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4화
내가 갑자기 일어서자 레이커스가 날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평온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가끔, 그의 눈빛 안에서 이상한 평온을 발견하곤 한다. 지금의 그도 그랬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기에 버거워서 허둥지둥 서두르기만 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마치 이 모든 일을 여러 번 겪어 보기라도 했다는 듯 묘하게 느긋한 태도로 나를 보조해 주곤 한다.
카넬레나 홍차, 연회장에서의 춤 같은 사소한 즐거움을 누릴 여유를 보일 만큼.
그런 부드러운 잿빛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내 서두름이 조금쯤 부끄럽게 느껴지곤 한다.
난 느긋한 어른 앞에 선 어린아이라도 된 기분에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레이커스에게 말했다.
“안톤 리오가 집에 있어요.”
“네? 그게 누구…… 아, 안톤. 부티크 사장 말입니까?”
“네.”
“아까 직원은 어딜 갔다고 하던데 둘러댔던 모양이군요. 가 보죠.”
레이커스는 의외로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따라나서려다가 테이블 위에 잔뜩 남아 있는 디저트들이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맛있기도 했고, 모처럼 레이커스가 나를 배려해서 데려와 준 가게였으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나와 레이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가온 직원에게 난 작게 웃으며 부탁했다.
“이것들 좀 포장해서 마차에 가져다주시겠어요?”
“어머, 그럼요.”
별것 아닌 말이었는데도 레이커스는 그게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차 한 잔도 다 마시질 못하고 다시 일어난 그의 아름다운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매달리는 게 조금 귀여웠다.
우리는 살롱을 나서자마자 의상실로 다시 쳐들어갔다.
직원은 갑자기 돌아온 우리를 당황한 얼굴로 맞았다. 게다가 내가 3층에 올라가야겠다고 주장하자 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하지만 내게는 히든카드가 있었다. 누구에 비할 바 없이 대단한 지위를 가진 데다 평판도 좋고, 무엇보다 얼굴과 몸매가 아주 뛰어난 키메라 씨가.
레이커스가 정중하게 잠깐만 둘러보겠다고 하는 말을 감히 일개 직원이 막아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직원이 물러서자마자, 나는 앞장서서 3층으로 올라갔다.
똑똑똑.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나는 몇 차례 더 문을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안톤 씨, 저 아르비체예요. 계세요? 리어먼드 공작님과 함께 왔어요.”
내 목소리에도 반응은 없었다.
묘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내가 저번에 봤던 그 안톤 리오였다면 나와 레이커스가 왔다는데 집에 있으면서 우리를 피했을 리가 없어.’
내게 드레스를 가져다주면서, 안톤이 레이커스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찬탄했던 것을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커스가 아니었으면 그의 부인이 어떻게 될 뻔했다며 생명의 은인이라는 듯 찬양했었다.
게다가 그의 드레스가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많은 사건이 있긴 했지만, 그 드레스를 입고 있는 동안 나는 정말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왕궁 연회에서 모두의 앞에 나서 보고, 춤도 처음 춰 보고, 고저택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내겐 정말 너무 특별한 순간들이었다.
‘내가 그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든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고객님이 다시 찾아왔을 때 만나고 싶을 거야. 사람들이 드레스를 보고 뭐라고 평가했는지를 듣고 싶어서라도. 아주 뿌듯하고 자랑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안 나오겠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잠깐 고민하는 얼굴로 멈춰 서자, 레이커스가 내 얼굴을 바라보고 문에 귀를 댔다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안톤 씨, 레이커스입니다. 지금 안에 계신 것 다 압니다. 잠깐만 이야기하시죠. 바로 안 나오시면 문을 부술 수도 있습니다.”
‘뭔가를 들은 걸까?’
내 생각보다 훨씬 강경한 말이었다.
놀라서 옆을 돌아보는데, 한참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던 안쪽에서 느리게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도 한참 조용하더니 느릿하게 문이 한 뼘만큼 열렸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지…….”
열린 문틈으로 안톤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그늘은 턱까지 내려와 있었고, 머리는 기름져서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게 멋들어지게 길렀던 수염도 엉망으로 자라 있었다.
안톤의 뒤로 참혹한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술병이 흐트러져 있었고, 시가라도 줄줄이 피웠는지 매캐한 냄새가 열린 방문 틈으로 흘러나왔다. 게다가 두꺼운 커튼을 쳤는지 낮인데도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다시 문을 닫고 싶어 하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그렇게 밝은 분이었는데.’
드레스를 배달하러 온 안톤이 얼마나 눈을 반짝반짝 빛냈던지를 떠올린 나는 당황스러워서 눈썹을 구겼다.
