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100화
잠옷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는 동안, 어젯밤에 벗어 걸어놓은 새하얀 드레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제는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차림을 하고 있었더니, 무슨 신데렐라라도 되어서 꿈에서 반짝 깨어난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 꿈에서 깨어나자. 레이커스고 뭐고, 오늘은 사건에 관련된 것만 생각하는 거야.’
나는 가볍게 기합을 넣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샤인과 루나는 언제나처럼 식사 전부터 티격태격하고 있었고, 레이커스도 언제나처럼 한 폭의 명화 같은 미모를 뽐내며 신문을 쥐고 앉아 있었다.
‘어제의 옷에 특별히 매력 부가 수치가 높아서 잘생겨 보인 게 아닌가? 왜 아직도 저렇게 잘생긴 거지?’
내가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내 자리로 다가가자, 레이커스가 당연하다는 듯 일어나 내 의자를 잡아 주었다.
난 그 지극히 평범하고 반복되던 일과에도 몸이 바싹 굳었다.
그의 가슴팍 위에 손바닥을 댔던 그 별것 아닌 일이 자꾸만 떠올라서.
‘일상적인 대화에 일상적으로만 반응하자. 난 이 집에 가정교사라는 지위로 있으니까. 그냥 그렇게만 하면 돼.’
하지만 언제나 내가 말하기 전에 쉽사리 내 속내를 눈치채는 그였다.
오늘도 바싹 긴장한 내 기색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의자를 잡아 주고 난 그가, 제자리로 돌아가며 희미하게 웃었다.
난 그 웃음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잘 주무셨습니까?”
“잘 잤어요.”
“어제 춤까지 추고, 그 뒤로도 이런저런 사건까지 겹쳐서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좀 더 쉬실 줄 알았습니다.”
‘이런저런 사건’이라는 말을 하는 그의 눈이 나를 살피듯 움직였다.
그의 말을 무시한 채로 오렌지색 식탁보 위에 가득 날라져 오고 있는 호박 요리들에 집중하려 애쓰는데, 레이커스가 문득 대답을 재촉하듯 다시 말을 걸어왔다.
“피아노실에서 나눴던 이야기는…….”
난 스푼을 집어 들어 호박 수프를 크게 뜨다가, 나를 시험해 보는 듯한 그 말에 한숨이 나왔다.
‘레이커스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뭐가 그렇게 초조한 거야? 내가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며? 그럼 된 거 아냐? 뭐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 때마다 확인해야 직성이 풀려?’
난 레이커스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기억해요. 똑똑히 기억해요. 레이커스와 제가 단둘이 피아노 방에 있었던 것도, 그리고 레이커스가…….”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울분을 터뜨리듯 말했던 건데, 난 이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하녀들의 시선을 뒤늦게 눈치채고 뒷말을 급하게 다시 삼켰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덤덤하게 테이블 위의 화병을 한쪽으로 치우는 블리에 씨와는 달리, 오가며 접시를 나르던 하녀들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잘 익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열성적으로 말한다고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뒤로 기댄 나는 쏟아지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수프 접시에 코를 박았다.
‘……또 소문나겠네. 나겠어.’
“앰버, 로미, 디바. 손 안 움직일 건가요? 따라 나오세요. 식사하시는 데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블리에 씨가 나지막하게 모두를 타일러 밖으로 데려나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수프만 떠먹었다. 루나가 자꾸 ‘루나 진짜 마법 쓸 수 있나 봐’라고 중얼거리며 생글생글 웃어 댔기 때문에.
샤인과 루나가 식사를 다 하고 먼저 나가자,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다른 음식에도 손을 뻗었다.
조리법만 다르다뿐이지 전부 다 호박이라서, 먹을수록 점점 물려서 손이 느려지긴 했지만.
‘핼러윈 스킨이 예쁜 건 좋은데, 아무래도 현실이 되고 나면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 있긴 해.’
내가 호박찜을 깨작거리다 못해 결국 식사를 포기하고 포크를 내려놓자, 레이커스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잠깐, 외출 좀 하시죠.”
난 그가 또 말을 돌리는 것 같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이전에, 이야기 좀 해요.”
“네?”
난 방금 있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식당에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도 괜히 한 번을 더 둘러본 다음에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된다고 말해 주세요.”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레이커스의 잿빛 눈동자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내 말의 의중을 알아내려는 듯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날 달래듯 불렀다.
“……아르비체.”
“제 기억? 당신이 걱정하는 게 그거에요?”
레이커스는 대답하는 대신 묵묵하게 날 바라보았다.
침묵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나는 거의 그의 멱살이라도 쥘 기세로 쏘아붙였다.
“전, 열이 뻗쳐서 이런 식으로는 못 지내겠어요. 당신이 내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내가 기억을 지닌 채 앞으로 당신을 보지도,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겠다면요?”
“……아르비체.”
“그럼 똑바로 말해 줘요. 사람 그만 가지고 놀고. 당신이 형을 죽였다는 게 뭔지.”
