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05화 (105/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5화

우리는 돌아오며 고급 상점가를 지키는 경관을 만났다.

경관에게 안톤의 상태를 알리고 급히 보호를 요청한 뒤에야 우리는 마차에 올랐다.

“그다음은요?”

“랑비엘 맥레이를 만났으면 해요. 친하신 것 같던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레이커스는 딱 부러지게 말하며 마부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맥레이의 저택이 아니라 어느 살롱 이름을 대는 걸 보니 랑비엘이 흔히 출입하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사이에 카넬레가 담긴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자리 옆쪽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 상자에는 카넬레를 팔던 가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분명, 증거를 수집하러 나온 거다.

즐거운 데이트 따위를 하러 온 게 아니라.

‘하지만 맛있었어. 즐겁기도 했고…… 정말, 짧디짧은 데이트…… 아니, 디저트 탐방이었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폭탄처럼 쏟아져 들어온 정보들을 다 소화하는 게 버거웠다.

물론 내가 먼저 레이커스에 대해 캐낸 건 맞지만, 작은 고구마 줄기 하나를 잡아당겼는데 주먹만 한 고구마 한 무더기가 딸려 올라온 판이다.

‘레이커스가 드래곤의 피를 이었다는 것, 그리고 안톤이 레이커스를 무엇 때문인지 의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덜컹, 덜컹.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흔들리며 나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소리를 배경음 삼아 눈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피가 섞였다는 설명을 듣고 그리 놀라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역시 레이커스의 지독한 미모 때문이겠지.

어쩜 저렇게 이마가 완벽하게 동그랗고, 눈썹 아래 뼈가 보기 좋게 자리 잡았는지. 나를 보면 부드럽게 휘곤 하는 그 눈꼬리가 어찌나 새초롬하고, 금빛의 속눈썹도 길고 섬세한지.

같은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아름다움이니까.

그의 잿빛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젠 시선을 함부로 돌리거나 피하지도 못하겠다.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있는 것에는, 그 눈 속에 담겨 있는 나를 보는 것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마치 커피라도 대여섯 잔 한꺼번에 들이켠 것처럼 속이 뒤집히게 울렁거리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다시 겪고 싶은, 그런 중독성이.

깜박, 깜박.

그의 눈꺼풀이 눈을 덮어 가렸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 있다가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레이커스.”

“네.”

그를 바라보는 나를 마주 관찰하던 레이커스가 바로 대답했다.

나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이젠 궁금한 것들을 미루지 않고 한꺼번에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 안톤의 집에서 신전 이야기를 꺼냈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기억을 지워 버리기 위해 신전을 가나요?”

레이커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흐리게 웃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내게 뭔가를 감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말을 모호하게 돌리거나,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둘러댔을 텐데 그는 침착하게 내 눈을 살피고 천천히 설명했다.

“처음에는 저도 몰랐습니다. 생각보다 기억에 대한 건 관찰하기 쉬운 부분이 아니니까요.”

“……그래서요?”

“……보셨다시피, 제 주변에 좋은 일들만 있는 게 아니라서요. 간혹 제가 놓친 목격자도 생기곤 합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일도 없더군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신전에 다녀오면……?”

“네. 축일이 자주 있다 보니, 다들 의무적으로라도 축복을 받으러 참석합니다. 빠지면 안 된다고들 생각하니까요.”

나는 그동안 느꼈던 위화감 중 하나의 원인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다고는 생각했어요…… 살인, 납치가 판을 치는 파크의 사람들인데.”

“어떤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지?”

“네. 계속해서 모두가 이 파크가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하려는 의지가.”

그건 마치…….

‘……게임 시스템의 NPC들이 평상시대로 행동하게 하려는 것처럼 들린다면, 내 착각이 너무 심한 걸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최근 들어 게임이라는 생각 자체를 계속 잊어버리곤 했지만, 내가 시스템 창까지 있는 게임 속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게임 시스템 자체가 뭔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이라는 존재 자체도, 그리고 신전이라는 것도…….

나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신전을 가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 혼자 신을 섬기고 싶을 때 옥상에 있는 자신만의 공간에 간다고도 했다.

‘만약 신이 망각만을 담당한다면, 레이커스에겐 정말로 신이 필요 없긴 할 거야. 그는 기억하는 존재니까.’

“……그러면 레이커스가 모든 걸 다 기억하는 것도, 레이커스의 피와 상관이 있나요?”

그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마, 그럴 거라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샤인이나 루나도, 제가 알길 바라지 않는 뭔가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다면, 저택의 사용인들도…….”

“사용인들의 기억은 신전이 아니라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제겐 소중한 이들이니, 미쳐 버리면 곤란합니다.”

