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8화
플로어 주변에 선 구경꾼들에 가까워진 순간 사람들이 속삭이는 말이 들려왔다.
‘리어먼드 공작님께서 연회에 나와서 춤추는 거, 나 처음 봐.’
‘원래 안 추시잖아. 우아하게 웃고 계시기만 하고, 아무리 청해도 안 받아 주셔.’
‘정말 아르비체 님이 어지간히 좋으신가 봐. 공작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폈어.’
‘아르비체 님도 진짜 대단하신 분이고, 솔직히 그분쯤 되니까 저렇게 사랑받는 거다 싶긴 한데…… 그래도 너무 부러워 죽겠다니까.’
레이커스와 내가 같이 춤을 추는 사이에, 난 문득 내 옆에서 함께 춤추던 이들 중 몇 명은 아예 우리에게 공간을 내주고 플로어에서 나가는 것을 눈치챘다.
왜 그러는 건지 궁금했는데, 구경꾼들의 대화 속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근데 다른 커플들 좀 불쌍하지 않아? 레이커스 님 옆에서 춤추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아.’
‘저 팀도 퇴장한다. 이제 세 팀 남았어.’
난 혀를 찼다.
뭇 귀족 남성들을 모두 한순간에 불쌍한 처지로 만들어 버린 레이커스는 그런 말들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부드럽게 웃고만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음악을 가늠하듯 고개를 잠깐 들었다가 내게 재빨리 팁을 알려 주었다.
“마지막에는 제 리드에 따라 한 바퀴 돌고 나서, 왼팔을 위로 드시면 됩니다.”
‘마치 주부 노래 교실의 강사 같아.’
노래 소절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알려 주는 솜씨가.
난 내가 떠올린 말이 웃겨서 미소를 머금고 발을 움직였다.
딴 딴따란 따- 딴 딴따란 딴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음악이 끝을 고했다.
레이커스가 다리로 크게 호를 그리며 날 안듯이 그의 품으로 살짝 끌어당겼다가, 그의 왼팔을 들어 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게 했다.
난 그가 미리 일러 준 대로 왼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레이커스도 나와 맞잡은 손의 반대쪽 팔을 위로 들고 있다가 부드럽게 팔을 내리며 인사했고, 난 눈치껏 그에 맞추었다.
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거기에는 경박한 휘파람 소리도 몇몇 섞여 있었다.
난 그만 그 박수 소리에 맞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춤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핑그르르 돌면서 춤을 춰 댄 것도 우스웠고, 관심도 없던 춤을 얼떨결에 열심히 추게 된 것도 우스웠고, 그리고 레이커스가 매번 남몰래 적절히 일러 주는 것도 너무 웃겼다.
“재밌었습니까?”
난 부드럽게 날 보며 물어보는 그에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었어요.”
“여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온 보람이 있군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커스의 미소가 너무 상냥해서, 난 그만 그에게서 시선을 떼야 한다는 것을 잊고 그의 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야 말았다.
샹들리에 빛에 비친 레이커스의 눈은 마치 은색처럼 보였다. 그 눈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나는 더욱더 시선을 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제 말을 좀 들어 주실 겁니까?”
레이커스의 그런 말에도 도망가는 법을 잊고 가만히 기대서 있을 만큼, 넋을 놓고 있었다.
“아르비체…….”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탕!
연회장에서 들려서는 안 될 총성이 귀청을 찢어 놓을 듯 요란하게 울렸다.
처음 한 발에는 나도,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도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탕! 탕!
하지만 이어지는 총소리에 그제야 다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 반나절도 이어지지 못한 향락과 평화는 그렇게 순식간에 깨어졌다.
“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연회장에 있던 귀족과 일꾼들 모두가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새된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정말 놀랐다. 아무리 마음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지만, 정말로 왕궁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무섭기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왕궁 한가운데서 총성이라니……?’
분명 평화롭기는커녕 공포스러운 사건만 잔뜩 벌어지는 파크 속이었지만, 이런 막장 전개는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자, 레이커스가 제 몸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난 그의 품에 꽉 안긴 채로, 주변을 황급히 둘러봤다.
‘……어디서 들린 거지? 레이커스는 나와 함께 있으니…… 이건 납치범의 소행인가?’
그때 이 와중에 몸을 숙이거나 낮추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총을 치켜들고 있는 단신의 사내가 보였다.
붉은색의 공허해 보이는 묘한 가면을 쓰고 있던 사내는, 홀에 정적이 찾아들자 가면을 벗어 던졌다.
난 본 적 있는 얼굴에 깜짝 놀랐다.
연회장을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 그 인물은, 납치범이 아니었다.
지나에게서 본 적 있는 개나리색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다 해지고 떨어진 옷차림도 여기 있는 귀족들의 것과 대비되어 아주 참혹하게 보였다.
