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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11화 (111/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1화

나는 레이커스를 밀치듯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곤 지나 알터가 사람들에게 잡혀 있을 다리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레이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걸음을 맞추며 곁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내가 레이커스라면…… 왜 먼저 키스해 놓고 사랑한다는 말은 모르는 척하냐고 투덜거렸을 텐데.’

역시, 그는 참 어른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겨우 인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어떻게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술렁였다. 차디찬 바람이 마음속에만 부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마음속이 어찌나 술렁이는지, 속이 다 찌르르하게 아픈 것 같았다. 아니, 그냥 그런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아팠다.

‘감정 때문에, 몸이 아플 수도 있구나.’

나는 조금 당혹스러운 감정에 놀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었다.

차가운 초겨울 밤의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어 시리게 만든 뒤 되돌아 나가자, 겨우 조금 진정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허공으로 손을 뻗어 익숙하게 시스템 창을 조회했다.

가장 먼저 켜 본 것은 호감도 창이었다.

[델리아 리본 Lv.1

랑비엘 멕레이 Lv.2

라떼 라커 Lv.2

레이커스 리어먼드 Lv.4

루나 Lv.3

르뮈에 라루스 Lv.1

밀로라드 드라셀 Lv.1

블란테 빅토리아 아레나 Lv.1

블리에 화이트 Lv.2

샤인 Lv.3

아만타 벨브 Lv.1

안톤 리오 Lv.2

앰버 레몬 Lv.1

앨라이 쿠스 Lv.3

트리버 루악 Lv.1]

‘역시.’

지나 알터의 이름이 리스트에 없었고, 왕궁 이벤트의 결과는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열어 본 것은 아이템 창이었다.

‘돋보기, 권총, 여름 들꽃…….’

창을 쭉 둘러보던 내 눈에 수호자의 총알이 눈에 들어왔다.

[수호자의 총알(12) : 은제 총알. 크리쳐와 살인자들에게 유효합니다.]

역시.

아이템은 줄지 않고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모든 게 세이브된 시점 그대로 저장된 거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을 상대로 낭비해 버려서 아까웠는데 잘됐어. 워낙 고가의 아이템이었으니까.’

“벌써 가시게요?”

그때 바로 옆에서 누가 나를 붙잡듯 말을 걸어왔다.

아까 얼떨결에 나를 놓쳤던 앨라이가 거기 서 있었다.

“아, 앨라이 님.”

“좀 더 있다가 가셔도 괜찮은데요.”

“아뇨,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곧 또 들를게요. 앨라이 님께는 정말 얼마나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이지…….”

“감사라뇨?”

“그럴 일이 있어요. 앨라이 님이 아니었다면 아주 많은 걸 잃어버릴 뻔했거든요.”

앨라이가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 기울였다.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물들어 있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내 소중한 세이브 NPC. 역시 가진 호감도 아이템들을 다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귀하디귀한 이였다.

당장 가진 아이템 중엔 줄 만한 것도 없고 해서, 감사의 뜻으로 포옹이라도 할까 해서 팔을 벌렸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고 있던 앨라이 대신, 내 품 안에 쏙 들어온 건 내 뒤쪽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레이커스였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단단한 품에 당황해서 얼굴이 뜨거워지는데, 레이커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키스했다.

남 앞에서 이러는 일이 없었는데, 왜 이럴까.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들은 척도 안 하고 도망친 데 대한 복수일까?

낯뜨거워서 얼른 레이커스의 품에서 물러나는데, 앨라이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레이커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내 곁에 선 레이커스를 보며 쏘아붙였다.

“리어먼드 공작님께선 구속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아무리 고용 관계라지만 평소 방문도 안 하시던 신전까지 따라오실 정도로 한가하시다니…… 취미 생활이라도 하나 시작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레이커스가 아니었다.

“그러는 분께서도 대신관 대리가 되어 바쁘실 텐데, 아르비체를 졸졸 쫓아다니실 시간에 자수라도 하나 더 놓으시죠.”

“공작님! 지금 저를 모독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시간을 되돌아와도 둘이 투덕거리는 건 이렇게 똑같을까?’

여전히 개와 토끼 같아 보이는 둘의 모습을 보다가, 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웃음이 났다. 유치한 싸움을 보는 게 귀여워서.

영양가 없는 다툼을 본 덕분에 마구잡이로 날뛰던 심장은 좀 진정되었다.

난 앨라이 쪽을 보며 말했다.

“지금 앨라이 님을 찾고 있는 어린 신관들이 많으니까 얼른 돌아가세요.”

“아, 벌써 찾을 때가 되었습니까?”

앨라이가 머리 위를 흘끗 쳐다보고도 조급해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런 건 서두를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난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을 덧붙였다.

