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4화
알터 부부는 내 청에 따라 나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마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저, 그…… 지나가 왜 리어먼드가에 가 있는지……. 실은, 저와 어제 만날 약속을 했었거든요.”
“저희 지나가 뭔가 결례되는 일이라도 한 건 아니겠죠?”
난 둘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 보였다.
“맞아요. 어제 신전 앞 다리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결례라니요. 지나는 아주 얌전하고 예의 바른 아이던데요.”
“저희 아이를 어떻게 아시는지요?”
난 모리슨이 걱정을 듬뿍 담아 묻는 말에 뭐라 답할지 잠깐 망설였다.
본인들도 힘든 일을 겪은 마당에 아이까지 거리에서 사람들의 핍박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속이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숨길 수도 없어. 어차피 지나가 이야기하기도 할 테고.’
난 마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나는 어제의 일을 최대한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갈 곳이 없어 보여서 잠깐 데리고 있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리슨 알터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Iv.1(80/99)]
[아리아 알터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81/99)]
이야기하면 할수록 시시각각 표정이 어두워지던 알터 부인, 아리아는 눈물까지 흘리며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 뒤로도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받았는지 모른다. 차마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알터 부부는 쉴 새 없이 감사 인사를 전해 왔다.
“제 부인도, 저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인제 그만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만.”
이렇게 쏟아지는 감사 인사를 받는 동안, 나는 알터 부부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아냈다.
‘모리슨 알터가 범인으로 확정되면 게임 루트가 잘못 흘러간다’라고 막연히 생각하기만 했을 때는 모리슨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건 내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그는 부인을 지극히 아끼는 사람이었다.
당장 제가 맞은 곳에 대한 아픔을 호소하는 일도 없었고, 제가 겪은 부당한 일에 대해 불평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전하는 와중에 제 아내가 많이 떨고 있으니 담요를 빌릴 수 있겠냐고 내게 슬쩍 물어보고, 나눠 덮으라고 구해 준 담요 두 장을 모두 아내에게 둘러 주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인데, 어쩌다 그런 누명을 뒤집어쓴 걸까?’
부부 둘 모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납치되어 인질이 되어야 했던 지나의 엄마, 아리아 알터가 계속 몸을 덜덜 떨고 있어서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라고 오해받는 내내 아리아와 지나가 겪었을 수모가 대단했을 테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도 없었다.
마차가 리어먼드가로 향하는 익숙한 골목으로 접어들고서야, 더 이상 지체하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떠밀리듯 이야기를 꺼냈다.
“저, 혹시…….”
“네.”
“뭐든 말씀하세요.”
난 침을 꼴깍 삼키고 모리슨 알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범인이, 연회 홀에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던가요? 리어먼드 공작을 불러내고, 제게 그런 명령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주문했나요?”
모리슨 알터는 뒤늦게 제가 내게 한 짓이 떠오르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내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얼른 손을 저었다.
“그게 모리슨 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요. 그렇게 고개 숙이실 필요 없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이런 은인께 제가 한 일을 생각하면…….”
“나쁜 건 모리슨 씨에게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한 놈이에요.”
“……아르비체 님.”
모리슨 알터는 감동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왕궁에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경비가 꽤 삼엄했을 텐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계속 도망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범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돈 게 언제더라…… 몇 달도 더 전부터 경찰들이 저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연쇄살인 사건이요?”
“……네. 귀족 나리들이 죽어 나간다는 것 말고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건인데, 거기서 범인으로 지목당하면…… 그때는 제 목숨은 끝 아닙니까?”
“그래서요?”
“이건, 범인이 잡힐 때까지는 숨어 다녀야겠다 싶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하면 어리석은 판단이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객관적인 판단일 수도 있었다.
당장 국왕만 해도 이자를 그냥 아무런 고민도 없이 처형할 것처럼 이야기했으니까.
귀족들의 사건에 잘못 끼어든 평민의 목숨이란 파리만도 못하니까.
심지어 모리슨이 범인이라 지목당한 건 사소한 사건이 아니라 고위 귀족이 몇이나 죽어 나간 연쇄살인 사건이니까.
모리슨은 울상이 된 채로 이야기를 천천히 이었다.