그럼 지하에 누가 갇혔건, 리어먼드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게 당연한 거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블리에 씨까지 의심할 뻔했던 순간이 떠올라서.

내 소중한 세이브 NPC의 결백함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난 마지막으로 하나의 질문을 더 했다.

“좋아요. 그 피인지 뭔지 때문에 당신이 가끔 정신이 나간다는 건 이해했어요. 그 외의 경우에는,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되나요?”

“마치…… 제가 의심스럽다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레이커스는 내가 그를 의심할 때마다, 그게 마치 재밌다는 듯 웃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매혹적인 그의 웃음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당신이 범인이라고 줄곧 생각해 왔노라는 말도, 당신이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인 줄 알고 게임의 최종장을 시작했었다는 말도.

하지만 그런 직접적인 말은 할 수 없었다.

대신에 다른 말을 했다.

“……믿고 싶으니까. 믿고 싶으니까요.”

내가 그 말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이커스가 나를 향해 덤비던 순간도, 레이커스의 이름이 적혀 있던 사건 파일도, 레이커스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안톤의 시선도 모두 뒤로해야 하는 거니까.

내가 힘겹게 뱉은 말에, 레이커스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래도 괜찮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게 뭐예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절 믿어도 후회하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레이커스는 내 손을 천천히 잡았다. 그리고 아까, 그가 이지를 잃었던 순간 내게 했던 것처럼 내 손등에 키스했다.

아까는 당혹스러운 게 더 컸는데, 지금은 간지럽고 낯뜨거운 것이 더 컸다.

손등에서 시작해 팔을 따라 번지는 간지러움을 어찌할 바 몰라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 레이커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예전이라면 몰랐을 텐데, 그도 지금 이 순간에 조금쯤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손이라면 수백 번은 잡아 봤을 것처럼 보이는 그인데.

‘레이커스도 쑥스러워하기는 하나 봐.’

덜컹.

“내리시죠.”

나는 그런 그의 생경한 표정을 보느라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마차가 멈췄음을 알았다.

레이커스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처음 식사를 함께했을 때부터 워낙 에티켓에는 철저했던 그라서, 그가 손을 잡아 주는 것 자체에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마차에서 내려서도 내 손에 제 손을 깍지 껴서 쥐는 것에는 심장이 팔딱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지?’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을 놓아야 할지, 그대로 둬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빨라지는 심장 고동을 느끼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치지 못하고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에서 내린 곳은 눈에 익은 곳이었다. 마탑 근처에 있는 대로의 한복판이었다.

‘어머, 리어먼드 공작님이다.’

‘아르비체 님도 함께 계셔.’

‘어쩜, 저렇게 대단하신 분들께서 함께실까?’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나 봐. 어쩜 저렇게 다정하실까?’

속닥거리는 목소리들이 나와 레이커스를 반겼다.

레이커스야 어딜 가나 주목받는 것에 익숙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난 가뜩이나 주목받는 게 어려웠는데, 레이커스와 손을 꼭 쥐고 있는 것 때문에 더 시선이 쏠리는 것 같아서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때였다.

레이커스의 손이 내 손을 갑자기 놓았다.

“국왕 전하가 주신 목걸이, 꼭 가지고 계십시오.”

그렇게 말한 그가 갑자기 길 건너편 골목 쪽으로 뛰다시피 해서 사라짐과 동시에 머리 위에서 커다란 울림소리가 들려왔다.

쐐애애애액-!

쐐애액-!

불길하리만큼 동시다발적인 소리에 나뿐만 아니라 길을 오가는 다른 행인들까지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바람 소리가 영 흉흉하네, 그래.’

‘어휴, 이 소리는 종종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거미다.

그것도 한두 마리의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고개를 들었다. 여긴 도심 한복판이다.

그나마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은 편인 고급 상점가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곳에 거미 떼를 풀어 놓았다간, 순식간에 파크 전체가 지옥도로 변할 거다.

“레, 레이커스…….”

그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 놓으면 그걸로 되는 걸까?

이렇게 반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때, 누군가 내 등을 두드렸다.

“이런 곳에서 다 뵙는군요.”

난 넋을 놓고 들고 있던 고개를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은발의 미남자가 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랑비엘 씨?”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 했습니다.”

“……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죠?”

그가 웃음기를 싹 거두며 내게 뭔가를 들어 보였다.

“이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난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놀라서 랑비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본 적이 없으면 모르지만, 안톤 리오의 집을 방금 다녀온 나는 이미 그것이 뭔지 알고 있었다.

‘이건 까마귀 그림이 그려진 협박장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