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6화
똑똑똑.
“저…….”
“들어오세요.”
내가 누군지를 다 밝히기도 전에,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달콤하게 귀에 착 감기는 저음이 나를 반겼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방문을 열었는데도 레이커스는 눈에 띄는 곳에 없었다. 지독하게 어두컴컴한 그의 방만이 나를 맞았다.
‘……왜 이렇게까지 어둡게 해 놓는 거야?’
난 발을 더듬듯 움직여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둠은 그 순간의 분위기를 한 번에 색다르게 바꿔 놓는 마력이 있다.
레이커스의 방은 올 때마다, 그의 외모에 걸맞은 묘한 아름다움이 있는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캄캄한 어둠 속에 물들어 있으니,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응접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다양한 색채들은 간신히 그 형체만을 구분할 수 있는 회색조로 변해 있었고, 높은 곳까지 장서가 꽂혀 있는 책장도 견딜 수 없이 으스스했다.
비밀 공간이 있는 쪽의 문틈으로 누군가 자꾸 날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 방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방을 이렇게 어둡게 해 놓고 있었던 적이 없는데.’
난 침을 꼴깍 삼키며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공작님, 저…… 아르비체인데요. 샤인과 루나랑 같이 사진을 하나 찍었으면 해서…… 어디 계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방의 한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이쪽입니다.”
‘이쪽이 어디야?’
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향해 불평을 늘어놓으며 꺼림칙할 정도로 어두운 응접실을 지났다.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되는 쪽을 향해 걸어가다 보니 그의 방에서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공간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방이 꽤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본 것은 일부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리어먼드 저택은 어떻게 된 게 정원도, 방도 전부 미로 같네.’
좁고 긴 복도로 들어서면서 주위를 밝힐 게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 안입니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넓은 방 한가운데에 큰 피아노의 실루엣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리고 레이커스로 보이는 사람의 형체가 그 옆에 서 있는 것도.
“왜 이렇게 어둡게 하고 계세요?”
“……아. 제가 그랬군요.”
그는 별 대수롭지 않은 걸 깜박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두꺼운 커튼 때문에 밖의 그 화려한 호박 조명이 안으로 비쳐들지도 않아 한 치 앞도 안 보일 텐데, 어쩜 저렇게 모른다는 듯한 반응일 수가 있을까?
‘지하실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마치 어둡다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 같다니까.’
불평을 중얼거리며 내가 문을 미는 순간, 피아노 방이 순간적으로 확 밝아졌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던 비구름 사이로 이른 달이라도 솟아오른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로 발을 멈췄다.
본 적 있는 광경이었다.
원색이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레이커스가 붉은색의 피를 뒤집어쓰고 악귀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광경이.
난 이 방의 어둑어둑함이, 첫 번째 ‘DAY 1’에서 레이커스를 만났던 골목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낮에, 그가 예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진실인 것으로 밝혀진 참인데…….’
그래서 그를 조금 더 믿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그런 지금, 바닥에 흥건한 이 피를 뭐라고 해석해야 해?’
머리끝까지 쭈뼛 솟아오른 본능적인 공포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을 돌릴 생각도, 뒷걸음질 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른하게 피아노에 기대 있는 레이커스를 노려보았다.
배신감 때문일까? 아니면, 레이커스에게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약자의 본능 때문일까?
“……이런 모습을 보여 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인제 와서 숨기기에도 늦었다 싶군요.”
“……뭐, 뭘…… 뭘 한 거죠?”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누, 누굴.”
모르는 사이에, 내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누구’를 어떻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전, 인간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인간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핼러윈 농담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하지만 거미 크리쳐를 반으로 가른다 해도, 저런 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똑똑히 보았다.
그 크리쳐는 정말 게임의 괴물처럼, 두 동강 난 채로 그냥 그대로 죽을 뿐이다.
고장 난 기계처럼, 나는 너무 늦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너무 어두워서 그럴까.
레이커스는 그 순간, 참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빗속에서 아주 오래 홀로 내버려져 있던 강아지처럼, 처량한 얼굴을 했다.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금빛 눈썹이 부드럽게 아래로 축 처지고 잿빛 눈동자가 빛을 잃을 때면…….
‘모르겠어. 레이커스가 어떤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불쌍해 보였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렇게 피 칠갑을 하고 있는데.
또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데 레이커스가 다급하게 뭔가를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충격요법은 잘 듣는 편이라 그렇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아르비체도 한 번, 절 깨어나게 한 적이 있잖습니까.”
내가 그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알아듣지 못한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깨어난다는 게 무슨 말이죠?”
“전, 가끔…… 집어 삼켜질 때가 있습니다.”
