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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103화 (103/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3화

나는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라고 재촉해 놓고, 정작 레이커스가 조심스레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소화하기 어려워 숨을 몰아쉬었다.

‘그 잘난 리어먼드가가 키메라의 혈족이라니.’

그 말을 들으니…… 국왕이 제 딸을 주기 싫어할 만도 하다.

나는 제 피에 대해 자조 섞인 말을 털어놓은 레이커스를 위로해야 할지, 아니면 그를 경계해야 할지 재빠르게 판단이 서지 않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실내에서 볼 때도 아름다운 레이커스의 얼굴은 야외의 선선한 공기 속에서 보자 더 빛이 나 보였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잎과 아름다운 거리 속에 있는 그는, 어딘가 생기 있어 보여서 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레이커스는 제 나름대로 혼자 속에 담고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아서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다. 썩 개운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 섞여 있는 일말의 불안감을 나는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언제부터일까? 레이커스의 표정을 읽기가 아주 쉬워진 게.

‘이상할 정도로 알기 쉬워졌단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잘 알게 된 시점부터, 이따금 그의 감정을 헤아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그가 무섭지 않게 느껴지는 건 아닌데, 그를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의 다양한 표정을 더 보고 싶고…….

‘이게 지금 상황에서 할 생각이야?’

혼자 내 생각에 깜짝 놀라 입속 살을 작게 씹는데, 레이커스가 내 침묵을 뭐라 해석했는지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만약에, 군중 속의 한 명이 되는 게 더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래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이해합니다.”

“네?”

레이커스가 내 표정을 살피듯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 떠난다면 너무 위험하니까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만…… 떠나고 싶어 하신다면 이해는 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떠나게 해 주겠다곤 말 안 하잖아. 진짜 웃겨.’

마치 배려해 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말을 듣고 나자 마음속 긴장을 놓고 작게 웃어 버렸다.

그의 눈동자 속에 섞여 있는 불안감의 정체가 이것이었을까?

언제 돌변해서 공격할지도 모를 키메라와 한집에서 살아가는 게 불안해서, 내가 떠나 버릴까 봐?

‘……하지만 생각해 봐.’

레이커스에겐 이곳이 그냥 삶의 터전이겠지만, 내게 이곳은 처음부터 공포 게임 속이었다.

매일같이 날씨가 음울하고, 까마귀가 날고, 밤에는 박쥐마저 보이고, 핼러윈이라고 고저택에 전시된 물건들은 간 떨어질 정도로 무섭고…… 그냥 그런 것들이 당연한 거다.

오히려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볼 때 더 당황한다. 왕궁 연회가 시작될 당시에, 그 평화로운 분위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레이커스가 키메라의 후손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애초에, 여긴 이상하고 무서운 것으로 가득한 공간이잖아. 연쇄살인마만 아니면, 다 괜찮지.’

물론, 무섭고 경계된다.

나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던 그 새까만 눈동자는, 지독하리만큼 검었다. 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레이커스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무섭더라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아.’

생각에 잠겨 있느라 내 발걸음이 어느새 느려졌던 모양이었다. 내 걸음에 보조를 맞춰 주고 있는 그의 느긋한 발걸음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레이커스의 얼굴 뒤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조차 못하니까. 그러니까, 괜찮은 거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아니잖아. 레이커스는 제 사랑하던 형을 죽여야 했던 과거까지 짊어지고 살아 있는 거잖아.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거미를 딱 한 번 죽인 적이 있는 나도, 그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가끔 힘들고 자꾸 생각나는데…… 레이커스는 오죽할까?

내가 거미에게 직접 위협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레이커스가 망설임 없이 거미를 죽이던 모습이 잔인하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고 가엾게 느껴졌다. 그가 얼마나 많은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면…….

‘……어딘가 불쌍하지 않아?’

연민은, 누군가의 사연을 호감으로 바꿔 놓기에 아주 좋은 감정이다.

게다가 그와 더 깊은 비밀을 공유할수록, 비밀을 공유하는 다른 사이가 그러하듯이 우리도 쓸데없이 더 깊어질까 봐 걱정이었다.

나는 그 연민을 떨치려 애쓰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키메라 씨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카넬레가 맛있다면서요.”

“네?”

“이렇게 천천히 걷다간, 살롱까지 들를 시간도 없겠어요.”

레이커스는 ‘당신의 걸음에 맞춰 준 거잖습니까?’라고 항변하는 대신, 어딘가 안심이 섞인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고급 부티크를 먼저 들렀다.

가게에는 만난 적 있는 점원만이 앉아서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은 안 계세요?”

“사장님께선 자리를 비우신 지 오래셔서요.”

점원에게 안톤 리오가 협박장을 받은 것에 관해 물어볼 수도 없어서, 우리는 그가 오면 연락을 달라는 말만 남기고 아쉽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레이커스가 가자고 한 살롱으로 곧장 향했다.

상점가의 구석에 있는 꽤 큼직한 살롱은 간판과 벽에 나무 덩굴로 장식이 되어 있어 꽤 아름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게임을 하면서 와 본 곳이야.’