“그런데…… 제가 있는 곳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거기로 편지 하나가 왔습니다. 부인을, 아리아를 데리고 있다고요.”
“그래서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전…… 제가 그런 오해를 좀 샀다고 해서 제 아이와 부인까지 무슨 큰일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잠깐 지나면…… 모든 오해가 풀릴 거라고만 생각하고 숨어 지내기 시작했던 거니까요.”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한 생각이지만 평생을 순박하게 살아온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연민의 눈빛을 보내자, 모리슨은 힘을 얻은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나오라고 한 놀이터로 나갔습니다. 어찌나 까마귀가 많이 있던지, 무슨…… 어쨌든 낙엽 사이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데, 어느 순간에 손수건을 든 남자가 저를 덮치더니…… 정신이 들어보니 눈이 가려진 채로 어딘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모리슨은 그때가 떠오르는지 부인을 감싸 안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몸을 떨더니 이어 말했다.
“그때부턴 다른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제 뒤에 총구가 겨눠져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전 시키는 대로 순순히 걸었습니다. 눈이 가려진 채로요. 눈을 가린 천이 풀렸을 때는 연회장의 구석이었고, 그 뒤는 대충 아시는 대로입니다.”
‘뭐? 잠깐. 다른 목소리?’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캐서 헌트의 부검 영상을 봤을 때도 범인 이외의 목소리가 하나 더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공범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모리슨이 말하는 건 완전히 협력자라는 인상이잖아.
‘아니면 가면을 벗었을까?’
내가 떠올린 가설을, 난 금방 부인했다.
‘납치범의 그 스산하고 특징 없는 목소리는…… 마치 변조된 듯한 것이었어. 가면을 벗는다고 해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들리진 않을 것 같은데?’
“……두 목소리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달랐나요?”
내 질문에 모리슨은 내가 정말 이상한 질문을 했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네? 그거야…… 두 번째 목소리 주인은 여자였으니까요.”
난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은 얼마든지 있었다.
‘모리슨 알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회에 숨어들 때 왕궁의 비밀 통로라도 이용한 것 같은데, 그런 귀한 정보를 납치범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모리슨 알터를 왕궁으로 데려온 것도 힘들었을 텐데, 범인은 어떻게 부인까지 연회장으로 데려왔던 걸까?’
하지만 공범이 있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여자 공범이라니.’
증거를 수집해서 어떻게든 범인을 잡으면 간단하게 이 게임의 진엔딩에 도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점점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난 창밖으로 지나는 풍경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공포 게임 속에서 벗어나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정말 이상한 건, 난 분명히 이곳을 지독하게 힘겨워하고 있음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는 거다.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 것도 분명 있지만…….
총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레이커스와 춤을 추고……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내 다른 현실이 되어 있는 지금이 어쩌면 아주 조금쯤은 즐거웠을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다, 또.’
레이커스의 생각을 떠올리자, 지금까지 차갑고 냉정하게 벼려져 있던 마음이 또 내가 바라지 않는 이상한 모양으로 마구 뭉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요즘 습관적으로 하는 일에 불과했지만, 오늘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 내 행동이 오죽 이상해 보이긴 했던지 알터 부부가 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라.’
난 리어먼드가의 고저택이 보이기 시작하는 낮은 언덕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리어먼드가는 반나절 집을 비운 것 치고는 그새 외관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핼러윈 스킨이다.’
게임을 할 때는 그냥 그림 두어 장이 바뀌고 마는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하인들이 부지런하게 고저택 여기저기를 다니며 호박 램프를 비치하고 있는 게 보였다.
우르릉!
비가 오려는지, 타이밍도 좋게 그 순간 번개가 번쩍 쳤다.
순간 2층인지 3층인지의 어느 방 안이, 순간적으로 번쩍인 밝은 빛 때문에 훤히 비쳐 보였다. 순간 인간의 형상이 아닌 듯 일그러진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레이커스의 방인 것 같은데.’
그리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핼러윈을 위해 적극적으로 분장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보기보다 열심히 하네.’
라떼와 밀로라드, 르뮈에가 저렇게 부지런히 꾸미는 남자를 보고 흡족스러워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