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2화
레이커스의 말에 놀란 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눈치로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녀석은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하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어쩐지 시간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조금씩 행동이 달라질 때가 있었습니다.”
난 랑비엘이 나를 뻔뻔하게 속여먹으려 했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랑비엘은 내가 기억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파크의 모든 존재가 시간이 되돌아갈 때마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소리다.
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완벽히 기억을 유지하는 것 같진 않습니다. 꼭 처음에는 같은 인물을 죽이니까요. 아니면, 이 모든 살인이 랑비엘에겐 어떤 중요한 의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의식……. 그게 뭘까?’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만 있자, 레이커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워낙 제가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다 보니 제 주위엔 어떻게든 뭔가 이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달라붙어 있는 이가 많습니다. 랑비엘도 그런 놈 중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났다는 것을 저렇게까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난 레이커스의 수려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삼켰다.
실제로도 대단하고 잘났기 때문에 잘난 척하는 것처럼은 들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겸손을 떨면 오히려 재수 없어 보였을 거다.
“랑비엘도 레이커스의 옆에 달라붙어 있었던 이유가 있을 거란 거죠?”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재물이나 지위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방해자인 저를 감시하려는 거겠죠.”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이커스는 워낙 모두의 시선을 사는 것에 익숙하니까 모르는 거야.’
랑비엘 멕레이가 얼마나 레이커스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는지 모르니까, 일부러 리어먼드가에 찾아와서 레이커스와 친분을 다질 만큼 레이커스에게 관심이 많다는 걸 레이커스는 모르니까 저렇게 말하는 거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단순히 방해되어 감시하려는 게 이유는 아닌 것 같아.’
“레이커스가 가지고 있고, 랑비엘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게 뭔가 있을 거예요. 제 생각엔, 랑비엘이 레이커스를 부러워하는 것 같아요.”
레이커스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살인마가 저를 말입니까?”
“이상하게 들릴 건 알지만…… 제 생각엔 그래요. 랑비엘은 레이커스를 동경하는 것 같이 보였어요. 어린애가 질투하듯이, 시종일관 레이커스의 이야기만 해 댔는걸요?”
“……제가 가지고 랑비엘이 갖지 못한 것…….”
그는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는지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양쪽으로 한 번씩 기울여 보였다.
아무래도 레이커스는 마땅한 것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난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미소를 지으면 국왕도 홀릴 수 있을 만한 얼굴,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여유 있는 성품, 태평양 같은 어깨, 크리쳐 몇 마리쯤 우습게 처리할 수 있는 검 실력…….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레이커스와 시선이 딱 마주치고서야, 그가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내 속내를 지독히 잘 알아내는 사람인데.’
몰려오는 창피함에 얼굴뿐만 아니라 속까지 다 새빨개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더듬듯 말을 돌렸다.
“아, 아무튼 랑비엘이 사람을 죽이는 것의 목적을 알아내야겠어요. 그 망할 오망성이 뭔지도요.”
레이커스는 웃음기를 거두며 내 왼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 손등에 키스했다.
‘……이젠 아주 제멋대로야.’
내가 어찌할 줄 몰라서 손을 슬쩍 빼내자,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분부대로 하지요.”
‘고작 가정교사에 불과한 내가 잘나신 공작님에게 이런 존대를 듣게 되다니. 나도 참 출세했어.’
난 기분을 더 내색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이, 이제 중요한 일에 집중하죠.”
“그러시죠.”
창밖으로 마탑이 가까워져 오는 것이 보였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 좁은 공간에 그와 좀 더 있다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마탑 근처에서 내린 나와 레이커스는 마탑 주변을 몇 바퀴나 빙빙 돌며 지하 공간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랑비엘이 나를 끌고 가려고 했던 곳 주변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마땅한 입구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온 거리에 어둠이 깔렸고, 검푸른 하늘 아래로 가스등이 나란히 불을 밝히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거리에서도 가장 밝은 건물인 마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찾아선 안 되겠어요.”
내게 외투를 벗어 주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변을 탐색하던 레이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인가와 상점의 사람들을 소집해서 지하 공간을 물색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찰도 부르겠습니다.”
난 가스등의 노란 빛 아래에서도 참 영롱하게 빛나는 그의 금발을 멍하니 바라보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정말 생각하는 스케일 자체가 다른 공작님이다.
“너무 일을 벌이면 랑비엘이 눈치챌 거예요. 일단 마탑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도움을 좀 청해 보려고요.”
레이커스가 영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마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거북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께름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치 신전을 바라볼 때의 얼굴 같은?
하지만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도 내 말을 반대하고 나서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앞장서서 마탑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와.”
