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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80화 (80/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80화

‘얼른 돌아가자. 돌아가서 방에 처박히면 레이커스와 굳이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저 잘난 얼굴을 또 볼 필요도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레이커스와 함께 같은 집으로 돌아간다.

얼른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우스울 정도다.

‘정말 언 발에 오줌 누는 것 같은 임시방편의 삶을 살고 있구나.’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한숨을 한 번씩 쏟아 내고 있는데, 레이커스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뭔가를 잊고 나면, 잊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리는 게 가장 큰 문제죠.”

“……네?”

“전, 그린 양의 현재에 베팅했습니다. 그린 양의 현재를 갖고 싶다는 것에.”

레이커스의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리어먼드가 현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이후로 나흘 동안 그의 말을 전부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대답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레이커스는 내 침묵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또 말을 걸어왔다.

“내일 연회에서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넘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래. 무사해야 할 텐데.’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모리슨 알터에 대해서 더 이상 기사를 내보내지 않기로 하긴 했습니다만…… 효과는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왜 꺼내지……?’

레이커스를 올려다보자, 그는 천사 조각상이 늘어선 다리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차기 대신관 지명식도 있어서인지 신전 앞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다들 좋은 뜻으로 신전을 찾은 것일 텐데, 그 줄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왜들 저러는 거죠?”

“글쎄요. 하지만 아무래도 저기 있는 아이가 모리슨 알터의 딸로 보입니다만…….”

딸……?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어른 몇 명이 여자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있어서 정확히 누구인지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도대체 저기 있는 게 누군지 어떻게 아는 거야?’

난 머릿속에 외워 둔 레이커스의 특수 능력에 적외선 센서 이외에도 몽골인의 시력을 추가했다.

‘게다가 나는 모리슨 알터의 가족사진을 봤지만, 레이커스가 우편배달부의 딸을 단박에 알아채는 게 이상하지 않아?’

신문기사에 나기라도 했을까, 생각하면서 난 곧장 소란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 어딜 가는 겁니까?”

“알면서 왜 물어요?”

레이커스가 한숨을 쉬며 성큼성큼 걸어 나보다 반 발짝 앞장섰다.

이런 일에 나서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내가 나서는 것보단 차라리 제가 나서는 게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겐 그린 양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가까이에 계십시오.”

‘저런 소리를 잘도 한다니까, 정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레이커스가 저벅저벅 걸어가서 군중 속에 끼어들자, 군중들은 놀란 얼굴로 그를 보며 순식간에 길을 텄다.

그가 높은 신분의 귀족이라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만, 다들 진심으로 그를 반가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평소에 레이커스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면이었다.

‘……정말 이미지 관리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툴툴거리며 그의 뒤를 쫓자, 소란의 중심에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거 놔! 이거 놔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아가야, 넌 저기 못 들어가!”

“엄마가 저기서 만나자고 했단 말이에요!”

“살인마의 자식 주제에?”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 아빠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모르는 사람이 없어.”

“아빤 그냥 주문받은 대로 배달만 했을 뿐이에요!”

모리슨 알터의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자아이의 팔과 어깨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고, 아이는 온몸을 비틀고 악을 쓰며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난 레이커스가 하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내가 빽 고함을 지르자, 시끄럽던 목소리들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들은 나를 한번 보고, 내 옆에 있는 레이커스를 한번 본 다음 모자를 벗어 들고 인사했다.

얼떨결에 모두에게서 해방된 여자아이가 이때다 싶어 신전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팔이 굵은 아주머니 한 명이 그 아이의 팔을 잡아챘다.

“어딜 가려고!”

난 황급히 그쪽으로 다가가 손을 떼놓았다. 그러곤 아이를 내 뒤로 돌려세웠다.

“어린애한테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 아주머니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 아르비체 님이시죠?”

“네.”

“정의롭고 명석하신 분이라고,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요. 하지만 이 아이가 어떤 아인지 알면 저희 사정도 이해하실 겁니다.”

“모리슨 알터의 딸이라는 거요?”

“……네? 네.”

내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눈이 동그래져서는 저들끼리 시선을 마주쳤다가 다시 날 바라봤다.

“모리슨 알터에 대해서…… 신문기사 보셨죠?”

난 그들이 뜻하는 바를 알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봤어요. 그리고 지명 수배가 해제됐다는 기사도요.”

