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90화
난 무기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가서 몸을 구부렸다.
눈에 띄는 것들은 레이커스의 방에서 봤던 몸통이 목재인 기다란 총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총신이 짧고 몸통이 작은, 내가 쓰는 것과 비슷한 리볼버들도 있었다.
난 그것을 집어 들려고 손을 뻗다가, 문득 귀족들이 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앨라이 쿠스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푸른색인 그의 눈 속에 분노와 무력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내가 걱정되어서 죽기라도 할 것 같은 그를 지나 옆을 바라보자 슈트 차림을 한 여자 삼인방이 눈에 들어왔다.
라떼와 르뮈에, 밀로라드도 앨라이 못지않게 내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눴던 모니카도, 그리고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본 적 없는 귀족들도 하나같이 손을 모으고 신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목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이 게임의 목표였다면, 진짜 당장 배드 엔딩이다.’
난 DAY 1에 결심했던 애당초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며 총을 줍고 일어나려다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귀족들 사이를 바라보던 나는 아까, 내가 마음에 걸린다고 생각했던 게 뭔지 알아차렸다.
‘……저 사람은?’
귀족들 사이, 창가 가까운 곳에 주저앉아 있는 여인을 분명히 본 적 있었다.
밀로라드가 내게 보여 준 사진에서. 모리슨 알터와 지나와 함께 있었던 여자.
‘모리슨 알터의 부인…… 지나의 엄마. 저 사람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난 내가 잘못 본 걸까도 생각했지만, 지나와 좁은 이마와 톡 튀어나온 입술 모양이 똑 닮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지나는 엄마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는다고 했어.’
번개처럼 이 상황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모리슨 알터는 지금 협박당하고 있는 거야. 테러범 노릇을 하지 않으면 부인을 죽이겠다고.’
나는 모리슨의 부인 바로 옆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바로 옆에는 커튼이 있었는데, 아주 유심히 살피자 커튼의 그림자에 사람이 한 명 서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납치범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자는 모리슨의 부인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교묘하게 풍경에 녹아들어 있었다.
난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절망에 빠진 척하며 긴 레이스 장갑을 슬쩍 벗었다.
도대체 납치범이 왕궁에 어떻게, 왜 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지가 눈앞에 나타난 이상, 그것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다.
‘가면의, 이마의 정중앙. 거기를 노리라고 했어.’
기회는 딱 한 번, 그게 실패하면 다음은 없었다.
‘내가 철저히 그늘에 숨은 자신을 발견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게다가 레이커스의 총알도 아닌 일반 총알로는 타격을 받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있겠지.’
그 방심의 틈을 노려서 딱 한 발의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게 전부였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무기 중에서 하나를 골라 드는 척하며, 아이템 창에 있는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여섯 개의 총알이 모두 차 있는, 계속 연습해서 이젠 익숙한 리볼버의 손잡이가 손안에 착 감겼다.
난 레이커스가 내게 알려 준 것들을 전부 다 떠올렸다.
오른손잡이라 왼쪽으로 쏠리는 것을 신경 써서, 반동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총을 너무 세게 쥐지 말고, 가면의 이마 쪽 정중앙을 조준해서…….
‘……쏜다.’
난 고개를 듦과 동시에 순식간에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내가 저를 향해 몸을 일으킬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는지, 납치범은 나를 봤을 텐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탕! 탕! 탕!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납치범과 내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방심이었다.
완벽한 조준이었다. 세 발의 총알은 다 정확히 가면의 이마 정중앙을 뚫었다.
파삭.
전에는 몇 발을 쏴도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가면이 깨어졌다.
“크아아아악!”
홀이 다 울릴 것 같은 기괴한 고함 소리에, 연회 홀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놈에게 쏠렸다.
“크악! 크아악, 어떻게……! 레이커스, 네놈이…… 네놈이 이걸 계획했나……?”
기묘한 비명과 함께, 놈의 모습이 무너지듯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몸의 형체가 녹아 없어지듯, 옷만 풀썩 떨어져 내리는 기묘한 모습에 귀족들 사이에 싸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래도 한번 경험해 봤다고 제법 경황을 차릴 수 있었다.
그자의 최후를 구경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난 재빨리 몸을 뒤로 돌리며 다시 한번 총을 겨눴다.
“모리슨 알터, 지금 당장 블란테 공주님을 놓아주시죠. 당신의 부인은 해방됐습니다.”
모리슨 알터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잠깐 동안 눈알을 굴리며 제 부인이 있는 쪽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풀썩.
그때, 겨우 인질로 잡혀 있다가 놓여난 모리슨의 부인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여, 여보!”
