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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85화 (85/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5화

리베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날 바라봤다. 아무래도 라떼, 밀로라드, 르뮈에가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이들이다 보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내게 한 짓이 있는데 먼저 와서 선뜻 이야기를 걸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꾸 이쪽을 바라보는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내가 먼저 리베아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기도 모호했다.

“자꾸 어딜 보는 거야? 자자, 봐. 짧은 재킷과 시곗줄 장식으로 꾸며 봤어. 어때? 올해 사교계를 강타할 여성 패션으로 어때 보이냐고.”

하지만 리베아에게 더 신경을 쓸 틈도 없이, 라떼가 내게 말을 쏟아냈다.

난 다시 내 테이블에 앉은 삼인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응, 너무 잘 어울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라떼의 조그마한 키와 슈트 차림에다 시곗줄 장식이 너무 귀엽게 잘 어울렸다.

“이렇게 셋이 옷을 맞춰 입는 이벤트가 있으면 나한테도 말해 주지 그랬어.”

라떼가 내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

“이벤트라고? 이건 반항이야! 저항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르뮈에와 밀로라드가 한숨을 쉬며 말을 얹었다.

“라떼의 할머니가 왕궁 연회에서 만나 보라고 파트너로 소개해 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저래.”

“근데 우리도 왕궁 연회 같은 곳 사실 안 좋아하거든. 쓸데없는 파리가 꼬이니까. 하지만 놀러 오곤 싶으니까 동참해 본 거야.”

‘진짜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난 라떼를 가엾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잘했어.”

하지만 라떼는 아직도 분개했다.

“남자한테 사랑받는 결혼이 더 행복하다고들 하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날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라고.”

난 멀뚱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기야 하지만, 게임 속에서도 그런 말이 있다는 게 신기해서.

라떼는 얼른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거 생각해 보면 너무 이상하지 않아? 여자가 약자니까, 상대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잖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지 않으면, 내가 수입이 없거나 몸이 약해져 있을 때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그거.”

“……그래서?”

“게다가 정말 최악인 건, 남자한테 사랑받는 결혼이 보편화되면서 이거 봐, 남자들이 얼마나 대충 생겼고 대충 꾸몄는지!”

난 왕궁 연회에 참석한 여자와 남자 모두 다들 열심히 꾸미고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라떼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해 보이자, 라떼와 밀로라드 그리고 르뮈에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르뮈에가 라떼의 어깨를 짚었다.

“우리가 이렇게 설명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 응? 아르비체의 파트너는 리어먼드 공작님이잖아. 공감을 받을 수 있겠어?”

밀로라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르비체가 이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 옷차림을 뭐 관심 있게 구경이나 해 봤겠어? 레이커스 님께서 왕궁 연회에 참석한다고 옷을 새로 맞췄다는 소식이 돌았을 때, 상인 길드가 다 들썩였는데.”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옷을 새로 맞췄을 거라고 생각해 보질 않았다. 어차피 공작이니까 옷도 엄청 많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저번에 내가 부티크에 갔을 때 제 옷을 구경할 생각도 안 할 정도로 별로 옷에 관심 없어 보이던데…….’

라떼가 날 부럽다는 눈으로 보며 중얼거렸다.

“아르비체 머리카락 색에 맞춰서 슈트 고르신 거겠지? 진짜 너무 로맨틱하시다.”

르뮈에와 밀로라드가 한숨을 푹 쉬며 맞장구쳤다.

“그러니까 말이야.”

“남자들이 다들 레이커스 님만큼만 했어 봐. 내가 드레스도 입고, 구두도 신고, 머리도 하고…… 머리에 돈도 꽂고 다닌다.”

라떼가 손을 저었다.

“밀로라드, 다른 사람들은 돈보다 꽃으로 치장을 하곤 해.”

“……내가 그걸 몰라서 그래? 농담한 거잖아?”

“넌 그저 돈밖에 모른다니까!”

“그럼 넌 꽃 달고 다니든가!”

평소엔 중재하는 역할이던 밀로라드가 열을 올리며 라떼와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니, 그녀도 꾸미는 역할을 도맡는 게 어지간히 싫긴 했던 모양이었다.

난 내 옷차림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셋의 말에도 공감을 해서 작게 웃었다.

그때, 르뮈에가 문득 내게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너 혹시 아는 거 있어? 레이커스 님이랑 경시청이랑 친하잖아.”

“어떤 것 말이야?”

“아까 오면서부터 느꼈는데, 오늘따라 연회 경비가 너무 삼엄하더라고. 왜 그런지 알아?”

르뮈에의 말에, 라떼와 밀로라드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고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난 뭐라고 할지 잠깐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날 납치했던 범인이, 여기에서 뭔가를 벌일 계획이었는지도 몰라.”

