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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95화 (95/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5화

난 핼러윈을 좋아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리어먼드 저택을 바라보는데, 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너무 예뻐…… 저 반짝반짝하는 램프들.’

<살인자들의 밤>은 시간이 지나면서 급격하게 인기를 잃고 다른 공포 게임들의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초기에는 꽤 화려한 성우진을 자랑하며 등장했던 게임이었다.

현실 시간 기준으로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때 게임에 접속하면 게임 내 주요 장소 일러스트가 바뀌는 정도의 이벤트는 기본으로 지원했었다.

하지만 점점 인기가 줄어들면서 새로운 이벤트가 업데이트되질 않았기 때문에, 핼러윈은 업데이트 기분이나마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다.

‘하지만 현실은 좀 힘들어 보이긴 하네.’

하인들이 나르고 있는 한 아름만 한 호박 램프가 그냥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진 않았을 테니까.

앰버와 하녀들이 둘러앉아 호박 속을 파내고, 하인들이 호박의 얼굴을 모양내어 도려냈을 걸 생각하니 어마어마한 고생이긴 했다.

‘하지만 운치 있고 예쁘긴 해.’

가까이 갈수록 그냥 예쁜 장식만 가져다 둔 게 아니라 눈알이 튀어나온 허수아비나 너무 지나치게 진짜처럼 보이는 기요틴, 도끼 장식 같은 게 정원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게 보여서 숨이 좀 답답하긴 했지만.

‘그렇다면 현실의 오늘은, 핼러윈일까?’

사실 이젠 잘 모르겠다.

더욱이 이런 순간에는.

지금 이 시간에 현실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여기가 정말 게임 속인지.

촛농이 타들어 가는 묘한 냄새, 호박 랜턴에 손을 가져다 대면 전해져 오는 따뜻한 온기, 멀리서 우는 까마귀 소리며 마당 어디선가 장작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

내 모든 감각기관이 총동원되어 느끼고 있는 감각들 사이에 서 있노라면…… 뭐가 현실이고 뭐가 게임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마차가 멈추자, 평소와는 달리 작은 호박이 달린 머리띠를 쓰고 있는 블리에 씨가 내게로 다가와 웃어 보였다.

그 머리띠는 블리에 씨의 붉은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와 너무 잘 어울렸다.

‘이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나 지금 좀 행복한지도?’

“어서 오세요.”

나는 남은 돈을 다 털어서 충동적으로 소중한 세이브 NPC를 위해 추가 핼러윈 아이템을 사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마주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블리에 씨는 웃으며 내 모자와 코트를 받아들었다.

“공작님께선 먼저 들어가셨는데요.”

“공작님은 방에 계세요. 장갑도 있으면 이리 주세요.”

“장갑은…… 그럴 일이 있어서 좀 벗었더니 잃어버렸어요.”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내가 공작이 사 준 꽤 비싼 장갑을 잃어버렸다는데도, 그녀는 안타까워하는 표정 한번 없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돌아온 터라 왕궁 연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소문은 아직 돌지 않았을 텐데도.

그 점이 고마워서 난 작게 웃었다.

“그보다 함께 오신 두 분은 누구시죠?”

블리에 씨가 내 뒤를 보려고 고개를 옆으로 틀자, 머리띠에 달린 작은 호박들이 더 잘 보였고 그 덕분에 블리에 씨가 좀 더 귀엽게 보였다.

난 이 심각한 상황에 함박웃음을 짓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대답했다.

“모리슨 알터 씨와 그 부인이세요.”

“아르비체 님의 손님이신가요? 잠자리를 준비해 드려야 하나요?”

“네,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하긴, 한때 현상 수배된 자를 집에 들인다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블리에 씨가 장갑 하나로 뭐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지나의 부모님들이세요. 지나는 어디에 있어요?”

“샤인 님, 루나 님과 함께 계십니다.”

“샤인이랑 루나랑요?”

난 좀 뜻밖이라서 반문했다.

지나도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이니, 아이들에겐 또래 친구처럼 보일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늘 리어먼드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샤인이 평민인 지나에게 이상한 소리라도 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난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들지 않아서 요란하게 호박과 박쥐 날개 장식 같은 게 잔뜩 늘어선 복도를 지나, 샤인과 루나의 놀이방부터 찾아갔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안을 살피자, 아이들은 핼러윈을 맞아 나름 그들만의 다과회를 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케이크와 차가 놓인 테이블에 둘러앉아 의젓한 척 턱을 들고 앉아서 뭔가를 종알거리고 있었다.

‘대체 왜 저렇게 턱을 높게 드는 거야. 저러고 다니면 앞이 보이지도 않겠네.’

하지만 아이들이 뭘 따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방금 다녀왔던 왕실 연회에서 만난 귀족들은 하나같이 어깨와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고 다녔으니까.

