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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78화 (78/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8화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고, 나는 차마 감지도 못했던 눈을 뒤늦게 감았다 떴다.

레이커스의 눈도 나보다 한 박자 느리게 눈꺼풀에 덮였다 뜨였다.

“그린 양, 저는…….”

그 순간,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가 내게 밝힌 ‘지독한 이야기’와, 그가 내게 남긴 도둑 키스 때문에.

그래서 레이커스의 말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다짜고짜 막았다.

그러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을 가장하며 재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앞으로 삼 일 뒤, 그러니까…… 왕궁 연회가 있는 날의 바로 전날이요. 그날 신전에 볼일이 있어요. 앨라이 쿠스 님께서 차기 대신관으로 확정되는 날이라…… 그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거든요.”

깜박.

레이커스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갔고, 많은 뜻을 숨기고 있는 그의 잿빛 눈동자가 차분히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쫓기듯 숨도 채 가다듬지 못하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동행해 주셔야겠어요. 혹시 모르니까…… 제 총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요.”

레이커스는 그와 말조차 섞기 싫어하던 내가, 그에게 동행을 청하는 것을 어떤 허락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처음 보는 방식으로 웃었다.

항상 내가 재밌다는 듯 웃곤 하는 그였는데, 지금의 웃음은 뭔가 달랐다.

눈을 사르르 감고, 내가 한 말이 아주 달콤한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었다.

난 그 순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서, 시야의 한구석에서 어떤 글자들이 호감도의 갱신을 알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지금은 그 글자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난 거울 앞에 서서 멍하니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데……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난 가벼운 열감이 느껴지는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오늘 아침에 외출할 때까지만 해도 레이커스와 다시는 말을 섞지 않을 요량이었는데…….

하지만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정리될수록, 심장이 급속도로 식었다.

‘거미에게 물리면 또 다른 거미가 된다고……? 그렇다는 말은, 내가 죽인 거미는 대체 뭐란 말이야?’

나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몸을 굳혔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파란 머리카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욱.”

속이 울렁거렸고, 토기가 치밀었다.

‘레이커스가 말한 게 진실이 아닐지도 몰라. 하찮은 변명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좀비라고 생각하자. 좀비 영화 같은 걸 봐도, 인간이 좀비에게 물리고 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잖아.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

가빠 오는 숨을 가라앉히려고 애써 그 생각을 반복해 되뇌었다.

‘원래 던전에만 있어야 할 거미가 파크에 돌아다니면서…… 마치 좀비처럼 퍼지고 있는 거니까, 좀비와 다를 바 없지.’

근데 그렇다면 좀비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처럼 순식간에 온 파크가 거미로 뒤덮이고도 남았어야 옳다.

‘그럼 그러지 못하도록 레이커스가 그걸 막고 있다는 걸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거미가 완전히 절멸해야 맞을 텐데.

‘그게 아닌 걸 보면, 누군가 계속해서 새로운 거미를 파크에 공급하고 있거나…… 던전으로부터 유입되는 통로가 있나?’

한참 생각에 골몰해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입술을 만졌다.

이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데도 꽃내음과도 닮은, 홍차의 부드러운 향기가 자꾸 나는 것 같고,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이 자꾸만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당혹스러워서. 너무 갑작스럽고…… 그리고…….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정신 차리자. 아직 의심할 여지는 남았잖아.’

나는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그라는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아예 확실하게 의심해 버리면 모든 것이 편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지도 못했으니까.

난 또 어쩔 도리 없이 레이커스의 말에 섞인 진실과 거짓을 다시 한번 판별해 보기로 했다.

* * *

짧고 가볍고 부드러운, 레이커스와 나 사이에 있었던 가을날의 해프닝은 그냥 해프닝으로 남았다.

그 뒤로 3일 동안, 난 내도록 레이커스의 방 뒤에 있는 비밀 공간에 처박혀 사격 연습만 했다.

레이커스는 내게 쉬라고 자꾸 권했지만, 내가 완강하게 열어 달라고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비밀 공간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놀랄 정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난 그로부터 들을 말이 없었다.

레이커스가 먼저 내게 말을 걸려고 하면, 난 그걸 들어주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일방적으로 거미 크리쳐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었고, 사격에 대한 지도가 필요하면 요청했으며, 레이커스는 그저 그에 응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는 동안 저택 안에서 레이커스와 내 사이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훨씬 더 많이 떠돌게 된 눈치였지만, 난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 훨씬 더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픈 문제가 산적해 있었으니까.

가장 대표적인 게 우편배달부 모리슨 알터에 대한 거였다.

난 레이커스를 통해 그에 대한 지명 수배를 해제하도록 했지만, 이미 그가 범인일 거라는 인식이 온 파크 안에 만연해 있었다.

게다가 어디에 있는 건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그를 찾아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연회 바로 전날이 되었다.

앨라이 쿠스가 차기 대신관으로 지명받는 행사는 꽤 늦은 오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식이 시작할 시간에 맞춰 느지막이 리어먼드가를 빠져나왔다.

