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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09화 (109/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9화

나는 눈앞에서 반짝이는 알림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세이브 데이터가 있다고……?’

절망뿐이던 마음속에 한 줄기 빛이 드는 기분이었다.

‘이런 게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

난 기쁜 마음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분명히 세이브 데이터가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뜻밖의 메시지였고,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것이긴 했다.

여러 사람과의 기억에서 내가 잊힌다는 게 너무 싫었으니까.

하지만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내겐 하트가 고작 세 개밖에 없고, 그중 두 개는 이미 써 버렸다. 세이브된 시점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하트는 하나 줄어들 거다.

‘세이브된 데이터를 불러온다는 건, 선택지에 따라 분기가 나뉘는 게임에서는 꼭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어.’

<살인자들의 밤>은 호감도에 따라, 그리고 내 행동에 따라 분기가 나뉘는 추리형 게임이다.

어느 시점에서 그 말도 안 되는 배드 엔딩이 시작된 것인지 정확히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더 나은 루트에 도달하리라는 보장이 없기도 해.’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똑같은 일을 한 번 더 겪으라면 정말 자신이 없었다.

나는 기억하는데,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함께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레이커스가 그토록 내 기억에 집착했던 이유를 나는 이제 절절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내가 죽음을 선택했던 마지막 날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꽤 순조로웠다. 모리슨 알터도 쓸데없는 혐의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호감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상으로 정말 많이 올려 뒀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이브 데이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보자.’

잠깐 망설였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고 생각하자, 새까맣게 칠해져 있던 눈앞이 천천히 밝아져 왔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시스템 창 왼쪽 위에 표시된 하트가 딱 하나만 남아 있는 것, 어둑어둑하게 해가 저문 하늘, 그리고 천사상과 강의 모습, 눈앞에 서 있는 종이 관을 쓴 새하얀 옷차림의 남자.

종이 관을 쓴 앨라이 쿠스의 모습은 딱 한 번 봤으니까,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대신관 후보로 정식 서임되는 날,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는 곳에서.

‘……여긴, 내가 죽은 날로부터 2일 전이야.’

워낙 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쏟아지듯 일어나서 많은 날이 지난 것 같지만, 막상 시간으로 따지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불티가 타들어 가는 강의 모습 같은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있었고, 내 눈앞에 선 앨라이 쿠스는 언제나 봤던 것처럼 정갈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천천히 현실 감각이 되돌아왔다.

앨라이와 나의 모습은 내가 게임을 할 때 봤던 삽화 중 하나와 완벽히 같은 모습이었다.

“망각의 축복은…….”

난 나도 모르게 앨라이 쿠스와 세이브를 할 때 플레이어가 읊는 대사를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만인에게 평등한 것임을.”

앨라이 쿠스는 내가 왜 갑자기 기도문을 읊는지 의아해하는 눈치로 내 말을 받아 주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바로 여기가 세이브 포인트야.’

그때는 세이브 포인트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해서, 나도 모르게 저장할 때의 동작과 같은 행동과 대사를 했었던 건데……. 뭔가 기대를 가지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근데 정말 우연처럼 한 그 행동 때문에 세이브가 되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멍하니 무릎을 꿇은 채로 있자, 앨라이가 좀 당황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비체 님? 괜찮으십니까?”

그 손을 잡으려는 순간, 내 옆으로 다른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나는 이 순간을 잘 알았다.

두 손을 다 쥐고 몸을 일으킨 순간, 두 손 중 하나의 주인인 레이커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금발 아래로 언제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에는 어딘가 지친 듯한 기운 없는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엉망으로 뒤섞인 감정이 보였다. 뭔가를 잃어버린 황망함처럼 보이기도 했고, 왜 이런 곳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길을 잃은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쉽게 읽어 내기 어려운, 그 많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는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와 시선이 맞닥뜨리는 순간, 나는 왈칵 울음이 터졌다.

돌아왔으니까, 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소모한 아이템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왕궁 연회에서 쌓았던 호감도가 다시 내려갔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사건 수첩의 내용은 어떻게 되었는지, 랑비엘의 행적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해야 하는 말도 많은데.

하지만 그중 어느 것보다 먼저 이 사람을 안아 주고 싶었다.

난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앨라이의 손을 놓고 레이커스의 단단한 품에 폭 안겨 얼굴을 기대었다.

“……아르비체?”

레이커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하지만 쏟아지기 시작한 울음은 쉽게 멎질 않았다.

“잠깐 실례.”