모리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총을 바닥에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총신이 공주에게서 벗어난 순간, 지금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대기하고만 있던 왕실 경비병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쏜살같이 움직여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개자식!”
“어디 감히 공주님께 손을 대?”
“그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나?”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모리슨은 경비병들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기절해 버렸다.
그리고 경비병 중 한 명은 그러는 사이에 모리슨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열쇠로 레이커스의 족쇄를 풀어 주고, 밧줄을 끊어 주었다.
레이커스는 밧줄이 풀리자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튕겨 나가듯 달려갔다. 부지불식간에, 그가 납치범이 서 있던 곳까지 달려가 창문을 넘어갔다.
쐐애애애액-!
그때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그것도 수차례 들어 본 적 있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주위를 둘러본 나는 그 소리가 레이커스가 달려 나간 쪽 방향의 창문 너머에서 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소리와 함께 긴장이 풀렸는지 공주가 바닥에 주저앉자, 다른 귀족들도 모두 제각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주와 내게 달려왔다.
“공주님!”
“아르비체, 괜찮아?”
“아르비체 님!”
하지만 난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물음에 대답해 주는 것보다, 레이커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난 순식간에 몰려든 귀족들이 만든 혼란한 상황을 무시한 채 테라스의 창문을 넘었다.
쐐애애액-!
정원 잔디를 밟는 순간, 소리는 더 가까이에서 들렸다.
“……살…… 살려…… 살려 줘…….”
그리고 다른 소리도 섞여 들렸다.
‘이건 마치…… 지하실에서 들려왔던 소리 같아.’
난 오한이 끼쳐 양팔을 손으로 감싸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높은 덤불 벽을 지나 코너를 도는 순간이었다.
거기에는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경비병의 옷을 입고 있는.
아니,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자는 온몸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소매에서 긴 다리 하나가 삐죽 솟아올랐다.
반대쪽 소매에서도 기이하리만큼 긴 다리가 솟아올랐고, 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자 옷이 찢어지며 겨드랑이에서도 하나의 팔이 또 솟아올랐다.
옷이 감당할 수 있는 부피보다 훨씬 더 커진 크리쳐는 옷을 모두 찢어발기고 네 쌍의 다리로 정원의 가운데에 우뚝 섰다.
나는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정말이었어.’
정말로 거미 크리쳐는 인간이 변해서 된 거였다.
그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광경을 넋을 빼고 바라보는 동안, 꾸르륵 소리를 내기 시작한 그 거미 크리쳐는 어느새 제 몸을 다 완성했다.
몸을 제대로 지탱하고 선 그 거대한 생물은 새까만 눈 여러 개로 주위를 둘러보며 먹잇감을 탐색했다.
꾸르르륵.
쒜에에엑.
기괴한 소리를 내던 그 입이 오물거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뛰어오른 거미가 나를 향해 뛰쳐 들었다.
리볼버를 꺼내서 막 안전장치를 해제하려는 순간, 검은 검이 번뜩였다.
절반으로 갈라진 몸뚱이가 반으로 자른 사과처럼 양쪽으로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쿠웨에에에엑-!
괴로워하는 신음과 함께 반으로 나뉜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쿵.
바닥이 묵직하게 울렸다.
‘악몽 같아.’
이 모든 순간이 악몽 같았다.
사람이 거미로 변하는 것도,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행복하던 왕궁 연회에서 이런 끔찍한 장면을 봐야 하는 것도.
차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단면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데, 검을 한차례 허공에 털어 낸 레이커스가 그것을 갈무리하듯 왼팔 아래쪽으로 밀어 넣었다.
정신적으로 갑자기 너무 지쳐서, 검집도 없이 칼을 매번 어디다 넣는 건지에 대한 궁금증마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한 고비를 넘겼다는 기쁨도 들지 않았다.
‘……모리슨 알터 사건도 힘들게 해결했는데. 굳이 레이커스를 쫓아와서 이 꼴을 보다니. 내가 왜 그랬을까?’
진실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기쁨보다는 끔찍한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기운이 쭉 빠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순간, 레이커스가 갈급하게 날 끌어안았다. 그는 내가 괜찮은지 살펴보더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 지친 눈을 봤을까?
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고 아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정말 잘했습니다.”
그런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칭찬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 말이 뭐라고 속이 울컥했다.
긴장 상황에서 갑자기 풀려나서 그런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많이 걱정했습니다.”
괜찮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썹이 스르르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를 덮었고, 그가 목이 말라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제 입술로 내 입을 덮었기 때문에.
지난번의 도둑 키스가 아주 향긋하고 부드러운 것이라면, 이번의 키스는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짙고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