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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10화 (110/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10화

잠에서 깨어나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레이커스만이 나의 잃어버린 이틀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감정이 북받쳤던 모양이었다.

줄곧 생각했었는데.

여긴 게임 속이고, 내가 여기서 누군가와 중요한 인연을 맺어 봤자 어떤 결실도 보지 못할 것에 대해서.

‘레이커스에게 키스를 하다니…… 내가 정신이 나갔지.’

그에겐 그의 세상이 있고, 내겐 나의 세상이 있다.

오히려 게임 속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고,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인연을 많이 맺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난 게임 캐릭터가 아니잖아.

‘이게 어떻게 만들어진 공간이든, 전부 다 꿈이든 난 여기에서 언젠간 깨어날 테니까. 그러니 여기서 그만 정신을 차리자.’

레이커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고서야 그가 내게 속삭여 주었던 맹세들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괜히 더 여지를 주는 것도, 그에게 못 할 짓이다.

나 자신을 그렇게 다그쳤지만, 나는 레이커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참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강 위에서 타들어 가는 종이들의 붉은 빛이 반사되어, 영롱하게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어.’

이제 레이커스가 없는 세계는 너무 허전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던 그에 대한 의심마저 사라지자, 레이커스에 대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아르비체?”

레이커스가 깜짝 놀라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어깨가 젖도록 한참 그에게 기대 있었다.

“괜찮습니까? 왜 그럽니까? 제가,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흑.”

레이커스가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전히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로, 커다란 손이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달래 주었다.

“미안합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진정하고도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고 그의 어깨에 파묻고 있기만 하자, 그는 내가 자신을 탓한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내 등을 계속 살살 두드려 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거미가 득실거린다고 해도 제가 막아설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만…… 마지막 순간, 갑작스레 여기로 돌아오기 바로 전에는 저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사태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레이커스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줄줄이 늘어놓는 말을 들으며,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쿵, 쿵.

그의 가슴팍에 대고 있는 손바닥으로 레이커스의 심장이 뛰는 게 전해져 왔다.

그의 목소리에서, 그의 손에서, 그의 심장 소리에서…… 레이커스의 모든 감각이 나를 향해 있고, 그가 나를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그래, 또 한 번 더 미루자.’

레이커스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떻든,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 모든 것은 내가 돌아갈 수 있는지 아닌지 정해진 뒤로 미뤄 둬도 되잖아.

‘지금은 내 감정보다 더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있어.’

범인을 잡고, 크리쳐가 출몰하는 사태도 해결하고, 그리고 파크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 나면…… 그러면 그때 다시 생각하자.

레이커스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어떤 사이가 될지.

내 마음은 이제 부인하지 않겠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으니까.

난 눈치도 없이 혼자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를 그가 듣지 못하길 빌며,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레이커스.”

그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마주 바라봤다. 눈물이 고인 내 눈가를 손으로 훔쳐내 주며, 내가 안쓰러운지 눈썹을 늘어뜨렸다.

‘뒷일이 어떻게 되든, 사실을 털어놓자. 그래야 레이커스도 마음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길게 한숨을 쉬어 숨을 정리하고는 단숨에 털어놓았다.

“사실…… 전 여기 파크에 사는 존재가 아니에요.”

레이커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난 혀에 걸려 껄끄럽기 짝이 없는 말을 간신히 혀에 올렸다.

“전 다른 곳…… 다른 어딘가에 살던 존재예요. 거기선 여기를 게임이라고 불렀어요.”

“게임? 그게 뭡니까?”

“그냥 재미를 위한 소설처럼, 하나의 이야기지만 읽는 사람이 마음대로 캐릭터 하나를 조종한다고 하면 이해가 갈까요? 특정한 시점에서 모든 사건을 기록해 두면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그런 거예요.”

레이커스는 도대체 이 이야기가 다 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나는 그의 이해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쏟아 놓았다.

