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8화
서릿발 같던 레이커스의 눈빛, 호감도가 하락했다는 메시지…… 그 소름 끼치던 공포의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살해당해서 첫 번째 하트를 잃었던 것도.
나는 더 이상 달아날 곳도 없는 골목에 선 채로 생각을 되감았다. 그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던 기억을.
‘내가 어떻게 죽었지?’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첫날을 떠올렸다.
조금만 삐끗하면 너무너무 논리적으로 당연해서, 연속되는 기억 속의 비어 있는 텅 빈 구간을 자연스럽게 내가 받아들이기 쉬운 방향으로 정립하게 되니까.
내가 레이커스를 의심했고, 그를 살인마라고 불렀다.
그다음에는 알림창이 떴었다.
[레이커스의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그리고 레이커스를 피해 달아났었다. 한참 동안 골목 사이를 헤매며 달아나다가, 넘어졌다. 그리고 입이 막혔고, 붙잡혔고…… 그게 끝이었다.
‘죽임당하는 순간, 상대가 누구인지 봤던가?’
나는 다시 한번 침을 삼키고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그 살인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세상에.’
난 지금까지 잘못 믿고 있었던 거다.
‘처음부터 아르비체 그린은 살인마가 노리는 대상 중 한 명이었잖아, 분명.’
그대로 주저앉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놀랐다.
레이커스는, 나를 죽인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게 오해였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말이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퍼즐이 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레이커스를 믿어도 좋다는 생각은, 이 와중에도 어딘가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줄곧, 그를 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으니까. 그를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랐으니까.’
샤인과 루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나를 위해서.
나는 너무 충격적인 생각에 나도 모르게 멈춰 섰던 다리를 재촉해 다른 골목으로 향하려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랑비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익숙한 은빛 곱슬머리 아래에는, 기묘할 정도로 찢어진 미소 대신 검은색 가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난 뒤로 손을 돌려 아이템 창을 조작했다.
[수호자의 총알(12) : 은제 총알. 크리쳐와 살인자들에게 유효합니다.]
밀로라드의 비밀 상점에서 사 둔, 내 최후의 무기였다.
이걸 명중시킬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지금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을 텐데.
이를 꽉 깨물며 슬쩍 총알의 빈 슬롯에 수호자의 총알을 끼우는데, 점점 가까이 다가온 랑비엘이 키득거리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꽤 싸늘한 날씨임에도 어찌나 긴장했는지 등을 타고 식은땀이 또르르 굴러가는 게 느껴졌다.
“그린 양.”
내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쏘아보기만 하자, 랑비엘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놓았다.
“왜, 당신을 여태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인제 와서 존대를 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이제 거칠 게 없었다.
“……레이커스를 협박하고 싶어서?”
난 되물으며 양손으로 총을 감싸 쥐고 눈앞의 놈을 향해 정조준했다.
“크크크, 저를 제법 잘 아시는군요.”
그는 끌끌거리며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기묘하게 번득였다.
“당신이, 궁금했습니다.”
“……내가 뭐?”
“레이커스만 잊지 않는 자인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사는 동안, 레이커스와 저는 운명의 숙적이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놈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산다는 게 무슨 말이야? 레이커스가 무슨 회귀라도 했단 건가?’
수많은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레이커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 현장에 미리 나타나 있던 것, 실종 현장에 가는 것도 지겹다는 듯이 굴던 것, 거미 크리쳐를 지나치게 익숙하게 죽였던 모습, 인간에서 크리쳐로 변신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마치 미리 변할 것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 지하 감옥에 사람을 가둬 둔 것…….
그리고 줄곧 외롭다는 얼굴을 했던 것.
그리고…….
이번 생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했던 것.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이 게임 속에서 레이커스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살아왔던 거야.’
이건, 게임 속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시 느껴졌다.
어떤 식이었을까?
세이브와 로드 사이에서, 계속해서 기억을 유지했던 걸까?
하지만 길게 생각을 이어 나갈 틈이 없었다.
내 속이 두근거리든 말든, 랑비엘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으니까.
“레이커스와 제가 워낙 균형이 너무 잘 맞아서, 처음부터 한 쌍으로 태어난 건 아닐까 의심이 된달까요?”
게임 속 수호자와 범인.
그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맞아야 게임이 계속 유지될 수 있겠지.
나는 당연하면서도 너무 소름 끼치는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놈.”
“솔직히 레이커스가 좀 더 유능한 건 맞습니다만, 제겐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이점이 있으니까요.”
가면 아래를 보지 않아도, 랑비엘이 그 길고 징그러운 입술을 잡아당겨 활짝 웃고 있을 게 보였다.
짜증스레 그를 향해 총을 고쳐 겨누는데, 랑비엘이 내 쪽으로 다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반짝였다.
“하지만, 당신은 알았습니다.”
“내가 뭘 말이지?”
“제 정체를. 아주 손쉽게.”
방금 겨우 알아낸 거다.
그것도 게이머일 때 알고 있던 지식을 통해서.
너무 느리게 알아냈다. 손쉽지 않았다.
