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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83화 (83/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3화

랑비엘에 이어 앨라이 쿠스까지 발견하고 당황해서 계단 중간에 멈추어 서는데, 그 순간 주변에서 웅성이는 이야기 중 몇 개가 내 귀에 들어왔다.

‘지금, 리어먼드 공작님 표정 완전 안 좋은 거 봤어요?’

‘그러니까요. 어떻게 저렇게 왕국에서도 제일 잘생긴 사람 세 명을 한 사람이 독차지할 수가 있어요? 세상도 불공평하지.’

‘아르비체 님이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네?’

‘어휴, 남작 부인은 소문도 안 듣고 사세요? 샤인 님 사건 몰라요?’

‘아아, 그건 들었죠.’

‘그뿐인 줄 아세요? 어제도 글쎄, 신전 앞에서…… 신문 기사가 잘못 나간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부모 잃은 여자애를…….’

지나 알터에 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는 순간, 난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직 지나의 엄마를 찾아 준 것도 아니고, 모리슨 알터의 행방도 오리무중이라 그 이야기가 듣기 거북했다.

‘그래, 지금도 지나의 엄마가 납치당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아. 납치범도 어딘가에서 판치고 있을 테고.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다시 잘 생각하자. 분위기에 휘둘릴 때가 아니야. 정신 차려야 해.’

난 우선 랑비엘 멕레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발이 정말 잘 어울리는, 피부가 뽀얀 미남자가 내 시선에 미소로 화답하는 것을 보며 난 미소를 싹 지우고 말했다.

“기분 나쁘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저번에 실수한 말이 있어서 정정하려고요.”

“네? 어떤…….”

“데이트 신청해도 좋으냐고 물으실 때, 솔직히 농담인 줄 알아서 제대로 대답 안 했는데요. 그 뒤로 계속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싫어요.”

랑비엘 멕레이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거절이라는 것 자체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애초에 나랑 랑비엘이 뭐 그렇게 대단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잘난 사람들은 저래서 문제야. 거절도 좀 당해 보고 살아야지.’

난 혀를 차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산은 사실 잃어버렸어요. 다음에 하나 꼭 사 드릴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랑비엘은 내 말에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다시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별것도 아닌 걸 자꾸 신경 쓰시네요. 그런데 어디서 잃어버리셨습니까?”

‘……보통 그런 걸 물어보나?’

그의 질문이 의아했지만 어쨌든 잃어버린 건 나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중한 우산이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는 히죽 웃고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지금은 역시 레이커스와 즐기러 오신 거니까, 다음에 다시 한번 데이트 신청하죠.”

“……아뇨, 정말로 괜찮은데요.”

“그 생각이 바뀌게 해 드릴 기회 정도는 주셔야죠.”

‘……아, 랑비엘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딱 피곤한 스타일이네.’

랑비엘 멕레이도 진짜 진짜 잘생겼고, 한국에 살고 있기만 했다면 아마 땅끝 마을에서 밭을 일구고 있더라도 연예인으로 캐스팅되었을 얼굴이긴 한데…….

저렇게 말하니까 어쩐지 가소롭게만 보였다.

난 그의 손을 외면하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앨라이에게 다가갔다.

어제는 종이 관을 이고 있던 그는, 오늘은 산호로 만든 듯한 희고 정교한 관을 쓰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대신관의 금관보다는 한 단계 낮은 것이겠지?

뽀얗기만 한 그의 이미지에 너무 잘 어울렸다. 세이브 NPC의 예쁜 모습에 흐뭇해서 미소를 짓는데, 앨라이가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제가 직접 모시지 못해 아쉽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된 게 아쉬운 점 아닌가.”

레이커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앨라이의 손을 쥐고 악수했다.

난 내 앞에서 악수하는 둘을 보다가 그만 웃음이 터졌다.

웃다가 레이커스와 앨라이가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빤히 보고 있는 것이 보이자, 속절없이 다시 웃음이 터졌다.

“왜 웃습니까?”

“왜 웃으세요?”

난 뻐근하게 당기는 배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둘이서 파트너 하시면 어울리겠다 싶어서요.”

앨라이와 레이커스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마저 둘이 너무 잘 어울려서 난 잠깐 또 웃음을 터뜨렸다.

또 둘의 신경전을 구경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앨라이 쿠스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나와는 달리 연회에 놀러 온 게 아니므로, 대신관 대리로서 만나볼 사람도 많았고 소개받을 이들도 많은 모양이었다.

찾는 이들이 많아 떠나가는 그에게 난 레이커스가 보지 않는 사이 입 모양만으로 속삭였다.

‘모니카를 찾고 연락드릴게요.’

앨라이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미련이 남은 얼굴로 떠나갔다.

어떻게 보면 제일 귀찮을 수도 있는 인물 두 명을 대충 처리하고 나자, 진이 다 빠졌다.

좀 쉬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다 사람들이 서 있는 중앙 홀 옆에 먹을거리가 준비된 테이블들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길 가면 사람들의 이목에서도 좀 벗어날 수 있겠는데?’

난 그렇게 결심한 뒤 레이커스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저, 공작님.”

“네?”

“저, 다리가 아픈데, 좀 쉴까요?”

레이커스는 ‘이제 막 도착했는데, 다리가 어떻게 아픕니까?’라고 물어보는 대신 테이블을 잡아 주었다.

테이블에는 꽃장식이 들어간 흰 식탁보 위에 식기들이 말끔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난 거기로 다가가 그가 빼 주는 의자에 앉았다.

“마실 것도 좀 가져다주세요.”

