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1화
촉.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그와 내 입술이 떨어졌다.
레이커스의 손이 나를 받쳐 안듯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고개는 떨어졌지만, 그의 부드러운 숨결은 계속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입 안에 향긋한 브랜디의 내음이 자꾸 맴돌았다. 그냥 미약한 향기일 뿐인데도, 입술에 아주 조금 남은 향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퍼지는 듯한, 그래서 취기가 돌 듯 내 몸이 더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목 안이 간질간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영영 그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도리 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상한 대로 키스보다 더 숨 막히는, 사람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깜박, 깜박.
우리는 잠깐 말없이 시선을 나누었지만, 레이커스의 긴 속눈썹이 두 번 떨어졌다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이 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의 한계였다.
먼저 눈을 피한 건 나였다.
“아르비체.”
그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다시 그를 바라봐 줄 것을 종용하듯.
레이커스는 나를 ‘그린 양’이라고 부르는 대신, 아르비체라고 불렀다.
‘……착각이 아니었어, 총성이 들리기 직전에 그가 내 이름을 부르려 한 게 분명해.’
그 별것 아닌 차이가, 소스라칠 정도로 사람의 마음속을 헤집어 놓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뭐든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그니까, 이 정도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일까?
모든 것들이 너무 급작스러운 순간이 있다. 너무 많은 정보와 너무 많은 감정이 몰아닥치는 순간이 있다.
그러면 오히려 숨 가쁘게 쫓아가기보다는 아예 차분해진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모리슨 알터에게 죽음을 강요받질 않나, 눈앞에서 사람이 거미로 변하질 않나…… 게다가 지금은…… 레이커스로부터 키스를 받고…… 그리고…… 나를 아주 친밀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게 날 바라본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이 녹아 버릴 정도로.
‘……하아.’
난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푹 가라앉혔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빨리 뛰던 심장의 박동도 천천히 진정되었다.
“……일단, 이거 놔 주세요.”
“혼자 설 수 있겠습니까?”
“괜찮으니까, 이제 놔 주세요.”
몸을 똑바로 세우며 주위를 돌아보자, 예상했던 것처럼 거미의 사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 이 현상을 봤을 때는 정말 놀랐지만,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본래 <살인자들의 밤> 게임에서는 사체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체가 바로 사라지는 게임은 얼마든지 있으니.
왜 갑자기 형식이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다.
‘몬스터가 일정 시간마다 재소환되는 시스템이면 보통 그렇지. 시체가 계속 쌓이기만 하면 그래픽 처리가 어려우니까.’
난 내가 생각한 가설에 소름이 끼쳐서 팔을 쓱쓱 문질렀다.
‘……설마, 크리쳐가 계속 리필되는 건 아니겠지.’
게다가 왕궁 정원에 거미 사체가 떡하니 있는 게 파크 귀족들의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가뜩이나 다들 묘하게 히스테릭하고 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인데.
“……경비병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요?”
레이커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실종되었다고…… 생각하겠죠.”
‘……역시.’
바닥으로 내린 시선에, 떨어진 옷가지는 하나도 없는데 이상하게 머리카락만이 한 줌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잔디밭이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텐데, 다행히도 흙바닥이라 볼 수 있었다.
난 슬쩍 그걸 주워들거나 돋보기로 관찰하거나, 하다못해 폴라로이드로 좀 찍어 놓고 싶었지만…… 역시 너무 눈치가 보였다.
‘아이템이 있으면 뭐 해. 레이커스가 옆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아직도 내가 걱정되는지, 레이커스가 어린아이를 잡아 주듯 내 팔을 받쳐 주고 있어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어쩐지 사람이 정말 거미로 변한다는 것을 확인하자, 맥이 탁 풀렸다.
레이커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 줄곧 레이커스의 말을 믿어야 할지를 고민했으니까.
‘이제 그를 믿어야만 할까?’
내가, 첫날에 그에게 죽임을 당했음에도…… 게임을 하면서 수집한, 레이커스를 가리키는 증거가 그토록 많았음에도…… 그래도…… 그는 내게 이토록 솔직하게 진실만을 말했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처음에는, 그를 의심하는 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추리 게임의 플레이어로서 범인이라는 증거가 많은 그를 의심하는 건 당연했으니까.
내가 얼른 몸을 돌리는데, 레이커스가 날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평소에 나를 만질 일이 있더라도, 민망할 정도로 가볍게 만지는 그였다. 딱 결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무슨 잘못 건드리면 깨어지기 쉬운 유형문화재를 만지듯이.
‘조금 아픈데……’
무슨 일인가 싶어 그에게서 팔을 빼내려 하자, 레이커스는 제가 더 화들짝 놀란 것처럼 내 팔을 얼른 놓았다. 그러곤 내게서 한 발짝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가 이러는 건 처음이었다.
좀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레이커스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아르비체, 죄송합니다.”
‘또…… 또, 저렇게 부른다.’