“레이커스가 당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를 저도 알겠습니다. 당신, 기억하는 존재더군요.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내가 뭐라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픽 웃었다.
“제게로 오시면,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동료가 생기는 것도 재밌을 것 같으니까요.”
여유 있게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그 걸음걸이를 보는 순간, 게이머로서의 내 감이 분명히 말해 왔다.
‘……이번 회차는, 틀렸어.’
범인을 알아냈으면 뭘 한단 말인가?
레이커스가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만 봐도,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당장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심 한가운데 거미들이 판을 치고 있다면,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리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레이커스를 좀만 더 빨리 믿었더라면. 그리고 그도 좀만 더 빨리 나를 믿고 모든 걸 털어놨더라면…….’
그랬다면, 좀 더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있었을 거다.
좀 더 다른 누군가를 의심할 여지도 있었을 거다.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그를 쏘아보고만 있자, 랑비엘이 혼자서 신나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제가 이겼습니다. 이제 파크는 제 겁니다. 애초에 제 먹잇감을 기르는 양식장이나 다름없었지만요.”
“무슨 말이지?”
“당신이 레이커스의 약점이라는 것은 명백해진 사실 아닙니까? 너무 확연해서, 아주 웃길 지경입니다. 그자가 이렇게 손쉽게 약점을 노출하다니.”
난 피가 나올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멍청이.’
이런 놈을 졸졸 따라온 내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달라지지도 않았겠지만, 레이커스가 그렇게 나를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탕!
나는 그가 방심한 틈을 노려 총을 쏘았다.
“크크, 흐흐흐.”
랑비엘의 몸은, 순간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처럼 바닥으로 흐물거리며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올랐다. 그게 얼마나 빠르게 일어난 일인지 내 눈이 다 쫓아가지도 못할 만큼 빨랐다.
탕! 탕!
다시 두 발의 총을 더 쏘았지만, 아무리 정확히 과녁을 겨눴지만 맞을 기미도 없었다.
탕! 탕!
총 다섯 발의 총알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크크크. 두 분이 사이좋은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레이커스는 나 같은 인질로는 눈도 까딱하지 않을걸. 그가 곧 너를 잡아 가둘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레이커스가 얼마나 정이 많은 사람인지, 난 알고 있다.
내가 납치당했을 때, 그가 나를 찾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고 있다.
저번처럼 우스운 납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놈의 오망성과 많은 살인 사건들을 통해 이 미친놈이 뭘 도모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 목표가 달성되리라는 것도.
그리고 아마 그게 이 게임의 배드 엔딩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것이 되리라는 것도.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 해 주겠어.’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게는 못 두겠다.
나는 손에 쥔 리볼버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랑비엘은 내가 그깟 총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냐는 듯 여유 있게 날 바라보았다.
그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빠른지. 나의 사격 솜씨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그림자와 같이 움직일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다.
난 작게 심호흡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왜 레이커스가 그동안 그토록 내 기억에 집착했는지, 그는 왜 이따금 홀로 버려진 듯한 얼굴을 했던 것인지.
그 혼자 돌고 도는 시간선 속에서 모든 기억을 생생히 가지고 살아 왔었기 때문에.
이번 삶에 모든 것을 다 걸겠다고 생각했다.
레이커스도 이번 삶에 모든 것을 다 걸겠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얼마나 오만했을까?
홀로 반복되는 시간선 속에서 하나씩 잘못된 것들을 수정해 가면서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던 레이커스에게 그것은 얼마나 힘든 다짐이었을까?
그가 왜 초조하게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웠는지 이제는 알겠다.
무엇 하나라도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샤인과 루나를 안아 주고 돌볼 시간까지 할애한 거다.
‘이제 됐어.’
이번 생의 모든 기억을 다 잃어도 좋으니, 다시 시작하자.
샤인과 루나와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을…… 다 잃어도 좋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나는 총을 들어 올려 내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검은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나는 그의 눈이 커다래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노릴 수 있는 건 방심뿐이다. 조금만 늦어도 총을 빼앗길 거다.
나는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당황에 물든 랑비엘의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히다가, 눈앞이 그대로 검게 변했다.
지독한 고통이 전신을 꿰뚫듯 달렸고, 이내 모든 감각이 소멸했다.
[-Bad End – 루트 ‘마지막 탈출’을 클리어했습니다.]
눈앞에 반짝이는 알림창의 문구가 마치 거짓 같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평화로웠는데.
나는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 육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이 시간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호감도를 적립한 게 아까운 게 아니라, 모두와 함께 쌓은 추억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샤인도, 루나도, 밀로라드와 라떼도, 르뮈에와 블란테 공주도, 내 소중한 세이브 NPC들도…….
랑비엘의 계획이 나로 인해 완성되는 꼴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최후의 선택을 했지만, 솔직히 죽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다시 살아갈 힘 같은 거…… 솔직히 남아 있지 않다.
눈을 뜨면 DAY 1의 천장이겠거니 생각하며 멍하니 암흑을 주시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띠링-.
그때, 눈앞에 알림음과 함께 작은 알림창이 반짝였다.
[세이브 데이터가 1개 있습니다. 로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