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8화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하지만 아주 깊은 숨이 세 번 폐부를 꽉 채웠다 돌아 나가는 동안에도, 마음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뭐라고 변명을 해 봐요.”
“……할 말은 따로 없습니다.”
레이커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다 정황 증거였잖아. 그리고 레이커스가 말한 것들이 진실이라는 것도 봤잖아.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지금?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서, 이러는 거예요?”
내가 울분에 차서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자, 레이커스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뒤로 한 발짝 더 물러났다.
“그때의 일은…… 사실만 놓고 보면 어떻게 보일지 압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레이커스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르비체,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 형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나는 그딴 게 무슨 상관이냐고 소리를 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든 레이커스의 머리통을 겨눌 수 있도록 손안에 꽉 틀어쥐고 있는 총도 앞으로 겨누지 못했다.
레이커스의 눈을 봤다.
그 잿빛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진한 슬픔을 봤다.
그는 소리 내 울지도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의 눈 속에서 비탄을 봤다.
뭐라 위로해 줄 용기조차 나지 않는 진하디진한 그리움과 아주 짙은 슬픔을 봤다.
‘……이건 반칙이잖아. 게임 캐릭터라면 무릇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분 지어 줘야 하는 거잖아. 이렇게…… 살인을 고백하면서 슬퍼하는 게 어딨어.’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를 당장 안고 달래 주고 싶은 마음과, 그의 미간에 총구를 겨누고 당장 경찰청으로 달려가라고 고함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나는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아이들이 기다려요.”
“……아르비체.”
“절, 그렇게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하던 대로 그린 양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르비체.”
“……내일, 내일 또 이야기해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옷도…… 옷도 다른 걸로 갈아입고 나와요. 아이들이 놀랄 테니까.”
레이커스는 그렇게 사람 이름이 닳도록 부른 주제에, 당장 내게 할 말은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줄줄이 해명을 늘어놓기라도 하면 속아 넘어가는 척이라도 할 텐데, 그는 변명 대신 우직하게 입을 다물고 옷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권총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숨과 함께 아이템창으로 돌려놓았다.
샤인과 루나, 그리고 나와 레이커스는 저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블리에 씨는 직접 관리하는 듯한 카메라를 가져와 우리의 사진을 네 장 찍어 주었다.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좋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였기 때문에 난 슬쩍 그 카메라의 부가 기능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블리에 씨의 눈을 피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레이커스는 무슨 사진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정말 사진만 찍고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샤인과 루나는 나와 함께 놀이방으로 돌아가 사진을 구경하기로 했다.
“마음에 들어요?”
“응! 너무 좋아요! 루나, 사진 정말 오랜만에 찍어 보는걸요?”
[루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109/297)]
“나쁘지 않군.”
[샤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109/297)]
루나와 샤인은 연신 싱글벙글하며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저렇게 호감도까지 오를 정도로 좋아하다니…… 잘됐어.’
둘의 기분 좋은 얼굴이 보기 좋은 마음 반, 안쓰러운 마음이 반이었다.
지치지도 않고 사진을 들여다보는 아이들을 보면서, 난 다음에도 또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속으로 결심했다.
그런데 잠깐은 그냥 기분이 좋나보다 했는데, 몇 분이 흘러도 질리지도 않는지 계속 사진에 코를 박고 있으니까 점점 신경이 쓰였다.
‘뭐, 그렇게까지 볼 게 있나?’
특이한 점이라면 사진을 찍느라 후다닥 다른 정장으로 갈아입은 레이커스의 쓸데없이 잘난 얼굴? 사진 너머로도 귀여움이 뿜어져 나오는 샤인과 루나? 그리고 원래는 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처지가 아닌데, 아이들 신나라고 주제넘게 끼어들어 있는 나?
‘생각하고 보니 특이한 점투성이긴 하네.’
“뭘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안 보는데?”
“루나, 마법을 쓰는 게 아닐까요?”
샤인은 거의 반사적으로 내 말에 퉁명스레 대꾸했고, 루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날 올려다보았다.
“마법? 마법이 무슨 말이에요?”
“루나가 그린 그림이 그대로 이뤄졌어요! 그러니 루나가 마법을 쓴 게 분명해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인과관계를 멋대로 해석해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새하얀 피부에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어서 신나서 종알거리는 루나에게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다.
산타클로스니 뭐니 하는 아이들만의 사소한 마법도 정말 아주 짧은 순간 지속되는 거품 같은 거니까.
비눗방울의 영롱한 빛깔이 그다지도 아름다운 건,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하고 터져 버릴 허망함 때문일 거다.
난 루나를 끌어다 무릎 사이에 앉혔다.
호박 머리띠를 쓴 탓에, 루나의 머리가 내 턱 아래에 오자 뺨과 턱이 막 간지러웠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루나를 꽉 끌어안았다.
“듣고 보니 정말 루나가 마법을 쓸 수 있나 봐요. 그래서? 또 다른 소원도 있어요?”