“제가 왜 파크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관심을 가지는지 궁금해하셨죠? 그래서였어요.”

“그래서라는 게…….”

“연쇄 살인 사건이요. 그게 제가 했던 게임의 중심 사건이었거든요.”

레이커스는 내가 막무가내로 쏟아 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오래지 않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망할 신전의 세계관 같군요. 세상은 수많은 연결 고리로 서로 이어져 있다고 하는.”

난 손을 짝 부딪쳤다.

“……아, 앨라이 쿠스도 그 말을 했었어요.”

그는 내가 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종잇장 같은 신관에게는 먼저 말씀하셨던 겁니까?”

“……아니, 그야…… 그럴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 누가 믿겠어요?”

레이커스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내가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내 눈을 아주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언제 제가, 아르비체가 한 이야기를 제대로 믿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눈알만 되록되록 굴리자,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아르비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겪었던 시간이 멋대로 되감기기도 하고 다시 제대로 흘러가기도 했던 것들이 어떻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레이커스의 시간은, 레이커스가 죽지 않아도 멋대로 되돌아갔나요?”

“네.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요. 하지만 제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파크의 살인 사건과 관련해서, 일이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틀어지면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게임과 레이커스의 경험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크 전체가 세이브와 로드를 반복하고 있는 사이에 드래곤의 피가 섞여 있는 레이커스만 기억을 보존하게 된 걸지도.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관계가 없진 않을 것 같아요. 그건 나중에 좀 더 생각해 봐요. 아무튼, 그래서 제가 이 연쇄 살인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됐고…… 그래서, 예상 피해자들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던 거예요.”

레이커스는 내 말을 정리하듯 잠깐 생각을 해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캐서 헌트의 집 앞에도 있었던 거군요. 전부 다 이해했습니다.”

그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범인을 잡아 낼 때까지 몇 번 시간을 더 되돌려도 괜찮겠습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난 왼쪽 위, 시스템 창에 떠 있는 하나의 하트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제겐 이게 마지막 기회예요. 이번에도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레이커스가 딱딱하게 굳었다.

“……죽다뇨?”

그가 아직 목걸이가 없는 내 목을 흘끗 바라보곤 다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항상 여유가 넘치던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갑작스레 시간이 다시 되돌아온 게…….”

내가 어떻게 되어서 시간이 다시 되돌아왔는지,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레이커스는 게임이라는 걸 잘 모르니까 당혹스럽겠지만, 게임을 하는 처지에서는 죽음이 그렇게 흔치 않은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죽음을 기꺼워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기꺼워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거예요.”

레이커스가 내 양손을 제 양손으로 꼭 쥐었다. 그런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곤 내 왼쪽 손등에 한 번, 오른쪽 손등에 한 번 차례로 키스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씀해 주십시오.”

레이커스의 부드러운 음성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레이커스가 사라진 직후, 랑비엘을 만났어요.”

“랑비엘? 랑비엘 멕레이 말입니까?”

레이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요?”

“그자가, 납치범이었어요.”

레이커스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었다.

“그가 당신을 죽였습니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스스로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을 거다. 게다가 랑비엘이 날 죽인 것과 다를 바 없기도 했으니까.

그는 나를 무릎에 앉혀 두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거다. 잿빛 눈동자 속에서 새카만 분노가 일렁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경위는 모르겠지만, 그자는 나를 어딘가로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어디로 말입니까?”

“마탑 근처의 지하에 있는 공간이라고 했어요. 거기를 조사하는 게 먼저일 것 같아요. 지금 가요.”

레이커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의 무릎 위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내 몸을 다시 한번 꽉 끌어안는 바람에 일어날 타이밍을 놓쳤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서 내 어깨에 제 고개를 묻은 채 나직한 한숨을 토하더니 속삭였다.

“다시는 당신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알았어요.”

“당신이 여기 존재하게 된 계기가 뭐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훅 들어온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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