그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내 심장에 좋지 않다.
“괜찮아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자, 레이커스가 제 눈을 가리며 다급한 듯 말했다.
“줄곧, 제가 그렇게 말했지요. 함께 기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좋다고.”
내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가락 사이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젠 다른 생각이 듭니다.”
“……무슨 말이죠?”
“너무 견디기 힘들면 그대도 잊어도 괜찮습니다.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는 레이커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깊은 그 눈동자는 어쩐지 평소보다 짙은 색처럼 보였다. 평소처럼 공포게임 속의 흐린 하늘을 닮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검은색이 섞인 혼탁한 잿빛처럼.
‘……저런 걸 본 적이 있어. 그의 방에서.’
그때, 그는 마치 정말 살인마라도 된 것처럼 득달같이 나를 공격했었다.
‘사소한 현상일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로 저 혼탁한 눈이 뭔가를 뜻하는 거라면…….’
나도 모르게 레이커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자, 그는 나를 더는 붙들지 않고 그저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곤 뭔가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이를 악다물며 중얼거렸다.
“……지금, 전 돌아가야 합니다.”
“……네?”
레이커스가 먼저 돌아간다고?
그가 돌아가면 나 혼자서 연회장의 그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야 한다. 사건의 당사자가 한 명인 것과 두 명인 건 주목의 정도가 다를 테니까.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과 별개로 레이커스가 돌아가면 증거를 마음껏 수집할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하지만 왜? 그리고 지금까지 날 혼자 둬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게 누군데? 근데 먼저 가겠다고?’
난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며 물었다.
“그럼 저도 같이 돌아갈까요?”
“……아닙니다. 마차는 두고 가겠습니다.”
“네? 저택까지 그 먼 길을 어떻게 가시게요?”
“얼마든지 빌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난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올 때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의 신분 앞에서 다른 귀족들도 길을 터 줄 정도이니, 쓸데없는 걱정이긴 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서 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커스는 날 걱정된다는 듯 조금 더 바라보다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은, 가면이 깨진 뒤 당분간은 다시 안 나타날 테니까 안심해도 괜찮습니다만…… 경비병들과 꼭 붙어 계십시오.”
“알겠어요.”
“그럼.”
레이커스는 몸을 돌려 정원 한쪽을 향해 걸어갔다.
척 보기에도, 왕궁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쪽 길이 아닌데…….
난 그를 불러 세우려다가 그만두었다.
레이커스는 공포 게임의 주연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스르르 사라지는 게 어울리지.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어떤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레이커스 저 사람, 아까 밧줄로 묶인 거 알아서 풀 수 있었던 거 아니야?’
공주님의 신병을 확보하고 나서도, 왕실 경비병들이 풀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 거……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얌전하게 굴었던 거 아니야?
너무 대단한 무력을 가진 사람은 왕정 사회에서 경계당하기 때문일까? 가뜩이나 국왕과 사이도 안 좋아 보이던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레이커스가 한층 더 요망해 보였다.
두근.
두근.
‘……아, 괜히 레이커스 생각했어.’
난 뒤늦게 내 심장이 크게 울리는 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아니야. 이건, 긴장했다가 겨우 괜찮아져서 그래.’
레이커스가 대체 왜 이렇게 후다닥 사라져 버린 건지도 궁금했지만, 그의 생각을 더 이상 떠올리는 것 자체가 힘에 부쳤다.
입술 안쪽 살을 살짝 깨물며 다른 생각을 하려 애쓰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난 얼른 아이템 창에 있는 돋보기를 꺼내 들었다.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에 그걸 들이대자, 정보가 떴다.
[왕궁 경비병23(실종자)의 머리카락 : 검정색, 장발.]
‘……이렇게 빨리 실종자로 분류되는 거구나.’
사진도 찍을 셈이었지만,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이대 봐도 너무 정보 값이 없었다. 거미라도 함께 찍으면 또 몰라.
10장밖에 없는 필름을 이런 곳에 낭비할 수도 없어서 머리카락 몇 가닥을 집어 아이템 창에 일단 넣어 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리어먼드가의 지하 감옥이 필요 없을 정도로 빨리 변하지 않았나? 개체마다 차이가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고개를 드는데, 덤불이 우거진 코너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비체 님, 레이커스 님!”
“어디 계십니까?”
“아르비체 님께 국왕 전하께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찾으십니다!”
“아르비체 님! 무사하신 겁니까!”
‘……왜 이 나라의 그렇게 대단하신 공작님보다 나를 더 찾는 건데?’
국왕이라니. 이 게임에서 국왕은 정말 유명무실한 존재다. 대체 얼굴을 왜 비치는 거며, 나한테는 왜 인사를 하는데……?
조용히 사는 것도 이제 다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하다.
난 레이커스를 먼저 돌려보낸 것을 조금 후회하며, 내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매력 수치가 너무 많이 붙은 드레스를 산 걸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