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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87화 (87/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7화

난 좀 당황해서 황급히 레이커스를 돌려세웠다.

그는 내가 뭘 보고 서 있던 건지 궁금한 눈치였지만, 내가 그의 팔짱을 끼고 얼른 몸을 끌어당기자 별 저항 없이 몸을 돌렸다.

“이야기는 잘 나누고 오셨어요?”

레이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국왕 전하와 제 사이에, 잘 나눌 이야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공주님과 전하께서 환담을 나누는 걸 보고 왔습니다.”

그의 말투에서, 엿들었던 통화의 내용이 절로 연상되었다.

국왕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음에도 국왕이 그를 어지간히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파크에 도움되는 일을 많이 하고, 수납장이 모자랄 만큼 표창을 받은 사람인데 왜 저렇게까지 국왕과 사이가 안 좋은 거야?’

그리고 사이가 안 좋다면 둘 다 서로를 안 좋아하는 게 보통인데, 국왕만 일방적으로 레이커스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또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치고는 왕궁 연회에도 초대하고, 파크에 몇 대 보급되지도 않은 것 같은 핫라인 전화까지 설치하는 걸 보면 또 완전히 멀리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딸을 주기 싫어하는 아빠의 태도로 보기에도, 국왕과 공작의 관계로 보기에도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고개를 갸웃하는데, 레이커스가 침묵을 틈타 뒤를 슬쩍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귀족들 사이에서, 산호 모양의 새하얀 관을 쓴 앨라이 쿠스는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아마 그를 발견한다면 모니카를 발견하는 건 금방일 거다.

“앗, 저기!”

난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아무 방향으로 손가락을 뻗으며 소리쳤다.

레이커스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네?”

“저…… 저기…….”

내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웅얼거리자, 레이커스가 나의 곧게 뻗은 손가락의 끝을 바라보더니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린 양께선 왕궁 연회가 로망이라고 하셨지요. 당연히 춤도 춰 보고 싶으실 텐데,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네? 그런 게 아니…….”

“그럼, 뭘 가리키신 거죠?”

난 내 손가락 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건 정확히 댄스 플로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댄스 플로어에는 여자 남자가 쌍쌍으로 화려한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 미리 연습이라도 하고 오는 건지, 아니면 귀족의 기본 소양인 것인지 빠른 춤곡에 맞춰 둥글게 선 무리가 같은 춤을 추는 게 썩 보기 좋았다.

똑같은 박자로 발을 구르며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그리고 반 바퀴씩 돌았다가 파트너를 바꾸는 동작은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굉장히 동작이 복잡한 강강술래 같기도 하고.

‘아이돌 칼군무 저리 가라네.’

“가시죠.”

“……네? 그…… 저기, 정말로 해 보고 싶긴 했는데, 제가 저걸 어떻게 해요.”

마음에도 없는 ‘해 보고 싶다’는 소리를 하며 시간을 끄는데, 레이커스는 그게 내 진심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날 달래 주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니, 고맙긴 한데…… 이럴 때도 배려해 주지 말라고.’

흘끗 뒤를 살폈다. 앨라이 쿠스와 모니카는 테라스로 가서 이야기를 마저 나눌 셈인지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시간을 아직 좀 더 끌 필요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망신 좀 당하는 게 대수야?’

레이커스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별도리 없이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의 소매를 어정쩡하게 쥐었다.

그가 픽 웃으며 내 손을 제 팔에 고쳐 올려 주었고, 우리는 댄스 플로어 쪽으로 걸어갔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아마도 레이커스의 잘난 외모 때문일 거다.

잘 어울린다느니 하는 감탄사들이 들렸지만, 그런 건 그냥 하는 소리일 거다. 내게 쏟아지는 시선의 의미는 부러움이겠지.

난 내 옆에 선 남자가 얼마나 반짝이고 얼마나 잘생겼는지 내도록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레이커스에 대한 의심 없이, 그냥 순수하게 감탄할 수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며 한숨을 삼키는 동안, 빠른 박자의 춤곡이 멈추고 댄스 플로어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레이커스는 나를 이끌고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무대에 자리 잡았다.

얼떨떨하게 서 있는 사이에, 새 곡의 시작을 알리는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릿한 박자의 음악이었다.

난 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음악…… 어딘가 끈적하지 않아……?’

이런 음악에 어울리는 춤이 어떤 것일지는 뻔했다.

난 부담스러움에 깜짝 놀라 레이커스를 올려다보았다.

레이커스와 딱 달라붙어 춤을 춰야 한다니……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아니, 그게…… 방금까진 이런 곡이 아니었잖아요.”

“그쪽이 훨씬 더 어려우실 텐데요. 아까의 것은 탱고고, 지금 곡은 왈츠곡입니다.”

“……두 개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요.”

레이커스의 목소리에서 웃음소리가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거다.

그는 내가 춤을 잘 못 춰서 걱정한다고 생각했는지, 날 달래듯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처음에 인사할 때 제게 한 걸음 반 다가와서, 오른손으로 제 왼손을, 왼손을 제 팔 위에 얹기만 하시면 그 뒤는 제가 리드할 겁니다.”

