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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79화 (79/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9화

난 앞서 걷는 앨라이 쿠스를 황급히 따라잡았다.

아직도 레이커스에 대해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이 게임 속의 절대 선이나 다름없는 앨라이 쿠스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저번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둘이 그렇게 서로를 잘 아는 것 같지도 않은데, 서로 으르렁거려 댈 정도로 상성이 안 맞으니까.

“굳이 가 보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공작님께선 입구에 잠깐 계시다 돌아가실 거니까요.”

“아닙니다. 모처럼 두 분께서 함께 오셨으니,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죠.”

앨라이 쿠스는 오늘 신전 행사의 주인공이다. 지금 이렇게 빠져나와서 나한테 인사하러 온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일인데, 그가 안내역이나 자청하고 있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아뇨, 괜찮은데…….”

“제가 안내해 드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공작님께서 신전에 기부하시는 게 얼만데, 그 정도는 해 드려야죠.”

정말로 나와 레이커스를 안내해 줄 심산이었는지 앨라이 쿠스는 몇 발짝을 더 걸어가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뒤편으로 보이는 천사상의 이미지와 이 앞에 흐르는 강, 그리고 바로 옆에 놓인 선대 대신관을 기리는 추모 비석 같은 것들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장면은 내가 게임을 할 때 자주 봤던 삽화 중 하나와 완벽히 겹쳐졌다.

‘그래, 바로 여기야. 여기가 세이브 포인트였어.’

세이브를 위해서 앨라이 쿠스를 찾아오면, 그는 항상 여기 서서 날 맞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면 항상 세이브를 하겠냐는 창이 떴고…… 를 선택하면 플레이어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미지 영상과 함께 세이브됐었지.’

앨라이 쿠스는 내가 갑작스레 넋을 놓고 있자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웃으며 아니라고 하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소매를 조금 잡아당겨 내 기억 속의 위치에 정확히 일치하도록 세웠다.

그가 여기에 서 있는 광경이 너무 완벽하게 기억 속의 그것이라서.

나는 게임 속 플레이어와 똑같이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도를 올리는 동작을 해 보였다.

“망각의 축복은…….”

앨라이 쿠스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사람들의 기도를 지켜봐 주는 게 직업인 사람이다.

내가 갑작스럽게 양손을 모으고 눈을 감아도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갑작스레 왜 이러는지 궁금한 눈치로 내 말을 받아 주었다.

“만인에게 평등한 것임을.”

“세이브…… 되나요?”

난 혹시나 싶어 좀 더 직접적으로도 물었지만, 앨라이 쿠스는 내가 하는 말이 뭔지도 모르는 눈치로 눈을 깜박였다.

“네?”

‘……역시 안 되나 보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내 옆으로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왜 양쪽에서 손이 내밀어지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 두 손을 쥐고 몸을 일으킨 나는, 일어나고서야 그 두 손의 주인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즉 마중 나올 걸 그랬습니다.”

두 손 중 하나의 주인인 레이커스가, 나를 자연스레 그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난 손이 두 개 다 잡힌 채로 한쪽으로 당겨지는 게 불편해서 레이커스를 올려다보았다.

‘왜 이래?’

근래 사근사근하게만 굴었던 레이커스의 표정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당황과 짜증이 서려 있는 게 보였다.

난 레이커스에게 놓으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눈치를 볼 필요는 없는데, 레이커스의 눈동자에 서린 당황이 너무 곤혹스러워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뭐지? 신전을 안 좋아하는 것뿐 아니라 기도하는 것도 안 좋아하는 눈치긴 했어. 그런데 신전에서 기도 좀 했다고 저렇게까지 당황할 일이야? 아주 흔한 일 아닌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이야기를 했어요.”

“무슨 이야기를 무릎 꿇고 합니까? 차기 대신관께서는 전도를 성실히 하시는 모양입니다.”

앨라이가 큰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인상을 그었다.

“전도가 아니라 축복을 내려준 것입니다. 말씀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레이커스가 평소와는 달리, 장난기 없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차기 대신관의 축도가 레이디의 무릎을 꿇릴 만큼 대단한 것이라면 좋겠군요.”

“아무리 공작님이라 해도, 비아냥거림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내가 둘의 공방에 당황해서 레이커스의 손을 꽉 쥐자, 그가 내 눈빛을 살피듯 내 눈을 오래 들여다보더니 구겨진 표정을 겨우 풀었다.

그리고 뭔가에 안도한 사람처럼 어깨의 긴장도 조금 느슨하게 푸는 것 같이 보였다.

그제야 레이커스는 앨라이에게 빈정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여기에만 계시면 사회성이 조금 부족하실 수 있지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해석을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절대 처음 말했던 것보다 의도가 더 좋아 보이진 않지만 진심으로 화내는 것보다는 장난 섞인 비꼼이 훨씬 낫다.

“……공작님!”

‘……물론 앨라이에겐 안 그렇겠지만.’