왕궁의 정원에서 레이커스의 눈이 탁하게 보였던 것을 기억한다.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하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눈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워낙 주위를 어둡게 해 놓고 있어서,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공포 게임 속 하늘색을 닮은, 탁하면서도 투명하고 영롱하면서도 섬뜩한 그 눈동자가.
그저, 주변의 어두운 색 때문에 흐리고 어둡게만 보였다.
“어떤 충격요법인데요?”
“아르비체가 제 뺨을 때렸듯이, 저도 비슷한 일을 했죠.”
레이커스의 말에, 난 바닥과 그를 쏘아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레이커스는 스스로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이 많은 피를 쏟기라도 했다는 건가?
난 기가 막혀 그를 노려보았다.
‘누굴 바보로 알아? 그랬다간 죽어. 누구라도 죽는다고.’
그는 평소보다 창백해 보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몸을 휘청이지도 않고, 신음을 흘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지.
난 그렇게 기가 막힌 와중에도, 이상할 정도로 그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멍하니 그를 쏘아보고 문간에 서 있기만 하자, 레이커스는 내내 짓고 있던 그 처량한 표정을 지웠다. 그러곤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일부러 표정을 숨긴 거야.’
왜일까? 그가 너무 빤하게 읽혔다.
아닌가? 그가 내가 오인하도록 유도했을까?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언제 우울하게 굴었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분장입니다.”
“……네?”
“핼러윈 분장입니다.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리어먼드가는 전통적으로 핼러윈을 좀 지독하게 챙기는 편이라서요.”
‘……거짓말이야.’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저 말은 이 분위기를 어떻게 무마하려고 웅얼거리는 의미 없는 말에 불과했다.
물론, 남들의 눈에 잘 띄는 곳도 아닌 제 방을 이렇게 엉망으로 꾸미는 게 의미가 없다는 논리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냥 그의 얼굴만 봐도,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어쩌다,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참과 거짓을 알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되었을까?
난 천천히 피의 궤적을 따라 그에게 다가갔다.
너무 어두워서, 바닥에 떨어진 피의 궤적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어려웠다. 난 그것을 꼼꼼하게 살피며 레이커스에게 한 발짝씩 다가갔다.
처음에는 그의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바라보니 피로 흠뻑 젖은 곳은 그의 몸통과 오른손 소매 쪽이 다였다.
난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그를 믿고 있다는 것이 제일 소름 끼치게 놀라웠지만 그럼에도 그런 내 판단이 옳은지 알고 싶었다.
“눈을 보여 줘요.”
“……아르비체.”
“제 이름은…… 아니, 됐어요. 눈을 보여 줘요.”
아주 가까이 다가가자, 지독히 아름다운 악귀의 얼굴이 나를 맞았다.
내가 본 중 몇 안 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듯 난색을 보이는 얼굴이 손닿는 곳에 있었다.
레이커스의 창백한 얼굴이 피아노에 반사된 달빛에 새하얗게 빛났고, 나는 그의 흰 뺨에 손을 댔다.
나보다 항상 조금쯤 체온이 높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 쪽이 훨씬 높은 모양이었다. 그의 뺨은 아주 차가웠고, 언제나 붉디붉은 입술은 색을 조금 잃어 옅어져 있었다.
난 그의 겉옷 단추를 잡아당겨 풀었다.
내 머리카락 색과 아주 잘 어울리던, 청록색 슈트의 단추가 풀렸다.
“……아르비체, 사진을 찍으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다시 한번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슈트 안의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이제 지긋지긋해. 그가 얼렁뚱땅 둘러대는 건.’
뭐든 확실한 증거를 봐야겠다.
그의 몸에 꼭 맞게 재봉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 때마다 그의 맨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목한 빗장뼈, 새하얗고 탄탄한 가슴의 대흉근, 그리고 선명하게 홈이 파여 있는 그의 잘 쪼개진 복근까지.
나는 손을 뻗어 셔츠의 흠뻑 젖은 피가 묻어 있던 부위인, 그의 왼쪽 배를 손으로 짚었다.
셔츠를 들추자 거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뭐지?’
난, 여기에 상처가 있길 바랐던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레이커스와 관련해서는 모든 정보가 다 이런 식이었다. 뭐 하나 똑바로 확정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뭐 하나 한 번에 쉽게 가는 게 없었다.
“똑바로 말해 줘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자, 피아노에 반쯤 기댄 레이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제 피부 위에 딱 달라붙어 있는 내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쥐었다.
지금까진 의식하지 못했는데, 나는 지금 피아노에 기댄 남자 위로 몸을 너무 숙이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레이커스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로 저에 대해서 더 깊게 알고 싶으신 겁니까?”
순간적으로 달이 구름을 완전히 빠져나오기라도 했는지, 그의 잿빛 눈동자가 눈을 뗄 수 없는 수정구슬같이 반짝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