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1화
레이커스에게서 배려를 받는 건 이상한 기분이다.
항상 일상적으로 나를 배려해 주는 그라서, 여느 때에는 아예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가도 어떨 때는 그게 너무 낯간지럽다.
마치 지금처럼.
‘가을 갈대가 마음속에 잔뜩 자라고 있는 기분이야.’
그래서 그의 이런 티 나는 친절에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희고 부드러운 억새들이 바람결에 나부끼는 것처럼, 속이 아주 간지러워진다.
난 크게 한숨을 쉬며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럴 때 레이커스의 얼굴을 쳐다보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으니까.
숲길을 벗어나자 곧장 서커스장과 인형극장이 보였고 DAY 1에 내가 그렇게 헤매고 다녔던 골목으로 접어드는 길이 나왔다.
그날 봤던 베리아 남작의 다 타 버린 건물도 보였다. 남작이 죽어 버린 탓인지, 아니면 사건 수사 때문인지 새까맣게 타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은 아직 복구되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스산해…….’
누군가의 죽음이 있었던 흔적은 참 뚜렷하게도 남아 있었다.
‘……이제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덜컹, 덜컹.
번화가 골목으로 접어들 때쯤,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바라보자 수십 명의 사람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게 보였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짐을 지고 가는 일꾼들.
모두의 얼굴에 존경의 기색이 서려 있었다. 지위 때문에 강제로 숙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과연, 공작님의 위상이 대단하시네요.”
내가 혀를 내두르자, 레이커스가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저를 향한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에게 뭐라 쏘아붙여 줄 생각을 하는데, 마차 가까이에 선 조그마한 남자애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 초록색 머리 누나가 공주님을 구해 준 영웅이세요?”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후다닥 달려와 아이의 고개를 조아리게 하며 흐뭇하게 웃어 보이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단다. 자자, 영웅께 경의를 표해야지.”
난 얼굴이 뜨거워져서 창밖으로 내밀다시피 하고 있던 고개를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구한 게 맞긴 하다.
그렇긴 한데…….
이렇게 직접 찬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마차 안의 붉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기대자, 레이커스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제, 오해가 좀 풀렸습니까?”
그는, 대단한 공작 나리인 저보다 고작 가정교사인 내가 더 주목을 받는 것에 마음이 상하긴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너무 기분 좋게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라서 당혹스러울 정도였으니까.
난 창밖도, 레이커스도 보지 못해서 그저 눈앞의 빈 의자를 멍하니 쏘아보며 마차가 어디든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덜컹, 덜컹.
조금 기다리자 인파 때문에 잠깐 느려졌던 마차가 다시 제 속도를 되찾았고, 그리 오래지 않아 고급 부티크가 있던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레이커스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제가 어떻게든 이번 삶을 사수하고 싶은 입장이라면, 놈은 어떻게든 이번 삶을 다 망쳐 버리고 싶은 모양입니다.”
“네?”
레이커스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해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자, 레이커스가 아찔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처연하다고 할지, 뭔가를 포기했다고 할지.
또렷한 그의 잿빛 눈이 나를 그대로 담았다. 어리둥절한 녹색 눈을 한 여인이, 그의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 속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모르겠다.
막 그에게 되물으려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쿵!
히히히힝!
도심에서 들린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굉음이 갑자기 울리고, 말들이 놀라 내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쐐애애액- 쐐애애애애액-!
난 이 소리를 알고 있었다.
이건 ‘파크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바람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이건 크리쳐의 소리잖아.’
내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고개를 돌리자, 레이커스는 이미 그 소리를 기민하게 들었던지 낯이 변해서 몸을 곧추세우고 밖을 살피고 있었다.
“워, 워!”
마부가 말을 진정시키려 애를 쓴 덕분에 마차가 완전히 멈췄다.
내가 어쩔 줄 몰라 양팔을 감싸 안는데, 레이커스는 오히려 느긋하고 어쩌면 우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으로 내게 천천히 말했다.
“계속 궁금하다고 했죠?”
“……레이커스, 지금 이거……”
“아르비체, 당신의 눈으로 직접 보시죠. 왜 국왕이 나를 싫어하는지. 왜, 우리 형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았던 제 부인을 죽였는지. 그대가 왜…….”
레이커스는 오른손을 들어 제 왼손을 한번 훑었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보였다. 그의 왼팔에서 무슨…… 딱딱한 껍질 같은 게 돋아난다 싶더니, 어느 순간 레이커스의 오른손에 단단하고 긴 검은색 검이 들려 있었다.
“그대가 왜, 나를 경계할 필요가 있는지.”
레이커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내게 마차에서 내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그대로 훌쩍 사라졌다.
