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2화
곧 경비병들이 나를 발견했다.
“찾았다!”
“아르비체 님! 혼자 계시면 위험합니다!”
그들 중 둘이 얼른 내게 다가오며 날 연회 홀 쪽으로 안내하려 했고, 다른 경비병 하나는 레이커스를 찾으러 가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공작님께선 급한 볼일이 있어 먼저 돌아가셨어요.”
“……지금, 갑자기 말입니까?”
콧수염이 수북한 경비병이 당황스럽단 얼굴을 해 보였다.
레이커스가 갑자기 돌아간 게 내게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이상한 일이라는 걸 난 퍼뜩 깨달았다.
인질극의 당사자 격인데도 참고인 조사도 않고 갑자기 돌아가 버리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수상쩍게 보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물론, 그의 신분과 업적이 있으니 아무도 그걸 입 밖에 내지야 않겠지만.
레이커스를 위해서 내가 변명을 해 줄 이유는 아무것도 없는데, 난 나도 모르게 어물쩍 둘러댔다.
“갑작스러운 일을 당하고 나서, 많이 놀라셨나 봐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시라고 했어요.”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저희가 모셔 드릴 텐데요.”
“아니에요. 지금 그럴 경황이 없을 만큼 바쁘실 텐데……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렇습니까…….”
경비병은 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적당히 이해해 준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내게 빨리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국왕 전하께서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게임 속에서는 연설할 때만 진짜 잠깐 등장하고 마는데. 어후, 부담스러워.’
하지만 딱 질색이라고 생각하며 발을 떼려던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게 있었다.
‘어…… 잠깐만.’
게임 커뮤니티 내 <살인자들의 밤> 공략 게시판의 죽순이였던 나는 거기 있는 게시글 중에 안 읽은 게 없었다.
처음에는 공략 관련 글만 읽었지만, 점점 게임의 인기가 줄어들면서 읽을 게 없자, 나중에는 캐릭터 덕질 글이나 불평을 늘어놓는 사소한 글까지 전부 다 읽었다.
그렇게 본 것 중에 떠오른 게 있었다.
‘그러고 보면 분명, 국왕의 호감도를 올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어.’
게시판을 보면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게임 내에서 한 희한한 일을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원하는 만큼의 반응이 안 나오면 공략도 안 올리고 튀기도 했다. 그 게시글을 쓴 사람이 바로 그랬다.
근데, 워낙 상호 작용 루트 자체가 안 보이는 캐릭터를 가지고 글을 쓴 데다가 너무 과한 보상을 언급해서 다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그냥 관심종자가 쓴 허튼 글이라고 생각해서 댓글도 안 달고 지나쳤고.
‘고작 Lv.1이라고 했는데도 보상이 어마어마했는데……. 방어력이 붙은 목걸이라고 했어.’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플레이한 나도 모든 루트를 다 뚫지 못했는데,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설마, 하지만 이 기회에 호감도를 올릴 수 있다면 좋지. 아니어도 상관없고.
아이템 파밍의 기회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부담스럽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게이머로서의 혼이 불타올랐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 국왕은 그렇게 짧은 등장으로도 지독하게 신분과 계급에 집착한다는 인상이었다.
다과회 때 리베아 제논이 날 그렇게 옷차림으로 무시했던 것도, 국왕에 비하면 약과일지도 모른다.
난 경비병들을 따라 흙이 없는 곳까지 돌아간 다음, 구두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려 흙을 털어냈다.
그리고 갑자기 레이커스를 따라잡는다고 달린 탓에 엉망으로 구겨진 치마도 잘 털어 구김을 폈다.
경비병들은 이렇게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옷차림을 정리하는 날, 굉장히 예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딘가 감탄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며 기다려 주었다.
머리도 잘 정리하고, 그리고 소매도 털고…….
난 문득 투명한 유리 반지가 끼워진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퍼뜩 샤인에게서 받은 코르사주를 떠올렸다.
‘저번에 다과회에서 옷차림 때문에 무시당했다는 거 다 들었어. 그러니까, 이번엔 제대로 하고 가라고.’
샤인이 그렇게 웅얼거리며 내게 코르사주를 내밀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난 손을 뒤로 돌려 옷자락을 터는 척하며 인벤 창에서 코르사주를 꺼내 손목에 착용했다.
그걸 손으로 만지고 있으니 눈앞에 [매력+4]라는 아주 작고 귀여운 부가 기능이 조회됐다.
샤인이 이걸 내게 주려고 그 아이 딴에는 대모험을 했는데, 이걸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단장할 때 졸지 않았다면 아침부터 하고 나올 수 있었을 텐데.’
난 연한 분홍색과 부드러운 베이지색이 섞인 코르사주를 슬쩍 바라보곤 연회 홀로 들어섰다.
아침에는 그렇게 화려하고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연회 홀은, 음악이 뚝 끊겼다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으스스하고 삭막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꽉 차 보이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지나치게 넓어 보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왕실 경비병들은 입구에서부터 안쪽까지, 의장용 칼 대신 진짜 무기를 각자 손에 쥐고 홀의 창문을 따라 정렬해 있었다.