내일이 핼러윈이라 그런지, 마탑의 로비도 온갖 핼러윈 장식품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잘린 팔과 잘린 다리들이 종유석처럼 엉망으로 매달려 있었고, 입구 근처엔 끈적하고 질퍽질퍽한 붉은 액체가 흘러 있어서 온 바닥엔 붉은색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심지어는 오가는 직원들마저 모두 눈알이 흘러내리거나 잘린 목을 들고 다니는 괴상한 분장을 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사실적인 분장이라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본 적 있어. 마탑의 핼러윈 장식. 이미 수집한 이벤트니까. 하지만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까 너무 무서운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무래도 장난기 많은 라떼가 마탑의 후계자라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나는 눈앞까지 덜렁덜렁하며 길쭉하게 매달려 있는 살구색의 다리 장식을 피해 간신히 카운터로 다가갔다.
“저…….”
내가 말을 붙이자, 손에 든 머리통으로 저글링을 하고 있던 남자가 나를 흘끗 바라보곤 깜짝 놀란 듯 손을 멈췄다. 그 탓에 머리통들은 허망하게 바닥으로 떨어져서 수박처럼 깨져 버렸다.
‘……윽. 토, 토마토케첩일 거야.’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젓는데, 카운터의 사내가 제 머리를 가리고 있던 검은 두건을 얼른 벗었다.
그는 눈을 반짝반짝하며 나와 내 뒤쪽에 서 있는 레이커스를 번갈아 보더니 몸을 크게 굽혀 인사했다.
“아르비체 님 아닙니까?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너무 영광입니다.”
도대체 어떤 소문 때문에 저렇게 날 반가워하는지, 이젠 묻기도 무섭다.
난 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바로 본문을 꺼냈다.
“……감사해요. 저, 혹시 라떼는 어딨어요?”
“아, 후계자님 찾으시는군요. 마침 저기 로비에 마탑주님과 함께 대화하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죠.”
“중요한 대화 중일 수도 있는데, 그럼 조금 있다가……”
카운터의 남자는 빙긋 웃었다.
“아니요. 후계자님께선 지금 당장이라도 마탑을 탈출하고 싶으신 것 같던데, 손님이 오셨다고 하면 굉장히 반가워하실 겁니다.”
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눈을 깜박였다.
레이커스와 내가 안내받아 간 곳은 로비 구석에 있는 공간이었는데, 벽으로 분리가 되어 있어서 중요한 손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 보이는 곳이었다.
마탑 전체가 핼러윈 장식으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인 데 비해서, 그곳만은 아늑하고 격식 있어 보였다.
흰 머리의 중년 여성과 라떼는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척 보기에도 저 중년 여자분이 마탑주네.’
길고 뾰족한 검은 모자를 쓴 데다,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는 것만 해도 전형적인 마녀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저것도 코스프레일지도 몰라. 여기 마탑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마법과는 거리가 먼 곳이니까.’
안마의자 같은 도구만 만드는 곳처럼 보이지만, 키메라를 제작하거나, 사람의 뇌 속을 들여다보거나 하는 것으로 봐서…… 동화 속에 나오는 연금술사와 느낌이 비슷했다.
그리고 라떼와 마탑주와 함께 앉아 있는 남자는 30대는 훌쩍 넘겨 보이는 얼굴이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단추도 다 채우지 않고 흐트러진 옷차림이었다. 걸치고 있는 것 하나하나가 값비싸 보이긴 하는데, 지나치게 단정하지 못한 느낌이 있었다.
‘와, 그래도 마탑주와 라떼 정도 되면 대단한 신분인 거 아닌가? 라떼와 한 테이블에 있는 것치곤 지나치게 편안한 차림이신데…….’
친한 사람이라도 되나 보다 하고 생각하던 중에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라떼 씨는 요리는 잘하십니까?”
“우리 손녀가 손으로 하는 거라면 뭐든 재주가 있답니다.”
“아뇨, 할머니. 저 요리는 못 해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어떤 뜻으로 물어보시는 거예요?”
차례로 남자의 목소리, 중년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불쾌함으로 가득 찬 라떼의 목소리였다.
무슨 상황인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문득 르뮈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라떼의 할머니가 왕궁 연회에서 만나 보라고 파트너로 소개해 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저래.’
그 이야기 속의 사람이 저 사람인 모양이었다.
나는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만약 그렇다면 라떼의 심정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서, 기본적인 예의라는 것이 부족해 보여서.
‘왕궁 연회에 파격적인 옷차림을 하고 나타날 만했네…….’
“흠흠, 실례합니다, 마탑주님과 후계자님. 손님께서 오셔서 안내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나와 레이커스가 멀찍이 서 있는 사이에 카운터의 남자가 먼저 가서 물었고, 라떼가 손님을 찾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 죽어 가는 것처럼 안색이 어둡던 얼굴이, 나를 발견하고는 금세 환해졌다.
“아르비체!”
라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구세주라도 만난 듯 내게로 달려오는 라떼의 얼굴에 카운터의 남자가 그것 보라는 듯 눈을 찡긋하곤 물러났다.
띠링-!
그때, 알림음이 들렸다.
[라떼 라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23/198)]
‘왕궁 이벤트만큼 효과가 좋은 걸.’
라떼가 이 상황이 오죽 싫긴 했나 보다 싶어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