화를 듣지 못하는 곳이라는 것을 유의 깊게 살피며 속삭이듯 말했다.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으러 왔어요. 마탑주님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마리나 라커가 내 말에 깜짝 놀란 듯 어느새 벗어서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