난 한숨을 쉬며 술병들을 가리켰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술을 드신 거예요? 손님들도 안 받으시고…….”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안톤의 흐리멍덩한 눈에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떠올랐다. 내 질문에 뭔가가 떠오른 듯 눈을 순간적으로 책상 쪽으로 굴렸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드레스, 감사히 잘 입었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왔어요.”
“아아, 활약상 이야기는 정말 잘 들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요.”
“그런데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네? 아니요.”
안톤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힘들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협박장 때문일까?’
막 협박장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내 바로 뒤에 레이커스가 서 있다는 것이 문득 의식되었다.
‘레이커스도 안톤이 협박장을 받은 걸 알고 있는데도, 그가 있으니까 협박장 얘기를 꺼내기가 꺼려지는 게 웃기네. 역시 레이커스가 범인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떨치진 못했나 봐.’
난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안톤 씨…… 까마귀가 그려진 협박장을 받으셨어요?”
안톤의 얼굴은 초조함과 당황으로 구겨졌다. 그는 내게서 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쳐다보더니 문을 당겼다.
“잠깐만요!”
눈앞에서 문이 닫히려는 순간, 레이커스가 문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다 다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쥐는데, 레이커스는 수월하게 문을 한 손으로 비집고 열더니만 안톤의 몸을 밀며 그 방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고, 공작님……!”
안톤이 당황한 투로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레이커스는 엉망이 된 방 안에서도 퍽 반짝이는 외모를 자랑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방바닥에 나뒹구는 커다란 술병들 사이에서 작고 붉은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은 그는 뭔가를 확신한 듯 얼굴을 굳히고 안톤을 바라보았다.
“……공작님.”
“죽기라도 할 생각이었나?”
‘……죽는다고? 그 협박장은 살해 위협이 담겨 있는 거잖아. 그런데 죽임당하는 게 두려워서 먼저 죽는 게 말이나 돼?’
혼란스러운 마음에 안톤을 바라보는데, 그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우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왜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저 같은 건…….”
레이커스는 안톤이 어둡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곤 뭔가 생각하는 눈치로 눈을 굴리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최근에 신전을 간 게 언제지?”
안톤은 갑자기 그런 질문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술에 취해 붉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그건 왜…… 그, 글쎄요.”
“축일이잖는가. 한 달에 두 번씩은 있는, 그 흔해 빠진 축일. 축일에는 보통 의무적으로 신전에 가질 않는가?”
“……최근에 아르비체 님의 드레스 때문에 워낙 바빠서 못 갔습니다요. 완벽한 드레스를 하나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닙지요…….”
술에 취해 흐리멍덩한 눈 사이로, 순간 반짝이는 그의 열정이 엿보였다.
레이커스는 안톤의 대답에 뭔가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장에 대해서 내가 몇 번 더 다그쳐 물었지만, 안톤은 인사불성이라 제대로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몸을 흐느적대며 소파에 기대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이 계속 같은 책상을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레이커스에게 안톤을 침대에 좀 눕혀 달라고 부탁한 뒤, 난 잽싸게 책상으로 다가가 그 안을 뒤졌다.
‘……있다!’
[편지 : 안톤 리오에게 온 협박장]
상태창으로 협박장이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내용까지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난 그것을 후다닥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시치미를 뚝 떼고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레이커스는 안톤을 들어다 수월하게 침대에 뉘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아요.”
“술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잠든 걸 보니 잠깐은 괜찮을 것 같아요. 일단 내려가서 사람을 보내죠.”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막 문을 닫으려는 순간, 술에 취해서 사리 분별도 제대로 못 하던 안톤이 슬쩍 떠나는 나와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똑바로 레이커스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존경을 늘어놓던 그답지 않게, 그 시선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탁.
문이 닫히고 일 층으로 걸어 내려오는 동안, 나는 마음이 복잡해 죽을 지경이었다.
모처럼 그렇게 궁금했던 협박장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도, 안톤 리오의 목숨을 어떻게 운 좋게 구했다는 충족감도 없었다.
의문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와중에, 레이커스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 아르비체가 여길 오자고 하지 않았으면 이 자는 죽은 목숨이었겠습니다.”
“그야, 그랬을지도 모르죠.”
“아르비체, 당신은…… 가끔 저보다 파크를 훨씬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레이커스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잿빛 눈동자는, 마치 나를 떠받드는 것처럼도 보였고 나를 의심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는 유리구슬 같은 눈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그가 내게 방긋 웃어 보였다.
참으로 맑아 보이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안톤이 레이커스를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렸다.
‘그 시선은…… 연기가 아니었어.’
나는 침을 삼켰다.
아주 짧은 시간, 정말로 우연히 본 것이었지만…… 그의 눈빛에 스친 감정은 분명히 두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