앨라이에게 한 말인지, 내게 한 말인지 모르겠다. 레이커스는 그렇게 말하고선 나를 가뿐하게 안아 올렸다. 그래도 다 큰 여자의 몸인데, 그는 날 안아 올려 제 한쪽 팔로 날 수월하게도 지탱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굴을 숨기고 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걸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레이커스는 인적이 없는 강가로 걸어가 나를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

어두운 하늘, 어두운 강, 신전의 행사 때문에 강 위에서 아름답게 타들어 가는 종이와 흩날리는 불똥들.

난 엉망으로 일그러진 시야 사이로, 내가 보고 싶었던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냈다.

정갈하게 빗어 올린 금빛 머리, 수려한 이마와 눈썹 뼈 아래로 매혹적으로 폭 파인 아이홀, 얄팍한 눈두덩이, 섬세한 속눈썹, 그리고 나를 담고 있는 빛을 잃은 잿빛 눈동자.

하- 후하-.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어 자꾸 끅끅거리며 차오르는 숨을 겨우 진정시킨 나는 그를 조용히 불렀다.

“레이커스.”

그를 부르는 이름에, 레이커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먼저 실수한 건 당신이잖아요. 이날까진, 나를 그린 양이라고 불렀어요. 기억해요?”

레이커스의 지친 듯하던 잿빛 눈이 내 말에 반짝, 놀라는 게 보였다. 그는 눈살까지 찌푸려 가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손을 뻗어 레이커스의 양 볼을 손으로 쥐었다. 내 손도 그의 볼도 차가웠지만, 그나마 내 손이 조금 더 따뜻했다.

내 손에서 그의 볼로 천천히 옮아가는 온기를 느끼며 나는 가까이에서 오래도록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이커스가 초조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아르비체,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촛불 하나를 발견한 것처럼, 그는 제가 말을 크게 하면 그게 잘못되기라도 할 것처럼 살금살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런 그가 가엾고 바보 같아서, 그런 그가 너무 좋고 사랑스러워서, 그런 그를 오해한 내가 미안해서…….

그 많은 감정이 하나로 뒤섞인 채로, 그의 뺨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레이커스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이 가 닿았다.

레이커스가 내게 키스한 순간들은 모두 혼란스러웠지만 달콤하긴 했는데, 내가 먼저 한 키스는 서툴고 당혹스럽기만 했다.

입술 위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에 뒤늦게 속이 울렁거렸다.

내게 키스를 되돌릴 생각도 못 하고, 레이커스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르비체.”

우리는 윗입술이 맞닿은 채로, 코끝이 맞닿은 채로, 속눈썹이 서로 맞닿을 듯 가까이에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의 다디단 숨결을 느끼며 속살거렸다.

“레이커스, 레이커스라고 했어요.”

“……그건.”

“다 기억해요, 전부. 전부 다 기억해요. 당신이 나를 아르비체라고 불렀던 것도, 제가 당신을 레이커스라고 불렀던 것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나는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진짜 기가 막혀서. 그런 레이커스야말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네?”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걸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같은 시간을 계속 되풀이해서 살고 있다는 거.”

레이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내 볼로 미처 다 못 닦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기가 막혀서 그의 가슴팍을 한 번 더 때렸다.

“어떻게 알았냐니요? 먼저 말을 해 줬어야죠.”

“……하지만.”

“왜요? 그것만은, 너무 절망적일 것 같았어요? 제가 그 기억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제가 당신을 잊어버릴 것 같았어요?”

내가 울음 섞인 말로 고함치자, 레이커스는 내 말에 뭐라고 함께 화를 내는 대신 나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벤치 위에 앉았던 몸이 그의 무릎 위로 달랑 들려 올라갔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사과만 하니까, 그가 얼마나 나를 소중히 대해 왔는지 아니까, 더 이상 뭐라고 화도 못 내겠다.

내가 한숨을 폭 내쉬자, 레이커스가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물었다.

“당신, 당신도 같은 시간선을 되풀이해서 살고 있었던 겁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맞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틀린 이야기였다.

나는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도 좋을지 잠깐 고민했지만, 전부 털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태 레이커스와 내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오해는 사실 서로 털어놓지 않고 숨겼던 한 줌의 진실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다 얘기할게요. 전부.”

그간 내 속에만 담아 왔던 이야기들을 어디서부터 털어놓아야 할지 몰라서, 난 입을 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전 사실…….”

‘아르비체 그린이 아니에요.’

하지만 막상 이야기하려니 시작부터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이야기를 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거지?’

레이커스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내 말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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