‘애들 앞에선 냉수도 함부로 못 마신다고 하던 옛말이 갑자기 생각이 나네.’

하지만 애들이 아무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옷차림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밖에 나질 않았다.

루나는 마녀 행세를 하는 건지 뾰족 모자와 까만 망토를 둘렀고, 샤인은 대체 무슨 동물 흉내를 내고 싶은 건지 까만 뿔 같은 것이 달린 머리띠와 박쥐 날개가 달린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지나도 루나와 꼭 같은 분장을 하고 있었다.

‘뭐야, 걱정했는데. 정말 의외로 잘 놀고 있네.’

너무 흐뭇해서, 이 귀엽고 소중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지나를 불러서 알터 부부에게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지나야!”

“엄마 왔어!”

난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았다. 내 뒤에는 알터 부부와 함께 유모가 서 있었다.

“제가 모셔왔어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

유모의 말에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사이, 아이들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샤인과 루나 사이에서 조곤조곤 잘만 떠들던 지나는 활짝 열린 문으로 보이는 얼굴들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울상이 되어 버렸다.

야무지게 손에 꼭 쥐고 있던 포크와 수저를 내동댕이치듯 내려놓고선, 입을 크게 벌리고 귀여운 눈을 있는 대로 구겨 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아아앙!”

루나는 지나의 반응이 당황스러운지 달래려 손을 뻗어 등을 토닥거려 주었고, 샤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난 내가 굳이 이 두 사람이 지나의 부모님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샤인이 이미 그걸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챘다.

부모님을 잃은 아이 앞에서 이런 상봉 장면을 보여 주는 건 너무했다.

난 좀 난처한 얼굴로 유모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지나를 데리고 나가서 세 명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세요.’

유모가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는 얼굴로 흘끗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지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샤인이 망토에 이어진 장갑을 낀 손으로 지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뭐 하는 거야?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거야? 울보인 줄만 알았는데 멍청이잖아. 그만 울고 얼른 가 봐.”

“……으흑.”

난 그제야 깨달았다.

‘지나는 지난 며칠 동안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라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겁이 난 거구나.’

그래서 애타게 찾던 부모님을 만났는데도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가만히 눈치를 보며 서 있기만 했던 모양이었다.

샤인이 등을 떠밀어 주듯 말하자, 그제야 쪼르르 달려가 엄마 아빠의 품에 안겼다.

“어, 엄마아. 흐아아아앙. 아빠아.”

“많이 무서웠지, 우리 딸.”

“기, 흐아아앙, 기다렸잖아. 기다렸, 흐끅.”

“미안해. 미안해, 우리 딸.”

“아빠가 미안해.”

유모가 어쩌면 좋으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씁쓸하게 웃으며, 지금이라도 세 명을 옆의 손님용 객실로 모시는 게 좋겠다고 손짓했다.

유모가 셋을 데리고 나가는 동안, 루나는 친구가 사라져서 아쉬운지 입을 삐죽거렸고 샤인은 티팟을 들어 제 동생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난 샤인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샤인은 이제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가시 뻗친 가녀린 새싹 같은 아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제 아픔을 숨기면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는 가끔 너무 빠르다. 잠깐만 눈을 떼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다.

마냥 어른이 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데, 시간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다.

“있잖아, 샤인, 루나.”

“응?”

“네, 알비 선생님?”

두 아이가 갑작스레 조용해진 방 안이 어색한지 방 안을 한번 휘 둘러보곤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 순간 이상하게도 처음 이 게임에 들어온 날 보았던 샤인과 루나의 사진이 번뜩 떠올랐다.

고저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샤인과 루나는, 당시의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었지만 지금 떠올려 보면 표정이라곤 지을 줄 모르는 인형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루나가 내게 그려 준 ‘집’ 그림도 떠올랐다.

‘내가 이 두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아주 사소하지만 괜찮은 이벤트가 생각났어.’

모처럼 건물도 예쁘게 반짝반짝하고, 두 아이도 나도 따로 차려입을 필요 없을 만큼 갖춰 입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공작님 모셔올 테니까.”

“네?”

“삼촌은 왜?”

“우리 같이 사진 찍자.”

샤인과 루나는 내 제안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딘가 축 늘어져 있던 표정을 하고 있던 두 아이는 금세 화색이 돌아서는 머리에 쓴 모자와 머리띠를 만지작거려 댔다.

난 문을 살짝 닫고 나와 얼른 레이커스의 방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틀림없이 레이커스도 내 제안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도대체 누굴 놀라게 해 줄 심산으로 그렇게까지 치장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치장이란 건 남 보라고 하는 거니까.

막상 레이커스의 방문 앞에 서니까,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순간이 자꾸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하지만 아이들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난 다른 생각들을 모두 접어 두고 얼른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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