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07화 (107/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7화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내 눈앞에 서 있는 남자와, 나를 납치했던 범인의 체형을 머릿속에서 겹쳐 보았다.

워낙 목소리와 체형 등을 꼼꼼 감췄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일치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랑비엘의 체형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숨을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숨이 마구 떨리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게임에서 악역과 선한 역할은 명백하게 구분 지어진다.

마치 마피아 게임과 같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마피아뿐. 그 외에는 전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민인 거다.

아무리 여기가 이렇게 현실적인 공간이라고 해도, 게임인 이상……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랑비엘은 희생자잖아?’

지금까지 내가 그를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새까맣게 탄 시체가 발견되었던…….’

천천히 정보들을 되새김질해 보던 나는 숨을 들이켰다.

‘……게이머에게 제공된 모든 정보는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최종장을 아직 보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봤던 정보 중에 제작진이 숨겨 두었던 더미(dummy)가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들에 많은 도움을 받긴 했지만, 내가 그걸 너무 과신했어.’

범인이, 자신을 숨기기 위해 희생자로 위장하는 건 너무 뻔하고 흔한 시나리오인데…… 다른 시신으로 죽음을 위장하는 것도.

그런 생각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내 팔을 다른 팔로 문지르는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동자를 굴려 다시 앞을 바라보자 랑비엘의 보기 좋은 은빛 곱슬머리 아래로, 세로로 긴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유난히 큰 편이라고 생각했던 입술이 부드러운 호를 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린 양?”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 게 의아한 모양이었다. 랑비엘이 나를 재촉하듯 불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관찰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뇨, 아무것도요. 그냥 좀 놀라서요.”

“괜찮습니다. 제 곁에만 있으면 됩니다.”

난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늘어놓는 랑비엘에게 쏘아붙이지도 못하고 숨을 가만히 골랐다.

그가 나를 끌어들여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건 바보짓이라는 것.

‘……어쩌지? 총을 꺼낼까? 아니면 레이커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까?’

하지만 크리쳐들의 소리는 아직도 끊이지 않았다.

레이커스의 그 대단한 실력을 떠올려 보면, 이 도심 한복판에서 레이커스조차 해결하기 어려울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큰일이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다 괜찮아 보였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다 꼬인 기분이었다.

하루 만에 크리쳐들이 대거 출몰하는 사건이 두 번이나 일어난 것도 그렇고, 랑비엘이 이렇게 나를 꼬여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난 최대한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이 자리를 모면해 보려고 일단 입을 뗐다.

“멕레이 공자님.”

“네?”

“리어먼드 공작님께서 그런 협박장을 보내셨다니…… 저로서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하지만이라뇨? 레이커스의 곁에서 그린 양을 따로 모셔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는데, 그런 말씀 마시고 얼른 가시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나중에 합류할게요. 개인적으로 조사할 부분도 있고…….”

“그린 양, 아니 무슨 말씀을 하는 거죠? 보셨잖습니까, 레이커스가 얼마나 악랄한 자인지.”

랑비엘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내가 말로는 설득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손을 뻗었다.

아이템 창을 열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납치범의 어깨에 거꾸로 둘러메진 채 끌려가던 그 비참하고 무력하던 순간이 갑자기 떠올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팅!

그의 손이 내 손목에 닿는 순간이었다.

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에서 작은 빛이 났고, 랑비엘이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깜짝 놀라 내게서 손을 떼었다.

나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랑비엘은 ‘방어’의 대상이라는 걸.

내가 뒤늦게 한 발짝 물러서자,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커다란 입이 귀에 걸릴 만큼 길게 벌어졌다.

입만 돋보기로 확대해 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다만 그뿐인데, 나머지는 내가 알고 있는 미남자의 얼굴임에도 랑비엘의 얼굴은 내가 뭔갈 잘못 본 걸까 싶을 정도로 끔찍하게 변했다.

“……알아차린 모양이군.”

그의 입이 웅얼거리는 말은, 목소리를 변조한 것처럼 들렸다.

마치, 납치범의 그것처럼.

나는 몸을 돌렸다.

‘도망쳐야 해.’

나는 무력으로는 누군가를 이길 재주가 없었다. 총을 쏜다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릴 필요가 있었다.

제일 처음 내가 향한 곳은 마탑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마탑의 정문은 굳게 문이 닫아 걸려 있었다.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렸다.

다행히 마탑 주변은 사람이 많았고, 나는 사람들 사이를 피해 이리저리 달렸다.

뒤를 흘끗 돌아봤을 때는 랑비엘 멕레이가 꽤 작게 보였다.

하지만 아주 여유 있는 태도로 내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전력으로 달려오는 몬스터보다 무서웠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왜 하필, 원피스 따위를 입어서는.