무엇보다도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 서린 기묘한 공포심 같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모리슨 알터? 우편배달부?’
트리버 경감이 범인이라고 콕 집어 지목한 바로 그 사람.
그리고 한 명 더,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 가려서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모리슨 알터의 품에 블란테 공주가 붙들려 있는 게 보였다.
모리슨이 들고 있는 총의 총구가 공주의 관자놀이를 향해 있는 것도 보였다.
블란테 공주는 괴한이 제 목을 조르고 있는 상황에 기절할 것처럼 보였지만, 어떻게든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덜덜 떨며 이를 악물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당당해 보였던 공주의 평소 얼굴과 너무 달라서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난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리슨 알터는 실종된 것 아니었어? 도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야? 게다가 범인도 아닌데 왜 저런 짓을 하고 있는 거며…….’
게다가…….
‘도대체 이 왕궁의 삼엄한 경비를 어떻게 뚫고 공주 바로 옆까지 접근한 거지?’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블란테 고, 공주님의 목숨이 아까우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경비병들 모두 무기를 버, 버, 버려! 그, 그리고 바, 바짝 엎드려!”
모리슨 알터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주의 목숨을 가지고 하는 위협이다.
텅, 텅.
연회 홀의 벽을 따라 죽 늘어서 있던 경비병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제히 무기를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너, 너……! 거기, 너…… 무기를 모두 내 발밑에 가져다 노, 놔!”
그가 시녀 한 명을 지목했고, 시녀는 벌벌 떨며 일어나서 여기저기 바닥에 널린 무기들을 모두 한데로 모았다.
그때 무기가 모두 정리되자, 모리슨 알터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고, 고, 공작님께선 이쪽으로 나오시죠.”
그 와중에 존댓말을 쓰는 것도 이상했다.
그냥 습관적인 거겠지만, 그 말투에서 모리슨 알터가 레이커스에게 직접적인 반감을 품어서 불러낸 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나를 꽉 끌어안고 있던 레이커스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이커스만을 골라내는 걸 보면 이건 날 납치했던, 그 납치범이 계획한 일인 것 같아.’
그는 다른 누구보다 레이커스를 경계하는 눈치였으니까. 날 납치해 가면서까지 레이커스를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을 정도로.
레이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역시 레이커스는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총을 들고 공주를 위협하는 범죄자 앞으로 나가는 마당에, 레이커스는 내가 걱정인 모양이었다.
난 그의 여유 있는 태도가 황당하기도 하고, 나부터 걱정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해서 잠깐 망설이다가 그의 말을 되돌려주었다.
“……조심하세요.”
그는 이 상황에서도, 내 말이 듣기 좋다는 듯 작게 웃었다.
‘……진짜 당황스러워.’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그 때문에 내 속이 다 울렁거렸다.
“뭐, 뭐 하는 거죠? 나, 나오십시오!”
모리슨이 다시 한번 고함을 치고서야 레이커스는 몸을 훌쩍 일으켜서 양손을 들어 보이며 그가 지정한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여, 여기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들어 올려 주시죠.”
“왜 나를 경계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난 착한 일만 하며 살아온 선량한 귀족인데.”
“제, 제 말을 따라 주십시오. 무릎을 꿇어 주, 주십시오.”
덜덜 떨리는 목소리의 협박범과 여유가 만만한 피해자라니. 균형이 안 맞다.
모리슨 알터가 턱짓한 곳까지 간 레이커스가 무릎을 꿇자, 모리슨 알터는 근처에 있는 하인을 시켜 레이커스를 단단히 묶도록 했다.
“바, 밧줄 틈으로 동전이 들어갈 때마다 고, 공주가 아, 안 좋은 꼴을 당할 거야.”
하인은 울상이 되어 밧줄을 들고 레이커스에게 다가갔다. 레이커스는 어깨를 으쓱하곤 묶기 좋도록 양손을 모아 주었다.
하인은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레이커스를 꽁꽁 묶었다.
모리슨의 지시는 꽤 상세했고, 하인은 그의 지시대로 레이커스의 손목을 뒤로 돌려 한 번, 발목끼리 한 번, 손목과 발목을 엮어서 한 번을 더 묶었다.
“그리고 이것도, 손에 채워!”
모리슨 알터가 쇠로 된 무언가를 발로 차서 하인 쪽으로 밀어 줬다.
멀리서 보기에도 도저히 저대로는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한들 반항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거기에다가 더해서 커다란 추가 달린 수갑을 더 채우자 이제 정말 움직일 수 없어 보였다.
‘공주님에다 리어먼드 공작님까지…… 모리슨,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우리, 살아나갈 수 있는 거야……?’
‘거 봐,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라고 했잖아.’
여기저기서 불안함에 가득 찬 속삭임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