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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84화 (84/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4화

블란테 공주는 우아하게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꼬리까지 접어 가며 웃었다.

“저번에 레이커스의 다과회에서도 그린 양이 대단히 강단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백작가 영애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이번 기회로 또 다시 봤어.”

“……제가 차를 잘 못 마셔서요?”

“응. 샤인 이야기 때문에……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차를 잘 못 마셔서도 맞아.”

“……그렇군요.”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눈알만 되록되록 굴리며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차를 내려놓자, 공주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훈연향, 별로구나?”

“애초에 홍차는 별로 안 마셔 봐서요.”

“그래? 다음에 또 나랑 마시자. 차 선물이 많이 들어오는 편이라, 나도 없던 취미가 생겼거든.”

“……네. 그럴게요.”

나는 공주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다가, 슬쩍 중얼거렸다.

“그런데 다른 차도 이런 맛이라면, 전 좋은 차 친구는 되지 못할 텐데요.”

“어머, 무슨 소리야. 내 앞에서 맛없는 걸 맛없다고 말해 줄 사람을 본 게 얼마 만인 줄 알아? 레이커스를 뺏어 갔으면, 차 친구라도 돼 줘야지?”

“전 그런 게 아니라…….”

“에이, 됐어. 변명할 필요 없어.”

이 공주님도 은근히 마이페이스다.

난 해명은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되어 달라고 말씀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어머, 솔직한 친구가 얼마나 귀한데? 난 연인보다는 친구를 얻고 싶어. 남자 같은 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널렸잖아.”

“그거야 그렇죠.”

내 대답이 또 뭐가 웃긴지 그녀는 소리 내 웃었다.

“레이커스는 그중에서도 아주 아름다운 금싸라기이긴 하지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남자를 넘볼 만큼 궁하진 않아. 가끔 둘을 같이 불러서 눈요기나 하지, 뭐.”

공주님은 양손에 온더록스 잔을 들고 누군가에게 붙들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레이커스를 향해 턱짓해 보였다.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남자?’

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를 그런 식으로 예쁘게만 설명할 수 있을까?

난 그를 신뢰하는 만큼, 동시에 그를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 가서 그의 정체에 대해 하소연할 수도 없으니…….

그리고 나는 레이커스가 내게 잘해 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의 얼마만큼이 진심인지도 모르겠고, 그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겠고, 가끔은 내 호의를 사서 날 속이려는 것 같다가 또 가끔은 그냥 내가 그의 장난거리인 것 같다가…….

이젠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내가 지독한 맛의 차가 든 잔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자 블란테 공주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다른 찻주전자를 재빨리 대령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찻잔을 정리하고 다른 새 찻잔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주었다.

잔에 손을 대자, 차를 따르기도 전에 이미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잔이 기분 좋게 손에 감겼다.

‘이렇게 큰 연회에서, 이런 디테일까지 신경 쓰다니…… 정말 귀족적이라고 해야 하나.’

난 혀를 내두르면서 아직도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는 레이커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런 걸 신경 쓰는 면만 봐도, 공주와 레이커스는 썩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될 텐데…….’

공주가 그런 날 보더니 샐쭉 웃었다.

“그거 봐, 레이커스의 등만 봐도 좋잖아.”

그런 게 아니다.

‘이거 봐. 내 속내를 읽는 사람은 레이커스뿐이잖아? 내 표정, 하나도 안 뻔하잖아? 대체 왜 그렇게 매번 놀리는 건데.’

내가 속으로 분개하며 재빨리 고개를 젓자, 그녀는 내가 부끄럼을 탄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웃었다.

그 뒤로, 공주는 이 넓디넓은 연회장의 수많은 사람이 그녀와 내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내 테이블을 지켰다.

연회장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시종이 찾아와 공주에게 속삭여 주었지만, 그녀의 관심사는 이미 내게 잘 맞는 홍차를 찾아 주는 것이 된 모양이었다.

석 잔째 내가 떫은 표정을 짓자, 블란테 공주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쯤 되면 오기가 생기는걸.”

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블란테 공주가 권해 주는 홍차마다 내 입맛에는 몹시 쓰거나 향이 독했다.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똑 부러지는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앞에 온더록스 잔을 내려놓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굵직한 윤곽의 매력적인 손의 주인이 레이커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린 양은 맛이나 향이 달콤한 것을 좋아합니다. 홍차를 그냥 마실 거라면, 바디감이 있는 것보다는 꽃이나 과일의 향이 가미된 가향차를 좋아할 겁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블란테 공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가향차 취향이야?”