난 앨라이가 머리에 쓴 종이 관을 벗어 들며 레이커스와 한바탕 말싸움이라도 벌일 기세인 것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개와 토끼 같아.’

난 둘의 공방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서, 양손을 다 놓아 버리고 신전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아르비체 님, 이렇게 갑자기 가시는 겁니까?”

뒤에서 조금 당황한 듯한 앨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앨라이를 찾고 있는 어린 신관들의 모습을 보며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앨라이 쿠스 님 여기 계세요!”

“헉, 앨라이 님, 여기 계셨던 겁니까?”

난 앞으로 걷다가 몸을 뒤로 휙 돌려서 뒷걸음질 치며 앨라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바쁜데 이만 들어가세요. 얼굴 봐서 좋았어요!”

앨라이는 어린 신관들이 제게 모여드는 것을 보면서도 아쉬운 얼굴로 인사했다.

“……네에. 저야말로 여기까지 와 주셔서 좋았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네! 가세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내일 연회의 파트너…….”

앨라이가 뭔가 말을 더 하고 있었는데, 순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레이커스가 나와 앨라이의 사이를 가린 모양이었다.

앨라이는 이리저리 고개를 빼면서까지 뒷말을 이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어린 신관들에게 이내 납치당하듯 끌려가고 말았다.

난 빠르게 포기하고서 문득 앨라이와 나 사이에 끼어든 레이커스를 노려보았다.

몇 발짝이나 떨어진 곳에서 날 따라오고 있는데도 고개를 들어 올려 봐야 될 정도로 그는 꽤 키가 컸다.

그리고 도대체 왜 신전을 싫어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들로 장식된 신전과 그는 아주 잘 어울렸다.

평소의 그에게 치명적이고 고혹적인 매력이 있다면, 여기에 있는 그는 천사상들 사이에 세워 두고 싶을 정도로 어딘가 신성해 보이는 매력이 있었다.

‘앨라이 쿠스의 고결함과는 또 다른, 타락 천사 같은 그런 매력이랄까.’

그의 도드라진 이마와 보기 좋은 콧대, 남자치곤 조금 붉은 편인 입술을 차례로 훑어본 나는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레이커스는 내 뒤쪽을 흘끗 살피더니 내게 조언했다.

“뒷걸음질을 너무 오래 치면, 위험합니다.”

“……아, 네.”

“그리고 신전 놈들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실 것 없습니다.”

또다. 그의 흐려진 잿빛 눈동자에서 혼자 남겨진 아이 같은, 고독과 슬픔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읽히는 것이.

난 그의 긴 속눈썹이 눈동자를 덮을 때까지 넋을 놓고 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렇게 신전이랑 안 친하신 줄 알았으면, 함께 오자고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다음엔 저 혼자 올 테니 너무 염려 마세요.”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가까이하실 것 없습니다.”

“……뭐, 일단 알겠어요. 하지만 앨라이 쿠스 님은 제 친구인걸요?”

“친구라…….”

그냥 내 말을 받아서 중얼거릴 뿐인데도, 그의 목소리에서 왜 이렇게 빈정거림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앨라이 쿠스와 레이커스의 사이가 좋아지길 바란 적은 없지만 이렇게 견원지간처럼 구는 것도 피곤하다.

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데, 레이커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리고 너무 이목을 사고 계신데, 여기 계속 서 계실 겁니까?”

‘이목을……?’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신전의 입구에는 신전으로 들어가려는 긴 줄과 오가는 인파가 제법 많았는데 그들의 시선이 다 나에게 박혀 있었다.

‘차기 대신관님이 몸소 배웅을 하시다니…… 대단한 분이신가 보네?’

‘너, 몰라? 아르비체 그린 님이잖아. 왜, 리어먼드가의 샤인 도련님을 구하고…….’

‘알지! 와, 리어먼드 공작님의 연인이신 분?’

‘그래, 공주님도 제치고 공작님을 채 가시길래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했는데, 어쩜, 정말 대단하신 분이긴 한가 봐.’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내 귀에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난 레이커스를 이끌고 황급히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내게 쏠린 이목이 느껴져서 얼굴이 다 달아올랐다.

‘변방의 인기 없는 캐릭터로 살아가는 게 생존에는 훨씬 더 도움이 될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정말.’

레이커스는 내가 얼굴이 붉어져서 자꾸만 없는 옷깃에 얼굴을 파묻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교묘하게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다리 쪽의 사람들에게 내가 안 보이도록 가려 주었다.

그게 우연일까 생각도 해 봤는데, 내가 걸음을 빨리하거나 느리게 해도 보조를 맞추는 것을 보며 확신했다.

난 레이커스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렇게 널 배려해 주고 있다’라는 내색이 하나도 없는 그 얼굴이 너무 얄밉다.

속이 울렁거렸다. 갑자기 망망대해 위에 내던져져서, 뱃멀미 약도 없이 풍랑을 맞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고 있을지 이제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된 것까지 다 곤란했다.

난 또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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