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3화.
“짐이 오늘의 영웅을 위해, 이것이라도 하사해야겠군.”
하탄 국왕은 그렇게 말하며 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빼서 위로 들어 보였다.
그 목걸이는 흔한 동네 아저씨 같은 외모를 한 국왕의 목에서 나온 것치곤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은색 줄의 목걸이였는데, 새끼손톱만 한 작은 펜던트에는 새하얀 보석이 반짝거렸다.
내가 살짝 몸을 낮추며 고개를 숙이자, 국왕이 직접 내게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난 황공한 듯 손을 가슴에 모으며, 슬쩍 손을 목걸이에 가져다 댔다.
[수호의 목걸이 : 미리 지정한 대상에 한하여, 1회 한정으로 죽음에 이를 데미지를 무효화합니다.(0/1, 지정 대상 : 미정)]
‘……세상에. 무효화라니, 아주 좋은 거 아냐?’
주변에 아무도 없는 내 방이었다면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기뻐했을 텐데. 난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우아한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국왕은 그렇게 좋은 것을 주고도 뭔가 아쉬운 눈치로 제 볼을 콕콕 찔렀다.
“짐이 그대에게 무엇을 또 해 주면 좋을까……? 아아, 그렇지. 방금 오면서 들으니, 자네가 부모를 잃었다 하던데.”
“……아, 네? 네.”
나는 조금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르비체의 신세가 기구한 것이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모두의 이목이 쏠린 곳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라서.
“아바마마,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피곤할 텐데, 빨리 조사부터 마쳐요. 네?”
블란테 공주가 국왕에게 눈치를 줬지만, 그런 걸 금방 알아차릴 정도로 센스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상한 소리를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국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자네에게도 다른 보호자가 필요하겠군. 내가 봐 둔 괜찮은 신랑감이 있는데…….”
‘……아이고, 이 캐릭터가 이런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까 참 그러네.’
하지만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왕만 그렇게 말하고 넘어갔으면 좋은데, 그 순간에 연회장 안의 분위기가 얼마나 이상해졌는지 모른다.
뭇 남자 귀족들이 레이커스를 의식해서인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어딘가 조금쯤 기대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게…….
호감도 이벤트를 위해서는 좋은 일일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블란테 공주가 내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며 국왕의 팔을 흔들었다.
“아바마마!”
“넌 좀 가만히 있거라. 네게도 내가 어련히 알아서 괜찮은 신랑을 점지해 주지 않겠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컥!
그때, 연회장 구석에서 모리슨 알터가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무슨 반항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곤봉으로 한 대 얻어맞은 모리슨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 공주에게 총구를 들이댄 평민. 그것도 심지어는 제일 유력한 용의자라 추정되는 인물. 그가 왜 저런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뻔했다.
“저, 국왕 전하.”
“음?”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오나…….”
“……아, 리어먼드 공작 때문에 그러나? 물론 공작과 정을 통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내 익히 들었지만…….”
그러고 보니 이 국왕, 내가 레이커스의 연인이라는 소문을 듣고도 내게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할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그를 싫어하는 거야?
그보다 사람을 얼마나 아래로 보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연인이 있든 말든 다른 ‘보호자’를 붙여 주려고 하는 거야……?
난 쓰게 웃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전하, 보셨다시피 사격 기술도 좋은지라, 보호자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하하, 그대는 참 농도 잘하는군.”
국왕이 웃음을 터뜨리자 귀족 중 일부가 반사적으로 따라 웃는 게 보였다.
나는 차분하게 입 속으로 말을 정리하여, 최대한 무례하지 않게 다시 말을 꺼냈다.
“전하, 농담이 아니오라 정말로 말씀해 주신 괜찮은 신랑감 말고 다른 소원이 있습니다.”
“허어……? 그것이 무엇인가?”
국왕은 그가 뭔가를 모처럼 베풀어 준다는데, 내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도 기분이 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못내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 말을 기다렸다.
난 침을 꼴깍 삼키고,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의 신분을 상기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인 모리슨 알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국왕이 심기가 조금 상한 듯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지금, 짐 앞에서 그자를 피해자라고 부르는 건가?”
“……국왕 전하께서는, 저자를 어찌 처분하실 생각입니까?”
국왕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블란테 공주를 한쪽 팔에 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미간이 좁아지고, 호를 그리고 있던 입술이 무표정하게 가로로 그어졌다.
그저 동네 아저씨같이 보이던 그의 동글동글한 얼굴에서, 무거운 판단을 수없이 많이 내려왔던 무자비한 심판관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그야 사형이지.”