‘눈으로 쫓기 힘든 움직임이라고 해도 실루엣은 보여야 하는 것 아냐?’
고개를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나는, 레이커스가 내가 타고 있는 마차 위로 올라섰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냥, 부가 기능이 괜찮은 검이나 옷을 입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인간의 움직임일까, 저게?’
그냥 게임이니까, 뭐든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대단한 주연 캐릭터니까, 능력치가 좋은 건 당연하다고만 생각하고.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면, 인간의 근력으로 할 수 있는 동작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크리쳐는 피를 흘리지 않았고, 납치범은 실체조차 없었는걸. 그가 인간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더 뺐다.
쿵쿵거리는 굉음은 자꾸만 들리는데 거미 크리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긴 너무 도심이야. 피해자가 많이 나올지도 몰라.’
피해자가 나온다면, 그들 또한 거미 크리쳐가 될 것이다.
연쇄적으로 크리쳐가 늘어나는 방식이 꼭 좀비 바이러스 같았다.
‘공포 게임 중 좀비가 등장하는 류도 많긴 하지. 하지만 그런 종류 게임은 현대 배경에다 이런 구닥다리 마차 대신 꽤 괜찮은 차라도 주잖아!’
억울함을 호소할 상대도 없이 혼자 답답해하며 아이템 창을 켜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밖의 풍경이 일변했다.
쿵, 쿵!
쐐애애애액!
아까부터 들리던 그 기괴한 쿵쿵거리는 소리는 머리 위에서 나는 것인 모양이었다. 거대한 다리를 가진 거미 크리쳐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어진 건지 알고 싶지도 않은 기다란 실을 뿜어 대며 훌쩍 뛰어 바닥으로 내려섰다.
고급 상점가 바닥에 곱게 깔린 타일이 엉망으로 조각이 나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재빨리 반대쪽 창문도 돌아보았다.
‘……너무 많아.’
우리 마차를 둘러싸고 거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내 손바닥보다 더 큰 큼지막한 여덟 개의 눈이 번뜩이고, 희고 끈적한 침이 줄줄 흘러내리는 거대한 거미 크리쳐의 모습은 언제 봐도 섬뜩했다.
털이 부숭부숭한 다리가 너무 많아서 수를 재빨리 헤아릴 수가 없었지만 다섯…… 아니, 열 마리는 되어 보였다.
한 마리를 상대하는 데에도 그렇게 진력이 빠졌는데, 열 마리라니.
게다가 마차 안이라서, 나는 상당히 시야가 제한된 상태였다.
‘……더 많을지도 몰라.’
온몸에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손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레이커스가 내게 마차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더라도, 굳이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이 마차가 제대로 엄폐물 기능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지만.
난 입술을 꽉 깨물고 리볼버를 잡아채 양손으로 꽉 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도, 난 분명히 저것들을 겨냥해서 죽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크리쳐들을 자극하는 게 정말 옳은 판단일까?’
쐐애애액- 쐐애애액-!
듣기 싫은 기괴한 소리를 내는 거미들은 번들거리는 눈알을 되록되록 굴려 대며 다음 희생자를 탐색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히이이익!”
‘……사람의 목소리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부티크에서 방금 막 나온 듯한 슈트 차림의 남자 두 명이 거미들을 발견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돼!’
저 거미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재빠른지, 난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시선을 끄는 순간, 저 거미들의 먹잇감이 될 거다. 그리고 또 다른 거미가 되겠지.
그 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부티크 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내미는 것과 동시에 거미들이 일제히 도약했다.
황급히 리볼버를 겨누며 창밖으로 상체를 빼는 순간이었다.
‘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전혀 못 봤어.’
감청색의 슈트가 거미 크리쳐의 거대한 머리통을 밟고 도약하는 모습을 몇 번 포착한 게 전부였다. 검은 선이 허공을 갈랐고, 크리쳐의 몸뚱이들이 허무하리만큼 손쉽게 조각났다.
너무 깔끔한 동선이라, 그의 검은 잔인해 보이지도 않았다.
수십 번, 수백 번은 더 크리쳐를 사냥해 오기라도 한 것처럼 능수능란했다.
크리쳐의 입이 인간들에게 가 닿기도 전에 열 구도 넘는 크리쳐의 시체가 순식간에 조각난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난 목표를 잃은 리볼버를 겨눈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가 있지?’
레이커스에 대한 경계심이 마음속에 슬금슬금 다시 피어올랐지만, 그의 강함이 든든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 상점가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을 테니까.
나는 안도의 한숨을 깊이 쉬다가, 문득 저 멀리에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레이커스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그의 눈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방금까지도 내 모습을 담고 있었던 부드러운 잿빛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색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