다시 한번 사람들이 서로 시선을 맞췄다.

“……해제됐다니요?”

“신문에 그런 게 났었나요?”

“지명 수배가요?”

분명히 신문에 났다.

왜냐하면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 아닌 걸 안다면 최대한 빨리 지명 수배를 공식 취소하게 하라고 레이커스를 들볶은 장본인이 나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에서, 그들 중 누구도 경시청에서 낸 공고를 제대로 읽은 자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래서 누군가를 매도하는 건 쉽지만, 그걸 다시 바로잡는 건 어렵다니까. 정말 말도 안 되게 어렵지.’

지명 수배가 해제되었다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조금쯤 김빠진 얼굴로 여자아이를 쳐다보며 다시 수군거리는 걸 보다가, 레이커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희가 나가는 길에 데려다주죠. 어차피 여기 뒀다간 같은 일을 또 당할 뿐일 텐데.”

레이커스가 내 뜻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걸 본 여자아이는 토끼 눈으로 신전 안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엄마가……!”

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이름이 뭐지?”

“……지나. 지나 알터요.”

“몇 살이야?”

“열한 살이요.”

아이는 대답하면서도 아직 안정을 되찾지 못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이 다시 제게 손을 뻗을까 봐 몸을 움츠려 댔다.

난 지나의 개나리색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곤 다시 물었다.

“엄마랑 신전 안에서 만나기로 했니?”

“……아뇨. 여기 다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줄곧 안 나타나시는걸요? 그래서 안에 계실 것 같아서…….”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아침이요. 오늘 아침에…… 엄마가 간식 사서 온다고…… 잠깐 있으라고…….”

지나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숨이 쌕쌕거리며 가빠졌지만,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저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신전이 있는 방향을 자꾸 쳐다봤을 뿐.

‘……아침이라고?’

난 고개를 돌려 레이커스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나 알터의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겼다는 걸.

그걸 애가 있는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어서 눈빛만 주고받는데 우리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애 엄마는 어디 갔대?’

‘지네 남편이 살인만데, 자식이라고 키우고 싶겠어?’

‘쉿! 말조심해, 이 남정네야. 살인마가 아니라잖아.’

‘에이, 혹시 또 모르지. 다 이유가 있으니까 의심받았을 것 아냐?’

‘아무튼, 저렇게 오래 기다렸다는 거 보니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데?’

난 당최 도움이라곤 되지 않고 일을 부풀리기만 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한 명씩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다들 제 입을 손으로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저들이 꼭 잘못했다는 게 아니다. 이 불안한 상황에서 범인이 누군지라도 안다면 한결 나아질 것이다.

그러니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같은 건 굳이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겠지.

당연히 그 가족도 그 죗값을 함께 치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지나의 손을 꼭 쥐었다.

“언니랑 같이 가자.”

“……엄마는요?”

“저기, 오늘 차기 대신관이 되신 분이 언니 친구거든. 그 행사 보러 온 것 맞지?”

지나의 호박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엄청 높으신 분이라고 하던데요?”

“그럼. 자 봐, 지금 언니 옆에 다른 엄청 높으신 분도 있잖아? 언니는 거짓말 안 해.”

지나가 내 뒤를 지키고 있는 레이커스를 흘끗 바라보더니, 나를 감탄 어린 눈으로 보았다. 그러곤 얼른 고개를 위아래로 힘껏 흔들었다.

지나의 솔직한 표정에서 레이커스의 신분뿐만 아니라 미모에 대한 감탄과, 그 잘난 남자를 거느리고 있는 나에 대한 감탄이 전부 다 읽혔다.

난 쓰게 웃었다.

‘아이들도 예쁘고 잘생긴 거 다 알아. 그러니 저 잘난 외모가 누굴 설득할 때는 최고라니까.’

“그러니까, 언니가 그 친구한테 부탁해서 엄마를 모셔와 달라고 할게. 일단 언니랑 같이 가 있자. 엄마도 그편이 나으실 거야. 아니면 다른 곳에 가 있을래?”

지나는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뭘 생각했는지 표정이 어두워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아빠는 어디 갔는지 모르는걸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언니.”

[지나 알터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22/99)]

내가 지나의 손을 잡고 앞장서자, 레이커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우리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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