플레이어일 때는 가게에 들어가서 아이템을 모두 주워 담고 나오거나, 상호작용할 수 있는 NPC에게서 단서를 얻는 게 다였다.

그런데 그런 가게에 뭔가를 먹으러 오다니 어딘가 신기한 기분이었다.

안쪽으로 들어서는데, 점원들이 재빨리 달려 나오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 명은 나와 레이커스를 응대하며 자리를 안내해 주었고, 나머지 점원들은 ‘사장님!’을 외치며 후다닥 카운터 뒤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르비체 님이 오셨다고?!”

이 살롱의 사장님으로 보이는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는 무척 영광이라는 듯 얼굴을 붉히더니 종이와 펜을 가지고 오게 지시했다.

“정말, 이렇게 뵙게 되어 너무 기뻐요…… 이렇게 대단하신 분께서 가게에 들러 주시다니.”

“네? 아뇨, 뭘요.”

“아닙니다. 저희 가게에 공주님께서 자주 방문해 주시는 덕분에 공주님께 직접 들었답니다. 그 대단한 일화를 말입니다.”

점원이 바삐 뛰어와 내 앞에 종이를 내려놓자, 사장님은 살살 눈을 접어 가며 웃더니 펜을 슬쩍 내 쪽으로 내밀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 하나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유명 연예인들이 가게에 방문하면 사인을 받아 붙이는 건 자주 봤지만, 공작가의 가정교사에 불과한 내 사인을 살롱 사장님이 받아 가는 건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내 앞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리어먼드 공작님이 뻔히 있는데도 내게만 사인해 달라고 하는 것도 당황스럽고.

‘사인 같은 거 없는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해 줄 수도 없어서, 아르비체 그린이라는 이름을 최대한 예쁘게 적어 주자 사장님은 입이 귀에 걸려서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무례한 부탁이었을 텐데, 이거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니에요. 그보다 주문을…….”

“아차, 그렇네요. 모처럼 데이트를 나오셨는데, 이거 제가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뭐든 주문만 해 주십시오.”

‘주문…….’

난 흘끗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파크 살롱 카넬레……5코인

코코넛 카넬레…… 6코인

얼그레이 카넬레…… 6코인

……]

당연히 레이커스가 가자고 했으니 그가 염치없이 내게 내라고 하지야 않을 거다. 그래서 주머니 사정은 걱정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센 가격에 난 깜짝 놀랐다.

‘괜찮은 식사도 1~2코인인데…….’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먹겠습니다.”

“어휴, 그럼요.”

레이커스가 내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메뉴를 골랐고, 언제나 내 취향을 꼭 맞추는 레이커스라서 난 굳이 잘 모르는 홍차 리스트를 보고 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사장님이 돌아가고 나자, 나는 레이커스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덕분에 얻어먹는 거예요.”

“그것참 영광이군요.”

레이커스가 부드럽게 응수했고, 나는 그의 여유 있는 미소를 보다가 문득 내가 아니라도 그가 굳이 돈을 내고 다닐까 싶은 의문이 뒤늦게 들었다.

레이커스의 집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차 삯을 받지 않았던 마부 아주머니도 떠올랐고.

난 어딘가 머쓱해져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몰랐지만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이 우리 쪽을 흘끗거리며 자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시선이 주로 내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도.

‘……왕궁 이벤트 영향이 좀 크긴 했나 봐.’

아직 해결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목만 잔뜩 사고 있는 이 상황이 갈수록 더 악화일로로 치닫는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는데, 점원들이 재빨리 카트를 밀고 왔다.

은 접시 네 개를 세로로 이어붙인 큰 디저트 접시 위에 작은 디저트들이 빼곡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것 중 절반 이상이 다양한 색과 장식의 카넬레였다.

세로로 길게 홈이 나 있는 반 뼘만 한 작은 빵을 하나 집어 들어 물자 바삭하고 쫀득한 식감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레이커스가 카넬레가 맛있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를 만한데?’

레이커스는 내가 카넬레를 맛보는 동안 스트레이너를 컵 위에 올려 차를 따라 주었다.

나는 카넬레를 세 개나 먹고 레이커스가 추천해 준 홍차까지 기분 좋게 마셨다. 저번에 내게 추천해 준 밀크티가 아니라 딸기향이 가득 풍기는 쌉싸름한 맛의 홍차였지만, 디저트와 함께 먹기에는 오히려 음료가 달콤하지 않은 게 딱 좋았다.

“잃어버린 식욕이 조금 돌아오신 것 같군요.”

난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그렇게 먹어치우는 동안 레이커스는 고작 홍차를 몇 입 마셨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머쓱하게 웃으며 등을 기댔다.

“오늘 일정이 바쁘니까, 미리 배를 채워 두는 거예요.”

“더 드셔도 괜찮습니다.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요. 좋은 곳을 소개한 것 같아 보람도 있고요.”

난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줄곧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을까 싶은 흐뭇한 시선에 어쩐지 낯이 뜨거워져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앞쪽 창문으로 보이는 고급 부티크 건물 3층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사건 수첩에서 보았던 문구가 머릿속을 스쳤다.

‘……안톤 리오는 저 부티크 3층에서 산다고 했어.’

점원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안톤이 거짓말을 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를 만나 봐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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