레이커스는 정말로 신전을 좋아하지 않는지, 나와 동행은 했지만 식이 거행되는 뒤뜰까진 오지 않고 다리 언저리에서 날 배웅했다.

“시야에는 항상 둘 테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곳에만 있으면, 언제 습격당해도 지킬 수 있다는 걸까?’

오만일지도 모르고, 진실일지도 모른다.

난 레이커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요히 몸을 돌려 행사가 거행되고 있는 뒤뜰로 향했다.

신전의 행사라는 것은 생각보다 단출했지만, 생각보다 볼거리가 있었다.

앨라이 쿠스가 대신관의 관을 하사받고, 기도문을 읊는 것은 지루했기 때문에 난 바로 옆의 강에 장식된 볼거리를 구경했다.

강 위를 따라 길게 장식된 수십, 수백 개의 밧줄을 따라 기름을 듬뿍 먹인 하얀 종이 같은 것들이 줄줄이 널렸다. 그리고 어린 신관들이 돌아다니며 종이에 불을 붙이자, 종이에서 불꽃이 흩날리며 강을 환하게 밝혔다.

마치 강에 불이 붙은 것 같은 아름다움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아름답죠?”

얼마나 오래 넋을 빼고 있었는지, 누가 옆으로 다가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옆을 돌아보자, 오늘의 주인공인 앨라이 쿠스가 머리에 종이로 만들어진 관을 쓰고 내게 다가왔다.

게임 속에서는 이런 행사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리고 앨라이 쿠스가 대신관이 된 이후의 모습만 봤기 때문에 저런 어설픈 종이 관을 쓴 모습 같은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저런 종이 관이라니, 귀여워.’

새하얗고 정갈한 그에게 종이로 접어 만든 관은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붉은 불꽃이 얼굴에 어른거리는 채로, 그는 내 옆으로 다가와 난간에 기대어 함께 강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단아한 어투로 말했다.

“제 머리에 쓴 것도 종이 관, 지금 불타고 있는 것도 종이들이죠.”

“네?”

“이 의식은 제가 쓴 관의 무게도, 제 삶의 무게도 모두 저렇게 한 줌 재로 타들어 가 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모든 것을 아등바등 속에 담고 있으려 하지 말고, 힘든 것이 있다면 언제든 신전에 와서 망각의 축복 속에서 모든 것을 잊고 쉬라는 게 저희의 교리입니다.”

교리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망각이라는 말이나 한 줌 재로 타들어 가 버릴 거라는 말은 어딘가 허망해 보이는 앨라이 쿠스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역시 이렇게 와 보길 잘했어요. 요즘 너무 뒤숭숭해서 밖으로 나오기가 조금 꺼려졌었는데…….”

앨라이 쿠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긋 웃었다.

“저야말로, 이렇게 직접 와 주셔서 기쁩니다.”

[앨라이 쿠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296/297)]

“이제 저도 아무런 힘이 없는 평 신관이 아닙니다.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난 작게 웃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숨을 곳을 찾아다니는 작은 토끼 같았는데, 우리 세이브 전담 NPC가 언제 이렇게 많이 컸나 싶어서.

고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감사합니다. 기꺼이 부탁드릴게요.”

난 정말 진심으로 고맙다고 한 건데, 앨라이 쿠스는 어딘가 불만이 남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제가…… 아르비체 님께는 어려 보입니까?”

“네?”

“제가 아르비체 님보다 한 살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반말한 적이라도 있던가요?”

뜻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내가 눈을 깜박이며 되묻자, 앨라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게임 속에서는 딱딱한 얼굴을 한 그의 모습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난 그의 울상조차도 어딘가 반갑게 느껴졌다.

즐거운 기분으로 그의 얼굴을 신나게 뜯어보는 사이에, 앨라이가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불꽃들이 종이를 갉아 먹고 있었고, 그 불꽃의 향연을 강이 반사하고 있는 덕분에 앨라이의 희기만 한 얼굴도 어딘가 붉게 보였다.

난 난간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제 얼굴 봤으니 됐어. 이 이상 레이커스를 혼자 내버려 뒀다간, 그가 날 찾겠다고 여기까지 올지도 몰라.’

“전 이제 돌아가 볼게요.”

“아…… 가시는 겁니까?”

“네. 저희 고용주님과 같이 왔거든요.”

“……리어먼드 공작님이요?”

앨라이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고 보면 앨라이와 공작은 저번에도 오랜만이라는 둥, 레이커스가 신전을 어지간해선 방문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눴었지.

“레이커스 님께서 여기까지 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놀랄 일이냐고요? 리어먼드 공작님은 절대로 여기까지 오실 분이…….”

그가 웅얼거리다가 나를 바라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어떤 감정이 번져 나갔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표정을?

마치…… 호승심? 누군가에게 결코 지고 싶지 않다는 다짐 같은…… 그런 감정?

앨라이의 표정을 읽어 내려 애를 쓰는 사이, 그가 어느새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작님께서도 어지간히 진심이신 모양이군요. 저번에 유치하게 구실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는 지금까지 짓고 있던 멋들어진 표정 대신, 어딘가 불편하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앞장서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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