“제가 말입니까?”

“공작님이 만들어 주시는 음료가 제일 맛있는걸요?”

레이커스는 오늘따라 순순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틀림없이 알 텐데도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니바를 향해 걸어갔다.

겨우 모두에게서 해방된 나는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아서 기지개를 쭉 켰다.

‘……자, 이제 모니카를 찾아볼까.’

그때, 시종이 내 테이블로 찾아와 말을 전했다.

“공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난 그 말을 듣고서야 연회 홀에 가득한 사람들의 관심사가 뭔지, 레이커스가 왜 내가 주목을 살 거라고 한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공주가 지금까지 레이커스에게 그렇게 대놓고 구애를 해 왔는데, 갑자기 나와 연인이라는 헛소문이 났으니까.

게다가 레이커스의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했으니까.

‘……레이커스가 어쩐지 순순히 나온다 했더니. 공주님을 피하기 위해서였군.’

이렇게 겨우 얻어낸 혼자만의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니.

울상을 숨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부채를 펴 든 블란테 공주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레이커스를 찾아온 듯 그가 있는 미니바 쪽을 흘끗 바라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 연회의 주인공답게 가장 화려한 분홍색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정말 인형같이 아름다웠다. 흑발과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도 인상적이었고, 뺨과 긴 속눈썹을 강조한 화장도 과하지 않고 잘 어울렸다.

나는 치맛자락을 쥐고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우아함을 모두 쥐어짜내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안녕?”

“자리, 피해 드릴게요. 공작님께는 제가 볼일이 있어서 다른 테이블로 갔다고 하시면…… 아녜요, 그냥 별말 안 해도 신경 안 쓰실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말하는데, 공주님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어머, 왜?”

“네?”

“그러지 말고 앉아. 레이커스가 아니라 아르비체 그린, 당신 때문에 온 거니까.”

“……네?”

“풉. 나랑 리어먼드 공작을 어떻게 엮어 주려고 자리를 피해 줄 셈인 거야? 이거, 눈치가 빠른 건 고마운데 좀 자존심 상하는데.”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공주는 빙그레 웃더니 부채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욕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지만, 쿨하게 양보할까 생각 중이거든.”

“……네?”

난 눈을 깜박이며 눈앞에 앉은 공주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공주가 레이커스를 좋아한다는 건 게임 속 공식 설정이었다.

게다가 바로 조금 전, 공주가 레이커스를 바라보는 시선을 난 분명히 보았었다.

레이커스를 보는 순간 그를 향한 관심과 정복욕으로 뒤섞인 그 눈빛을.

‘물론…… 레이커스의 정체를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공주님께서 관심을 거두시는 쪽을 추천해 드리긴 하지만…… 갑자기 레이커스에 관한 관심을 접으신다고? 왜?’

내가 얼떨떨해서는 어찌해야 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공주가 작게 웃으며 부채로 내 의자를 톡톡 건드렸다.

“서서 이야기할 거야? 나, 목 아픈데.”

“……아.”

내가 황급히 다시 의자에 앉자, 시종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블란테 공주의 주문에 따라 차를 준비해 주었다.

공주는 싱긋 웃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과연, 귀족의 예의가 따로 있는 나라의 공주쯤 되면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품위가 뚝뚝 떨어지게 되는 모양이었다. 손짓의 우아함은 눈을 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공주는 찻잔에서 입을 떼고서 부드럽게 웃더니 내게 말했다.

“그거 알아?”

“네?”

“내가 레이커스를 쫓아다닌 게 얼마나 오래됐는지. 그런데도 레이커스는 나한테 그런 표정을 단 한 번도 지어 준 적이 없어.”

“……어떤.”

“아까 입장할 때부터, 레이커스는 당신에게 눈을 한 번도 못 떼던데? 몰랐어?”

몰랐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닐 거예요.”

나도 모르게 해명하는데, 블란테 공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레이커스를 좋아해서, 더 확실히 알아. 그 사람에게 아르비체 양이 정말 특별한 사람이구나, 싶어.”

“……공주님,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오해? 전혀 아니야.”

공주는 내 말이 아주 웃긴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그러곤 레이커스가 있는 미니바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레이커스가 얼마나 선을 단호하게 긋는 사람인데. 내겐 한 번도 그 선 너머로 발을 들일 것을 허락해 준 적이 없어.”

“……그래요?”

공주에게 항상 사근사근 웃어 주던 레이커스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렇게 선을 단호하게 그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레이커스는 관상용이라는 생각도 하긴 했어. 워낙 너무 완벽하니까, 굳이 가질 엄두가 나지 않는? 곁에 있으면 내가 망가질 것 같은 느낌 있잖아. 고결한 것에 비견되는 건 무서운 일이기도 하니까.”

공주는 즐거운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홍차 안 좋아해? 랍상수숑인데, 맛있어.”

‘뭐라고, 랍상……? 그게 뭔데……?’

대답을 생각하느라 계속 손도 대지 못하던 차를 황급히 입에 댄 나는, 입 안을 가득 메우는 소나무 태운 향에 깜짝 놀라 차를 다시 내려놓았다.

레이커스가 내게 타 주던 그 달콤한 밀크티와는 전혀 달랐다.

향이 너무 세다 보니까, 맛까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조금 쌉싸름하다 못해 어딘가 매운맛까지 느껴진달까.

내 얼굴을 보더니 공주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비체, 당신 꽤 재밌어.”

[블란테 빅토리아 아레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20/198)

호감도 이벤트 : 티파티]

그녀의 경쾌한 웃는 목소리와 함께 알림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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