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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82화 (82/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2화

레이커스는 몸에 잘 맞는 청록색 슈트와 턱시도 재킷을 입고 있었다.

거의 몸에 달라붙다시피 한 얇은 슈트는 다부지게 벌어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 긴 다리 같은 것들을 부각하기에 딱 좋았다.

그리고 어깨에 걸친 코트는 안감이 청록색에 겉감은 회색이었는데 그게 또 그의 눈 색과 귀신같이 잘 어울려서 절로 한숨이 나왔고, 장신구라곤 은색 시곗줄과 얇은 검정 실크 모자가 전부였는데도 지독히 화려하게만 보였다.

날아가는 새도 홀려서 떨어트릴 듯한 아름다운 그 얼굴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너무 감탄하면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인지, 나와 내 곁의 여인들은 꽤 오래 말을 잃고 레이커스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름다우십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청하듯 손을 내밀고서야, 겨우 정적이 깨졌다.

“……네?”

내가 깜짝 놀라 반문하자, 레이커스가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만.”

‘내가? 아니, 레이커스에 비견할 아름다운 사람 같은 건 어디에도 없을걸.’

난 입을 열면 감탄사를 줄줄 읊어 댈 것 같아서 뭐라고 말도 못하고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제야 내 옆에 서 있던 시녀들도 겨우 입을 뗐다.

“……와,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으세요.”

“아르비체 님, 전생에 덕 좀 쌓으셨네요. 물론, 레이커스 님도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난 그녀들이 흘리는 감탄사를 들으며, 내가 더 감탄했다.

난 그저 레이커스의 미모를 보고 넋을 놓기에 바빴는데, 그들은 그 와중에 프로 정신을 발휘해 내 칭찬까지 잊지 않고 끼워 넣었다.

레이커스의 팔짱을 끼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 그래도 몇 걸음을 떼다 보니 좀 정신이 들었다.

난 내 뒤를 따라오며 드레스를 잡아 주는 앰버를 보다가 퍼뜩 어제 데려온 아이가 생각났다.

“지나, 지나는요? 어머니는 찾았대요?”

레이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공포 게임 속 세상은 너무 가혹하다. 특히 어린아이에게는 더.

‘물론 현실은 이보다 더한 순간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여긴 게임 속이니까. 굳이 아이들까지 괴로울 필요는 없잖아.’

우리는 블리에 씨에게 지나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고서야 왕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왕궁 앞에는 기나긴 마차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아마도 왕궁으로 들어가는 모든 마차가 철저히 조사받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으로 등을 기대는데, 앞에 마차의 줄이 그렇게 긴 걸 확인했는데도 마차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달려가는 게 느껴졌다.

‘……뭐지?’

조금 놀라 창밖으로 고개를 빼자, 다른 마차들이 한쪽으로 죽 비켜서서 생긴 빈 곳으로 우리가 탄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이렇게 새치기해도 괜찮아요?”

내 혼잣말 같은 질문에 레이커스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요즘 들어 저렇게 웃는 그를 자주 보았지만 오늘의 옷차림과 미소의 조합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간 어느 정도 쌓았다고 생각한 면역력이 조금도 작용하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는 내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새치기라기보다는 제게 해 주는 우대입니다.”

“신분 때문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제게 그렇게 대접해 주는 만큼, 저도 파크를 위해 봉사하고 있죠. 왜요, 그린 양에겐 이게 이상한 일입니까?”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자, 레이커스가 작게 웃었다.

“그린 양은 간혹, 정말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고가 유연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렇지도 않아요.”

“뭐, 제 콩깍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콩깍지라는 단어는, 마음에 몹시 든 상대에 한해서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들이 실제보다 더 좋아 보일 때 쓰는 말 아닌가?

허구한 날 레이커스의 호감도 수치가 증가하는 지표를 보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 수치보다 이 말이 더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난 그 말을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가까워져 오는 왕궁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너무 가까이 온 탓에 궁 전체의 모양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눈앞의 새하얀 건물은 겉면에 도드라진 부조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게임 속에 들어온 이후, 간혹 불행보다는 감탄으로 메워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와…….”

연회장의 입구에 선 나는 오늘은 종일 감탄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회장 입구는 3층 높이의 계단 위에 있어서, 연회 홀이 전부 내려다보였다.

기둥과 벽, 바닥과 천장이 모두 금색으로 수놓아진 거대한 원형의 홀은 생각보다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게임 속에서 일러스트로 봤을 때는 그저 단면적으로만 봐서 이 아름다움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양쪽 바닥에서부터 둥근 벽을 감싸 안으며 솟아오른 계단끼리 3층쯤 될 법한 높이에서 만나는, 사방이 대칭으로 만들어진 구조에는 절로 경탄이 나왔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것은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었다.