호위를 받으며 그사이를 지나는데, 왕실 경비 대장인 걸로 보이는 가장 화려한 외양을 한 자가 짧게 구령을 붙였다.
“일동, 차렷.”
착!
경비병들도 모두 의장용 차림인 덕분에, 옷에 달린 술들이 크게 흔들리면서 모두의 동작을 크게 보이게 했다.
서른 명도 넘어 보이는 경비병들이 한꺼번에 칼같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어딘가 장관이었다.
“블란테 공주님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일동, 경의를 담아 경례!”
일순, 왕실 경비병들이 한꺼번에 나를 향해 거수경례를 붙여 보였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거 아냐?’
이렇게까지 감사 인사를 받게 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짓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등에서 땀이 다 날 정도로 당황한 날 두고,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짝짝짝짝.
시선을 돌리자, 내가 들어선 문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모여 있었던 듯한 귀족들이 한꺼번에 나와 손뼉을 치고 있었다.
‘……없으니까, 아쉽네.’
신전에 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에서 몸을 숨기기에 좋았던 넓은 등이 절로 떠올랐다.
박수 소리가 사그라들 때쯤 그들 사이로, 눈에 익은 얼굴들이 한꺼번에 내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아르비체 님! 제가 곁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알비! 괜찮아?”
“어디 갔었어? 너, 다친 데는 없어?”
“알비! 이리 와 봐. 좀 보자.”
“그린 양, 괜찮으십니까?”
“아르비체!”
앨라이부터 라떼, 밀로라드, 르뮈에, 랑비엘에다 공주님까지 한꺼번에 날 향해 말을 걸어왔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들려오는 여러 명의 말 중 무엇에 가장 먼저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이 상황을 한꺼번에 정리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
뒤뚱뒤뚱한 걸음의 사내가 계단을 내려오자, 귀족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조아렸다. 블란테 공주가 계단으로 다가갔다.
“아바마마, 오셨어요?”
“우리 공주, 어디 한번 안아 보자.”
대머리에 아주 동글동글한 곰 같은 몸매를 하고 있는 그 남자는 두 팔을 넓게 벌려 공주를 품에 꼭 껴안았다.
그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주 급히 내려온 모양인지, 머리에 왕관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자주색의 슈트 차림일 뿐이라 겉으로 봐서는 그냥 고위급 귀족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러스트로 봤을 땐, 항상 왕관을 쓰고 있어서 머리가 조금이나마 있는 줄 알았는데.’
국왕이니만큼 우월한 유전자만 물려받았을 텐데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지.
난 나보다 돈도 많고 신분도 훨씬 높은 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연민을 가져 보면서 치맛자락을 살포시 움켜쥐고 뒤로 반 발짝 걸어 큰절을 올렸다.
다행히도 어설픈 내 인사는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국왕은 만면에 큰 미소를 그리며 흐뭇하게 날 바라보았다.
“그대가 오늘의 영웅이라는 아르비체 그린인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허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짐의 하나뿐인 소중한 딸을 구해 주었는데.”
국왕은 레이커스를 찾듯 잠깐 내 뒤를 살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듯 이내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우아하고 고상한 숙녀가 그렇게 대단한 실력까지 갖춘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격 솜씨는 어디서 그렇게 배웠지?”
“그것이…… 그냥…… 취미로 조금 배웠습니다.”
“그대같이 대단한 인재가 있어서, 짐이 그나마 이 큰 사건을 넘길 수 있었네. 정말로 고맙네, 정말로 고마워.”
제 딸을 구해 줬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내가 알던 캐릭터 설정대로 고압적으로 굴기는커녕 마냥 내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내 손을 꼭 쥐었다.
내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열 손가락 모두 반지를 낀 아주 화려한 손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알림창이 위로 밀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국왕 하탄 빅토르 아레나의 호감도 상승 이벤트
필요조건 : 매력 55 이상 충족]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매력이 40이고 거기에 함께 걸친 장신구들의 매력 부가 수치가 11이잖아. 장신구를 모두 합쳐도 매력이 51밖에 안 되는데…….’
고작 4포인트 차이로 호감도 상승 이벤트를 놓치다니.
아까워서 죽을 것 같다.
내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는데, 다시 한번 알림이 떴다.
[하탄 빅토르 아레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97/198)
호감도 이벤트 : 수호의 목걸이 개방]
‘……어라? 왜, 올라간 거지? 매력 수치가 모자랄 텐데……?’
분명히 아르비체 그린이라는 조연 중의 조연에게는 기본 부가 매력 수치는 전혀 없었다.
얼떨떨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내 눈이, 국왕이 꼭 쥐고 있는 내 손을 지나 손목에 가 닿았다.
[코르사주 : 매력+4]
‘……어쩜 좋아. 이걸 잊고 있었네. 이 작고 귀여운 코르사주가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돌아가면 샤인을 꼭 안아 주리라 결심하며,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