“그리고 다리에 지나 알터라는 여자아이가 있으니까, 찾아서 좀 보호해 주시고요. 내일 아침 왕궁 연회에 올 때, 가능하다면 신전의 신성 기사들도 호위로 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데려오시면 좋겠네요. 인질극이 있을 예정이라서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 놓는 이야기를 들은 앨라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애초에 앨라이가 내게 호감을 느꼈던 계기가, 그의 대신관 후보 서임을 내가 미리 예지했던 거였다.

앨라이는 내가 털어놓은 말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는 대신, 내 말을 잊거나 잘못 이해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듯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저도 일개 평신관이 아닌지라 조금 더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요. 추가로 더 필요하신 부분은 없으신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말에 수긍하는 앨라이를 보고 놀란 건 레이커스였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 발짝 물러나 팔짱을 끼고서, 나와 앨라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이커스의 또렷한 잿빛 눈만 봐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제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앨라이에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다 털어놓은 것에 대해 또 삐진 거겠지.’

사정이 있었다는 데도 저러네.

레이커스는 너무 유력한 범인 후보였고, 그에게 이런저런 사정에 대해 털어놓을 상황이 아니었다.

‘레이커스가 날 죽인 범인이라 생각했다는 이야기는 앞으로도 안 해야겠어. 더 삐질 것 같으니까.’

난 속으로 혼자 다짐하며 앨라이에게 손을 내저었다.

“당장은 더 필요한 일이 없어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아르비체 님의 행보에 제가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 드릴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바람둥이 공작보다는 저와 함께 연회에 가시는 게 더 도움이 되실 듯도 합니다만…….”

“바람둥이요?”

“공주님과의 염분은 신전까지도 흘러들던걸요.”

‘귀엽기도 하지.’

열성적으로 파트너 자리를 권해 오는 그 귀여운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이 이야기를 계속했다간 레이커스가 토라져 버릴 것 같아서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앨라이의 뒤쪽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어린 신관들이 앨라이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앨라이는 한숨을 쉬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흰 종이 관을 쓴 그의 모습을 그제야 찾아낸 어린 신관들이 재빨리 다가와 그를 수행했다.

“앨라이 쿠스 님, 여기 계세요?!”

“헉, 앨라이 님. 여기 계셨던 겁니까?”

점점 멀어지는 앨라이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내 귀에 들려왔다.

“천사의 다리에 지나 알터라는 여자아이가 있다고 합니다. 찾아내서 내게 데려와 주세요…….”

역시, 든든하기 짝이 없다.

난 고개를 돌려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한 시선으로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언제나 어른스럽게 구는 그는, 앨라이의 앞에서는 이따금 이상할 정도로 티 나게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그게 재밌기도 했지만, 오늘은 미안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손을 뻗었다.

“다음에는, 레이커스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할게요.”

그는 눈썹을 부드럽게 휘며 내 손을 잡았다.

난 언제나처럼 그의 팔을 쥘 거라고 생각하고 손을 내밀었던 거라, 내 손 가득 전해져 오는 따뜻한 체온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핑계로 아예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넣어 단단히 깍지까지 끼고선 날 재촉했다.

난 불평을 하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한숨과 함께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데도 어쩜 저렇게 치명적으로 관능적이게 잘생겼을 수가 있지.’

결국, 언제나처럼 불평은 입 밖으로 나와 보지도 못하고 입 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레이커스와 나는 그 길로 곧장 마차로 향했다.

저번에도 봤던 사람들이 나와 레이커스에 대해 또 수군거려 댔다는 걸 눈치챈 건 마차에 다 도착한 뒤였다.

레이커스가 워낙 능숙하게 다리 쪽 사람들에게서 나를 잘 가려 주었기 때문에, 줄곧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그가 나를 배려해 주었다는 것도 뒤늦게 눈치챘다.

하여튼, 못살아.

지금도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깊이 빠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물이 찰랑찰랑 차올라 목 끝까지 차오른 기분이었다.

난 고맙다는 말을 하는 대신 답답함에 한숨만 자꾸 몰아쉬며 마탑이 있는 시가지로 향했다.

덜컹, 덜컹.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난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나을지, 레이커스와 나 단둘이서 일을 진행하는 게 나을지.

‘지금까지는 세이브 포인트에서부터 일어났던 모든 일이 그대로였으니까, 랑비엘 맥레이를 포위하는 건 내일 하면 될까?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복잡한 생각들 속에서 레이커스에게 물었다.

“레이커스, 내일 랑비엘이 연회에 참석하는 건 그대로겠죠?”

당연한 것을 그냥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은 건데, 레이커스는 내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곤 조금 고민하는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놈이 다른 사람들처럼 계속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가끔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거든요.”

뜻밖의 말에 생각이 그대로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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