나는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최선을 다해 달렸다.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마차를 타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차에 도착했을 때 마부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말들도 크리쳐들의 소리를 들은 탓인지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다른 마차의 말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렇게 말들이 무서워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바람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거야?’

난 입술을 깨물며 랑비엘의 눈에 잘 띄지 않을 골목 쪽으로 숨어들었다.

‘이쪽이 경찰청 방향이던가?’

단화를 신은 발로 골목을 달리는 소리가 유독 시끄럽게 울리는 것처럼 들려서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면서 최대한 걸음을 재촉하는데, 골목의 반대편 끝에 흐린 인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누구지?’

도움을 청하려고 입을 벙긋거리는데, 저 멀리에 서 있는 인영의 입이 이상할 정도로 길게 찢어져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랑비엘? 랑비엘이라고?’

그렇게 느릿하게 걸어왔는데, 어떻게 나를 앞질러 와 있을 수 있단 말이야?

‘왜, 나보다 더 빠른 거야? 빠른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아니잖아.’

실체가 없는 상대에게 그런 의문을 품는 게 잘못됐을까?

나는 허겁지겁 몸을 돌려 다시 반대쪽으로 뛰었다.

그러는 사이에 권총까지 꺼내 손에 들었다.

이미 인간처럼은 보이지 않는 랑비엘에게 총을 쏘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탕!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며 양손으로 단박에 그를 겨눴다.

‘흔들리지 않도록, 너무 꽉 쥐지 않고. 방향을 잘 조준해서.’

총알은 몸통의 정중앙에 가서 박히는 것처럼 보였다.

‘해냈나……?’

나 스스로도 의문인 질문을 뇌까리기가 무섭게, 랑비엘의 몸이 내 쪽으로 흔들거리며 다가왔다. 걷는 것처럼도 보였고, 미끄러져 다가오는 것처럼도 보였다.

중요한 건, 그에겐 간지러운 정도의 타격밖에 없다는 거다.

난 다시 한번 총을 조준할 생각 같은 건 재빨리 버리고 몸을 반대로 돌려 뛰었다.

‘……납치범과 같은 놈이야. 틀림없어. 총을 맞고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미친 존재가 또 있지 않는 이상.’

그러면 뛰어다니면서 총을 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내 솜씨로는 상대가 가만히 서 있을 때나 제대로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다. 상대가 저렇게 나보다도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을 때 과연 맞출 수 있을까?

‘게다가 저번에 왕궁에서 한 번에 이마를 맞췄던 사건도 그가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였어. 이번에는 그렇게 손쉽겐 안 될 걸.’

랑비엘이 눈에 들어오는 다음 순간, 내가 바로 도망치지 않으면 그에게 잡힐 듯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으니까.

정확히 미간을 조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놈을 상대로 이런 식의 전투는 무리다.

나는 치맛자락을 한 손에 모아 쥐고 최선을 다해 달렸다.

헉, 헉.

이 골목 저 골목 사이를 뛰어다니는 사이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이 게임에 들어온 이후로 딱 한 번 제대로 신경 써 본 적 있는 스테미너 수치를 다시 한번 의식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다급한 상황 같은 건 내도록 없었으니까. 스테미너 바가 화면 가장 아래에 있긴 해도, 어떻게 그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포인트가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장식처럼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급한 상황이 되니까, 금방금방 닳아 버리는 스테미너 바가 속절없이 야속했다.

‘……여긴 어디지?’

급하게 뛰어 들어오느라 어딘 줄도 몰랐는데, 인형극장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 눈알이 커다란 목각인형들이 높은 곳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보자니 섬뜩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넓은 무대, 텅 빈 관객석도 어둡고 아무도 없으니 그렇게 오싹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숨을 곳을 찾는데, 천막 바깥에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바깥의 빛이 훨씬 밝아서인지,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거대하게 비쳐 보였다.

몸의 어느 부분이 그렇게 보이는 건지는 몰라도, 그림자는 마치 거대한 거미의 모양처럼만 보였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천막을 벗어나 다시 달려갔다.

스테미너가 다 닳기 전에 잠깐 느리게 걷다가 다시 달리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나는 이렇게 먹잇감처럼 쫓긴 일이 지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둑어둑한 하늘, 축축한 공기, 가스등의 불빛조차 제대로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골목.

머리칼이 쭈뼛 섰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짚은 벽은 오래도록 그늘이 져 있었던지 얼어붙을 듯이 차가웠다.

‘……쫓긴 것만 처음인 게 아니라, 여기도 와 본 적이 있어.’

게임에 들어온 직후, DAY 1에.

레이커스와 만났던 순간이 떠올라서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골목을 둘러보다가 이상한 생각을 떠올렸다.

‘……잠깐만.’

지금까지 기정사실로 믿어 왔던 사실 중 하나가, 완전히 잘못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