셋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범인이?”

“여기서?”

“그럼 큰일 아냐?”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은 내가 돌아왔으니까. 범인이 협박할 인질이 사라졌잖아.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

“그런데 다들 이렇게 태연하게 연회를 즐기고 있어도 괜찮은 거야?”

“안전 불감증도 정도가 있지. 국왕 전하께선 이 일을 아시는 거야?”

“응. 경찰이 아니까, 국왕 전하도 아시겠지.”

난 레이커스의 전화를 몰래 훔쳐 들은 것을 숨기면서 대답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국왕 전하께서 그렇게 대처하시니까, 파크의 경찰이 그렇게 못 미더운 거 아냐.”

라떼의 불평에 나머지 둘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좀만 놀고 일찍 들어가야겠는데.”

“맞아. 아는 사람들에게도 대충은 이야기해 둬야겠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이 지금 국왕 전하를 만나러 가 계신데, 아마 그 이야기도 할 거예요.”

“응.”

“다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고 계세요?”

불쑥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어 고개를 들자, 새까맣게 잊고 있던 리베아가 우리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며, 그녀는 내게 말했다.

“저번에, 우리 봤죠?”

“네?”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난 리베아의 눈에 어린 긴장감을 눈치챘다.

문득, 난 그녀가 내 테이블의 다른 세 명이 아니라 나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세 명에게 관심이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돈 없고 빽 없는 집안에서 자란 여자가 그나마 성공하는 길이라 봐야 입주 가정교사 하는 거죠.’

저번에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아직 잊히질 않는데, 어쩜 저렇게 나올 수가 있을까?

‘정말, 권력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라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잠깐 망설이는데, 밀로라드가 리베아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논 백작가와는 오래 거래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가씨와도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겠죠?”

리베아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네?”

“알비는 저희 친구라서, 제 친구한테 계집이니 뭐니 하는 소리까지 퍼부으신 분을 연회장에서 보고 있을 마음은 없네요. 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온화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서릿발 같았다.

밀로라드뿐만 아니라 라떼와 르뮈에도 서늘한 눈으로 리베아를 쏘아보았다.

갑자기 내가 유명세를 타는 것 때문에 내게 존대까지 해 가며 친한 척 접근한 모양이었지만, 리베아의 인내심은 거기서 끊어진 모양이었다.

“……그, 그때는 미안했다고 이미 사과했잖아. 아직도 그걸 가지고 꽁해 있는 거야?”

“꽁해 있지 않아요. 그냥, 굳이 어울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사람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거 아냐!”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구둣발로 바닥을 쿵쿵 울리며 멀어졌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멀어지는 그녀를 따라가는 게 여기서도 느껴졌다.

‘말로 일어선 사람은 말로 망한다는 게 맞는다니까. 그러게, 말조심 좀 하고 다니지.’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넌 좀 더 단호할 필요가 있어.”

“그래, 알비는 사람이 좋아서 큰일이야.”

“알비의 그런 점을 좋아하긴 하지만.”

난 문득 슈트를 입은 세 명의 친구들이 날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들은 내겐 그냥 호감도 쌓기 어려운 캐릭터들일 뿐이었는데…….

고마움에 웃음이 헤프게 흘렀다.

밀로라드, 라떼, 르뮈에는 애초에 사교계에서 대단한 마당발들이었다. 셋이 슈트를 입고 나타난 건 굉장한 화제를 모았고, 그들과 나는 테이블마다 초청을 받았다.

난 삼인방과 함께 앉아 있다간 주목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주목받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혼자 연회 홀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레이커스와는 어떻게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냐는 둥, 어떻게 샤인과 루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냐는 둥, 납치 사건 때문에 많이 고생하셨겠다는 둥, 파크의 영웅이라는 둥…….

난 겨우겨우 사람들을 피해 다니다가, 겨우 저 멀리에서 짧은 분홍색 머리의 시녀 한 명을 발견했다.

‘……모니카!’

나는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하며 카나페를 서빙하고 있는 그녀에게 대뜸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모니카 씨.”

그녀는 내가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두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봤다.

“네? 저…… 그……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말을 걸어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요…… 제가 누구냐면…….”

“알아요! 당연히 알죠. 아르비체 그린 님이시잖아요. 저 팬이에요!”

“……네? 절 안다고요?”

“그럼요. 왕국의 귀부인들 모두 아르비체 님과 친해지고 싶다고 하시는걸요? 다들 얼마나 부러워하는데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자, 모니카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가슴께를 손으로 눌러 댔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돼서 정말 너무 영광이에요. 그런데 제게는 무슨 일로……?”

“경고를 전하러 왔어요.”

내 진지한 얼굴에, 그녀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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