난 나도 모르는 취향에 대해 뭐라고 말을 더할 수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사이에 블란테 공주의 시선이 내 뒤로 옮아가는 게 보였다.

레이커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에,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과 애정 같은 것들이 맴돌다가 천천히 잦아드는 것이 눈에 선히 보였다.

참 묘한 느낌이었다.

누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너무 이상해.’

왜 내 마음속이 다 싸르르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배 속에 차가운 얼음덩어리가 굴러다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감정을 갈무리하는 법도 잘 아는 것 같았다. 몇 번 눈을 깜박이는 사이, 순식간에 모든 감정을 없앤 블란테 공주는 생긋 웃으며 레이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왔어? 난 영영 우리 테이블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정말 씩씩한 공주님이야.’

레이커스는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야 없지요. 제 파트너가 여기 있는걸요. 잠깐 이야기를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연회에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걸. 아바마마랑 싸운 눈치던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레이커스가 내 뒤에 서 있었지만, 목소리에 스며 있는 희미한 한숨만으로도 그가 쓴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안 좋은 소리를 들은 것 같았으니까.

레이커스가 가져온 컵에는 얼음이 가득 담긴 잔에 바닥에 깔릴 만큼만 브랜디가 담겨 있었다.

레이커스와 함께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향이 달콤했다.

향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자, 블란테 공주가 입술을 삐죽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깜짝 놀라 따라 일어나자, 그녀가 날 보며 말했다.

“공작이 아르비체를 많이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야. 이렇게 단박에 취향을 맞추는 걸 보면. 다음번엔 나도 꼭 성공할게.”

“……가 보시게요?”

“응. 이제 슬슬 아바마마도 등장하실 때고, 나도 인사할 사람이 많으니까.”

“네, 그럼…….”

“근데, 레이커스를 잠깐만 빌려 가도 괜찮을까? 아바마마랑 화해시켜야 하거든.”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난 모니카를 찾을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레이커스가 곁에 없는 게 좋으니까.

더불어 공주가 레이커스를 바라보는 눈빛을 본 뒤로 속이 이상하게 자꾸 메슥거려서, 그가 잠시라도 좀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커스가 내 뒤에서 중얼거렸다.

“제 의견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으시는군요.”

“어머, 공주의 순정을 짓밟아 놓고 그런 걸 궁금해하길 바라는 거야?”

그는 날 부드럽게 돌려세우곤 내게 말했다.

“……그럼,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제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테라스나 별실에는 가지 마십시오.”

난 그의 잿빛 눈동자가 날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게 갑자기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져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온종일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던 것 때문에, 레이커스는 내가 이상하게 군다고 생각하지는 못한 눈치였다.

그는 그저 내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블란테 공주와 함께 멀어지면서도 자꾸 날 돌아보았다.

블란테 공주와 레이커스가 내게서 멀어지면서 대화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

“평소에도 잘 입고 다녔습니다.”

“평소에도 공작이 이렇게 입고 다녔으면, 심장이 멈춘 사람이 여럿이었을 거야.”

난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금발의 레이커스와 흑발의 공주는 썩 잘 어울려 보였다.

둘의 뒷모습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이디?”

깜짝 놀라 돌아보자, 요즘 부쩍 자주 봤던 삼인방이 샐쭉 웃고 있었다.

“라떼? 르뮈에랑 밀로라드!”

난 셋의 차림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연회에 참석한 여인들이 대부분 드레스 차림인 것에 비해, 이 세 아가씨는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 슈트를 입고 있었다.

미인과 미남은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더니, 머리를 말끔하게 하나로 땋아 모자 안으로 밀어 넣거나 짧은 머리를 한 세 명은 썩 잘생긴 미남처럼 보였다.

셋은 코트, 조끼, 바지에다 얇고 매끈거리는 지팡이까지 하나씩 휴대하고 있었다.

르뮈에는 머리카락 색에 맞춰 보라색의 코트를, 라떼는 까만 단발머리에 맞춰 검은 코트를, 밀로라드는 회색 쇼트커트 머리에 맞춰 쥐색 코트를 입었다.

색만 다르고 차림새는 꼭 같은 셋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난 레이커스와 공주의 일을 순간 잊어버리고 웃고 말았다.

“너무 귀여워.”

라떼가 내 말에 만족한 듯 방긋방긋 웃었다. 밀로라드는 우아하게 허리를 짚고 서더니 한 바퀴 빙글 돌아 보였다.

그들이 내가 앉은 테이블에 합석하는 순간, 옆 테이블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인 여인이 이 테이블을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끼고 싶어 안달 난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내게 독설을 퍼부은 적 있던, 리베아 제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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