국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머릿속 한구석에서 예상하던 말보다 더 섬뜩한 말이었다.
그 순간, 나와 국왕을 둘러싼 귀족들의 얼굴도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일말의 놀라움도 없었다. 그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설마 했지만, 역시.’
신분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평민들의 목숨은 귀족들이 쉽게 좌지우지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문득 그저 실종된 친구의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호감도가 올랐던 모니카의 경우가 생각나서 마음이 안 좋았다.
‘지금 이 말을 하면, 모처럼 오른 국왕의 호감도를 깎아 먹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나가 엄마와 아빠를 기다릴 거다.
원래 아이를 그렇게 예뻐하지도 않았는데, 최근 샤인과 루나를 돌보면서 아이들의 여린 본성을 알게 되어서 그런지 마음이 너무 쓰였다.
난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한번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공명정대하신 국왕 전하, 제가 전하를 이렇게 살아서 뵐 수 있는 것은, 모리슨 알터가 진짜 범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건 그대의 사격 실력이 좋았기 때문이지.”
“그리 칭찬해 주시는 것은 감사하오나, 이는 제가 모리슨 알터의 부인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모리슨 알터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거야…… 하지만, 어차피 그자가 범죄자라 공표됐던 것도 사실이잖는가?”
“전하.”
나는 모리슨 알터가 취조받고 있는 쪽 기둥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 기둥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그의 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위협를 당하지도 않은 다른 귀족들이 제각기 담요를 걸치거나 하며 한껏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음에도, 어떻게 된 게 지금까지 총구에 위협당했던 모리슨의 부인을 돌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난 한숨을 삼키며 얼른 말을 이었다.
“절 영웅이라는 과분한 칭호로 불러 주시고 오늘의 제 공을 높이 사 주신다면…… 부디 저자가 정당한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일단 지금 풀어 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이후에 조사를 받으러 보내겠습니다.”
“어차피 결과는 같을 것 아닌가?”
“저자가 정말 이 사건의 범인이라면 그 부분은 공명정대하시고 유능하신 국왕 전하께서 또다시 엄벌하실 기회가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내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국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한 보람이 있었는지, 국왕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의 고개가 가까스로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블란테 빅토리아 아레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34/198)]
[라떼 라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60/198)]
[르뮈에 라루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45/198)]
[밀로라드 드라셀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46/198)]
[앨라이 쿠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4(1/396)]
일순, 알림창의 글자들이 한꺼번에 위로 밀려 올라갔다.
‘당연히 귀족들의 호감도를 왕창 깎아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인데…… 진짜 의외야.’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둘러보자, 블란테 공주가 날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밀로라드와 르뮈에, 라떼도 다들 내가 아니었으면 뭐라 한마디 꺼냈을 전투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고, 앨라이 쿠스는 무슨 대단한 인류애라도 발휘한 현자를 보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난 작게 미소 지었다.
호감도만 오른 게 아니라, 그들과 나 사이에 정말로 공유하는 어떤 생각들이 있다는 것에서 유대감이 느껴지는 게 기분 좋아서.
“풀어 줘라.”
국왕의 한마디에 경비병이 소식을 전했고, 하인 두 명이 모리슨 알터와 그 부인을 부축해서 연회 홀 입구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애당초 여기에 초대받았을 때 내가 원했던 목적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여기서만 만날 수 있는 유명 인사들과 호감도를 쌓고 모니카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경고해 두는 것. 둘 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뤘다.
나는 국왕에게 격식을 갖춰 인사하고, 내게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는 이만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리어먼드 공작님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제가 돌봐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레이커스가 오늘 겪은 일을 본 사람들은, 그가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충격도 많이 받았으리라 생각하는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얼른 돌아가라고 손짓해 보였다.
나는 연회장을 나오는 계단을 오르며, 연회 홀에 있는 수많은 귀족이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기이한 광경을 애써 외면했다.
모리슨 알터와 부인을 부축하고 있는 하인들은 연회 홀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마차에 태워 주세요. 리어먼드가로 데려가서 만나게 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모리슨 알터와 부인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고, 고맙습니다, 나리.”
“고맙, 고맙습니다…… 흑……”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만 우세요.”
“저, 그런데 염치가 없지만…… 먼, 먼저 제 딸을 만나러 갔다가 리어먼드가로 인사하러 다시 가도 괜, 괜찮겠습니까? 물론, 절 못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요…….”
난 모리슨 알터와 부인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바로 지금, 지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알터 부부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