“……그게 아니라.”

하지만 내가 뭐라고 더 말을 하기도 전에, 나를 재촉하듯 음악의 볼륨이 점점 커졌다.

바이올린의 선율이 느릿하게 이어지자, 다른 현악기들이 거기에 소리를 얹었고, 이내 아주 로맨틱하기 짝이 없는 연주가 홀을 가득 메웠다.

레이커스가 내게서 몇 걸음 떨어져 부드럽게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양팔을 벌려 나를 맞이하듯 섰다.

어쩔 줄 모르는 머리 한구석으로 그가 내게 남긴 말이 간신히 기억났다.

나는 다른 커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얼떨떨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반.

그리고 오른손으로 레이커스의 왼손을, 왼손을 레이커스의 팔 위에.

“잘했습니다.”

레이커스의 칭찬이 들린다 싶더니, 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게 나를 리드하며 움직였다.

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그에게 끌려가듯 왼쪽으로 한 걸음, 뒤로 세 걸음을 걸어,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건 내 춤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팔에 얹은 내 왼손 아래로, 레이커스의 오른손이 내 허리를 아주 정중하게 받쳐 안 듯 안고 있었는데, 그곳에 온 신경이 쏠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우.’

그리고 겹쳐 쥔 오른손은 또 어떻고.

난 아주 얇은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그건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았다. 레이커스의 체온이 내 손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몸을 오른쪽으로 한번 기울였다가, 몸을 반 바퀴 돌렸다가, 다시 부드럽게 몇 걸음을 걸어가는 동안 시야가 아주 느릿하게 회전했고, 댄스 플로어를 둘러싼 귀족들의 선망 어린 시선이 내게 와 꽂히는 게 느껴졌다.

지금 이 상황이 불쾌하진 않았다.

불쾌하기보다는…… 불편했다.

‘……너무 가까워.’

바로 앞에 레이커스의 가슴팍이 있었다. 고개를 조금이라도 숙이면 거기에 얼굴을 기댈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어쩔 줄 모르고 그에게 맞춰 발을 놀리는데, 레이커스가 내게 속삭였다.

“제 발에 의식적으로 발을 맞춰 보시면 더 재밌을 겁니다.”

‘재미……? 지금 이 상황에 재미……?’

난 좀 기가 막혀서 그를 노려보려다가, 그가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날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때로 이상할 정도로 쉽게 침울해지곤 하는 그의 잿빛 눈동자에는 상냥함이 스며 있었고,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궁금한지 날 빤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

난 그제야 레이커스가 나를 이 연회에 데려온 게, 정말로 이곳을 즐기게 해 주려는 의도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지금, 내가 춤을 즐겼으면 해서…… 그래서 저러는 거야.’

그래, 지금 레이커스의 표정은 내 취향에 꼭 맞는 브랜디를 찾아 줄 때나 밀크티를 타 주며 흐뭇해할 때의 그 표정이었다.

그는 사소한 것들이 삶을 지탱해 준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도…… 내가 즐길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을 찾길 바라서, 이렇게 배려해 주는 거야?’

나는 하도 깨물어서 얼얼한 입 안쪽 살 대신 윗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모처럼 화장까지 하고 나왔는데, 입술 화장이 다 지워지겠다는 걱정 같은 건 나중에나 들었다.

마음속이 또 울렁거렸다. 작은 조각배에 탄 채로, 대비조차 하지 못하고 큰 풍랑을 맞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절없이.

‘……생각하지 마.’

마음에도 브레이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이는, 평소보다도 훨씬 더 반짝반짝하는 남자와 함께 춤을 추면서, 그의 믿을 수 없이 상냥한 배려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마음을 단호하게 붙드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흔들려서 그래.’

몸이 우아하고 부드러운 박자에 맞춰서 흔들리니까, 그래서 마음이 이렇게 출렁이는 거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나는 레이커스가 권한 대로 발놀림에나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다른 것에 신경이라도 쏟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

‘……정말 잘 추긴 잘 춘다.’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레이커스는 정말로 능숙하게 날 리드하고 있었다.

몸이 빙글빙글 돌 때는 스텝을 전혀 모르는 날 위해서 팔에 힘을 주어 날 살짝 들어 올리다시피 해내 발이 꼬이지 않도록 해 주었고, 앞이나 뒤로 움직일 때는 내 발을 밟지 않도록 반 박자 빠르게 은근한 신호를 줘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사적으로 그와 동작을 맞추게 유도했다.

바짝 신경을 쓰고 있자, 나는 몇 가지 동작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오른쪽으로 다섯 걸음, 왼쪽으로 크게 세 걸음…….’

내가 발에 힘을 주어 제대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자, 레이커스의 동작이 더 커졌다.

그러자 빙글빙글 돌 때마다 새하얀 내 치맛단이 레이커스의 다리를 감쌀 정도로 넓게 펼쳐졌고, 의상실 사장님이 추가로 붙여 둔 진주와 스팽글들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재밌어.’

난 내가 한 생각에 깜짝 놀랐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과 함께 춤을 추면서 떠올린 감상이 ‘재밌다’라는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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