어제처럼 말해 줄 수 없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와 의자를 빼 주며 속삭였다.
“나가시죠. 나가면서 이야기하죠.”
“레이커스!”
그가 내 의자를 빼다 말고 그대로 멈췄기에, 난 뭔가 싶어 그를 노려보려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커스는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봤던 나를 놀리는 웃음이 아닌, 보는 사람의 가슴까지 간질이는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제가 먼저 권했어야 했는데. 이름으로 먼저 불러 주시니 듣기 좋습니다.”
난 그제야 내 입을 손으로 가렸다.
‘……맨날 속으로만 부르던 이름인데 나도 모르게 입으로 튀어 나갔네.’
당황해서 의자를 내 손으로 밀고 일어나자, 바로 앞에 서 있던 레이커스와 너무 가까워졌다. 그는 뒤로 물러나지 않고 내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런 어정쩡한 상황을 또 잘난 얼굴과 어쭙잖은 스킨십으로 넘어가는 건 싫었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그 잘생긴 얼굴을 쏘아보자, 레이커스는 내 입 대신 이마에 제 입술을 살포시 대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가면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어차피 나가고 싶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왜요?”
“연쇄살인 사건, 관심이 아주 많으셨잖습니까. 제가 아니면 혼자라도 나가실 게 뻔하니, 같이 나가죠.”
레이커스는 이제 밖이 제법 쌀쌀하니 따뜻하게 입고 내려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내 이마를 짚은 채로 식당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연쇄살인 사건에 관심 많은 거, 완전히 티 났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너무 티 났나 봐.’
캐서 헌트가 살해당하는 날, 한밤중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꾸역꾸역 기어나갔을 때부터 어쩌면 빤히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사건 수첩이 업데이트된 건 어젯밤이야. 그렇다는 건, 경찰들도 어젯밤에 협박장이 여섯 명에게 도착한 사실을 알았단 거지. 경찰 반장이라는 사람은 참 빨리도 레이커스에게 알렸네.’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레이커스가, 집으로 먼저 돌아가서 협박장을 발송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하지만…….
난 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살짝 깨물었다.
이 와중에 이마가 자꾸 간지러워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입술 키스도 그렇지만…… 이마 키스는 진짜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속이 간지러운 거야……?’
난 방까지 가는 동안 하녀들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외출복으로 급하게 갈아입는 동안, 난 머릿속으로 오늘의 일정을 대충 짰다.
레이커스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 안전 때문에 그를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레이커스를 데리고 예상 피해자를 만나러 가는 일은 피하고 싶긴 하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고 믿을 만하다 싶으면 데려가야지, 어쩌겠어.’
알터 부부와 지나와도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지만, 그건 다녀와서 해도 괜찮다.
일단 둘은 예상 피해자는 아니니까.
사건 수첩을 훑으며 옷을 갈아입던 나는 일단 첫 목적지를 안톤 리오가 있는 고급 부티크로 정했다. 그리고 랑비엘 맥레이도 만나 보면 어느 정도 사례가 수집될 테니까…….
외출복으로 다 갈아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아르비체의 일기장에서 봤던 문구가 대번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군가, 내가 봤다는 사실만 모르게 해 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왜 하필 아르비체에게 빙의하게 되었는지는.
그보다 중요한 일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알고 싶어.’
아르비체로 살아가는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문제가 있다면 꼭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거울 속 아르비체의 눈동자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유행이 지난 붉은색 드레스 차림의 나를 한번 훑어보고 몸을 돌렸다.
레이커스와 나는 마차에 나란히 올랐다.
배웅을 나온 식솔들의 가장 앞에서 블리에 씨가 공손하게 인사를 해 보였고, 그녀에게 잔뜩 혼난 듯한 다른 메이드들이 레이커스와 나를 보고도 설레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마차에 올랐다.
덜컹, 덜컹.
말 네 필이 이끄는 세련된 마차가 출발했고, 은색의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와는 또 다른 감청색의 투 버튼 재킷 차림의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나를 마주 보자, 난 그 미형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게 아직도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런데 레이커스 님은 어딜 가실 생각으로 이렇게 같이 나오신 거죠?”
그가 이마 뼈 위로 참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눈썹을 으쓱 움직였다 내려놓았다.
“카넬레가 맛있는 집이 있습니다. 홍차도 나쁘지 않고요.”
“……네? 지금, 디저트 말인가요?”
“네. 공주님께서도 종종 들르시는 집이니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겠습니다만, 불편하시면 다른 곳으로 가도 가시죠. 아침도 제대로 안 드시지 않았습니까.”
난 기가 막혀서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한지, 그도 뻔히 잘 안다.
그리고 그도, 말처럼 여유만만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이젠 알겠다.
나뿐만 아니라 레이커스도 납치범을 잡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고, 이젠 나와 함께 증거를 찾으러 움직이고 싶다고 대놓고 말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렇게 나오는 건…….
‘내가 아침을 제대로 안 먹어서, 저러는 거야?’
난 그에게 쏟아 놓을 질문들을 잔뜩 담고 있다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만 허탈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