“소원? 응? 있어요!”
“그게 뭔데요?”
루나는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한참을 발만 동동 굴렀다.
무릎까지 오는 레이스 양말을 신고 발을 구르는 건 그것대로 또 귀여워서 마냥 대답을 기다렸더니, 루나가 내게만 알려준다는 듯 내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귀에 속살거렸다.
“결혼!”
“네?”
“선생님하고, 우리 삼촌하고 결혼하는 거요.”
‘내가…… 누구랑…… 뭐라고……?’
난 뭐라고 대답도 못 하고 눈만 깜박였다.
지금까지 내가 루나를 잔뜩 부추겨 놓았으니, ‘이번 소원도 이뤄지겠네요!’라고 말해 주는 게 당연한 순서일 텐데.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나는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루나가 그려올 테니까, 선생님은 저만 믿어요! 걱정하지 말고요!”
내가 어색하게 웃기만 하자, 샤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루나, 바보.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의사가 맞아야 하는 거야. 그림으로 되는 게 아니라.”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잘 흉내 내게 된 샤인의 말은 귀여웠지만, 난 거기에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냥, 결혼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말도 안 되잖아…… 그래서 이렇게 황당한 거라고.’
그 단어가 가진 안정적이고 단란한 느낌과 나는 너무 멀리 놓인 존재였다.
‘내가 리어먼드가에 너무 깊이 엮여 있어.’
그런 깨달음이 순간 머리를 치고 지나가서 멍해졌다.
내가 돌아갈 곳이 어딘지,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살아갈 건지, 내 현실이 어딘지.
그런, 계속해서 외면하고 있는 생각들의 한편에 레이커스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아이들 앞이잖아. 쓸데없이 애들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웃자.’
“선생님 또 아파요?”
“어디 안 좋은 거야?”
하지만 내가 애써 만든 미소는 그렇게 큰 효력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차례로 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난 애들을 이만 유모에게 맡기고 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에 돌아와서 침대에 주저앉으면, 난 습관적으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보고 생각을 정리한다.
오늘도 방에 돌아와 말끔하게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서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자, 길디길었던 하루가 머릿속을 달려 지나갔다.
풀썩.
뒤로 몸을 던지듯 눕자 아주 뽀송뽀송하고 사각거리는 촉감의 이불이 나를 감쌌다.
블리에 씨가 또 이불을 갈아 주었나 보다.
‘왕궁 연회장에 들어설 때부터, 정말 이상한 하루였어.’
저번 다과회에서도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신분이 천하다느니 리어먼드가의 안주인 자리를 꿰차러 들어왔다느니 하는 말이나 들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모두가 나를 너무 좋게만 봐주었고, 공주와도 생각 외의 친분을 쌓았고…… 심지어는 국왕으로부터도 뭔가를 선물받았고…….’
난 국왕에게서 받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생각을 이어 나갔다.
‘모리슨 알터가 범인으로 몰려 사형당할 뻔한 건 피했어. 이제부터 모리슨 알터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야 하지만…… 그래도 처음 겪는 일인데 어떻게 잘 넘어갔어.’
레이커스에게 그간 사격 교습을 받은 덕분에.
‘그리고, 사진…….’
난 품을 뒤적거려 사진을 꺼냈다.
호박등으로 장식된 고저택 앞에 레이커스와 나, 그리고 두 아이가 쪼르륵 모여 서 있는 게 보였다.
‘귀여워.’
아이들이 결혼이니 뭐니 하는 소리까지 한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림으로 보는 것과 이렇게 사진으로 보는 건 정말 기분이 다르다.
마치 한 가족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레이커스에게서 시선이 멎은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나도 모르게 계속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 잘나디잘난 상판대기를 노려보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터질 것 같은 머릿속 때문이겠지.
‘……레이커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해.’
나는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의 헝클어진 실타래를 한참 멍하니 관조하고만 있다가, 사건 수첩을 열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이제 내 습관이 되었으니까.
제일 첫 페이지에는 DAY 1에 있었던 사건의 사진이 있었고, 그 옆에 용의자 관련 내용이 업데이트되었다.
[유력 용의자 : 모리슨 알터(신문 배달부)
공개 수배 이력이 있음.
왕궁에서 인질극을 저질렀으나, 협박당한 부분을 참작하여 국왕 전하의 판단하에 구속 수사하지 않기로 함.]
‘그렇게까지 혐의를 벗은 것 같진 않네.’
난 쓰게 웃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그다음 페이지에는 스크랩된 기사들이 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 있는 캐서 헌트 사건의 사진이나 실종 사건의 사진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오른쪽 페이지에서 시선을 멈췄다.
예상 피해자의 리스트가 적힌 곳이다.
한 명의 이름밖에 없어야 할 페이지에, 갑자기 예상 피해자 6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모니카의 이름만 있어야 하잖아. 이게 갑자기 다 어떻게 된 일이야?’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던 정신이 순간 차갑게 벼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