왕궁 연회라는 것은 그 잘난 귀족들에게도 특별한 이벤트이니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신경을 쓰고 나온 이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쌍쌍이 연회장을 가득 메운 이들 중에는 치맛단을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많아서 위에서 보고 있자면 꽃잎들이 하늘하늘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웃음이 나왔다.

‘어두침침한 구름이 낀 하늘, 툭하면 까마귀 소리가 들리는 고저택, 연쇄살인 사건 때문에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행인들. 이런 것들만 보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당연하지.’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눈앞의 난간에 기댔다.

“연회장 입구를 3층에 만든 건 감탄부터 하라는 뜻인가 봐요. 다들 너무 아름답네요.”

“그렇습니까? 잘 모르겠군요.”

“공작님은 자주 보는 풍경이니 익숙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숨 막히게 아름다워요.”

레이커스가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긴장되지는 않는 모양이군요.”

나는 의아해서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긴장? 하긴 공주에게 초대받아서 처음 궁중 연회에 참석한 중소 귀족의 딸에 불과한 내가 긴장하지 않는 게 이상할지도.’

하지만 이런 일에 긴장하기엔 내 일상이 너무 롤러코스터다.

‘정신 차리고 보면 까마귀 그림이 그려진 예고장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파크 도심에는 출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크리쳐가 출몰하질 않나, 아직도 정체를 모르는 납치범하며…… 무엇보다…….’

난 내 옆에 선 남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시종이 이름을 부르길 기다리고 있는 그는, 역시 명실상부 게임의 중심에 선 메인 캐릭터다운 위풍당당함이 있었다.

금발을 빗어 넘겨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는 보기 좋게 둥글었고, 이마 뼈의 골격까지 한숨이 나오게 아름다웠다.

만약 공포 추리 게임이 아니라 왕실을 배경으로 한 연애 시뮬레이션이었다면 틀림없이 1황자 정도는 되었을 그런 귀티가 줄줄 흘렀다.

여기엔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마치 저를 뽐내기 위해 온갖 치장품을 두른 사람들보다 단정하게만 입은 레이커스가 더 빛났다.

‘그래, 무엇보다 비밀투성이인 이 남자 때문에 긴장하지 않고 산 날이 없어.’

난 그렇게 생각하고서야 내가 그의 얼굴을 닳도록 구경했다는 것과 그의 잿빛 눈이 휘어진 채로 나를 마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오늘은 레이커스를 쳐다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겨우 눈을 떼어 내는데, 레이커스가 살살 웃었다.

“다행입니다.”

“……네?”

“파트너는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서.”

느물거리는 태도로 해 오는 말에 기가 찼다.

“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그린 양이 워낙 유명인사가 되신 덕분에 지금부터 꽤 주목을 받아야 할 텐데, 제가 의지가 되어드리면 좋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네?”

주목?

나 혼자면 모를까 이 왕궁에서, 그것도 레이커스가 옆에 있는데 내가 주목을 살 일이 뭐가 있을까?

“준비됐습니까?”

“네? 네…….”

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레이커스가 시종에게 신호를 보냈다.

“레이커스 리어먼드 공작님과 아르비체 그린 남작가 영애가 드십니다.”

시종이 소리 높여 우리의 입장을 알림과 동시에, 레이커스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했다.

연회 홀 안에서 자유롭게 웃고 떠들고 있던 수십 명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쏠렸다.

그중 많은 것은 호의였지만, 질시 어린 시선이나 의혹의 시선 또한 분명히 섞여 있었다.

레이커스는 날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3층에서 1층에 이르는 긴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동안, 계속해서 주목을 사게 만들어 두다니. 연회 홀의 구조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는데, 너무 잔인하지 않아?’

게다가 아무리 손으로 드레스를 감아 올려 봐도 확 퍼진 치맛단 아래로 발과 계단이 보이지 않아서 신경이 더 날카로워졌다.

레이커스의 팔에 의지해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데, 순간 손 하나가 내 앞에 내밀어졌다.

“절 의지하십시오.”

목소리의 주인은 언제 계단 위까지 올라와 있었는지 모를 랑비엘이었다.

은색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검정 슈트를 입은 그도 차림이 아주 잘 어울렸다.

그 역시 누구 못지않게 잘생긴 미남자이긴 했는데, 레이커스를 보고 나서 보니 그냥 평범해 보이는 게 조금 미안할 뿐.

“어머, 이렇게 또 뵙네요.”

무심코 인사하던 나는,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옷차림의 차기 대신관은 반짝반짝한 눈꽃 같은 정갈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난 이번 왕궁 연회도 평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에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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