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7화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상점 안을 눈에 담았다.
밀로라드의 비밀 상점에 있는 아이템들은 유리로 덮인 장식장 안에 들어 있었다.
난 아이템들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아이템의 설명창이 뜨는 것을 확인해 보았다.
[마녀의 수정구슬 : 메인 캐릭터의 호감도를 3단계, 서브 캐릭터의 호감도를 4단계 상승시켜 줍니다.]
[망각의 성수 : 사제의 축복을 즉시 적용합니다.]
[아침의 신발 : 스테미너 최대치+120]
[매혹의 드레스 : 매력 최대치+120]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방 안 가득한 아이템들은 모두 눈이 돌아갈 정도로 좋은 것들이었고, 동시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비쌌다.
가장 싼 물건도 기본적으로 5,000G는 했고, 값비싼 물건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로스 그린에게서 돌려받은 유산이 나름대로 꽤 큰 금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로는 여기 있는 물건 중 딱 하나밖에 못 사겠는데?’
애초에 내가 사러 온 물건은 따로 있었다.
“무기는 어디 있어?”
“아, 총알을 찾는다고 했었지. 여기.”
밀로라드가 서랍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작은 벨벳 주머니에는 은사로 육망성이 그려져 있었다.
난 그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수호자의 총알(12) : 은제 총알. 크리쳐와 살인자들에게 유효합니다.]
‘……살인자들?’
난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게임의 타이틀인 <살인자들의 밤>의 ‘살인자들’을 뜻하는 걸까?
내가 한참 생각에 잠겨 그걸 들여다보고 있자, 밀로라드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굳이 안 사도 괜찮아. 나도 이게 말이 안 되는 가격이라는 걸 아니까.”
“……아, 이게 얼마야?”
“12,800G.”
진짜 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내가 물려받은 유산을 다 털어도 살 수 없는.
하지만 모든 아이템의 존재에는 이유가 있었다.
납치범은 레이커스의 총알을 맞아서는 그냥 아플 뿐이라고 했지만, 레이커스는 그걸로도 정중앙을 잘 조준해서 가면을 깨뜨리면 일단 시간은 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죽일 수 없으니까.
이 총알로는 좀 더 피해를 입힐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하트가 두 개밖에 없는 처지에서 살지 말지를 망설이는 거야말로 사치다.
“10,000G는 지금 내고, 나머지는 나중에 줘도 괜찮을까?”
밀로라드는 내 말에 내 주머니 사정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그냥 10,000G만 줘.”
“아냐, 그러기엔 미안하잖아.”
“에이, 이런 비싼 걸 달리 사 갈 사람도 없는데, 뭘.”
난 품에서 거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내놓았다.
밀로라드는 내게 총알이 든 주머니를 넘겨주면서 안쓰럽다는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이런 거라도 사야 안심이 돼서 그러는 거지? 정말, 그 납치범 자식.”
유리 진열장 안에서 작은 반지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진실의 반지 : 말의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0/1)]
일회용 아이템인 모양인데…… 쓸모는 둘째 치고 투명한 유리 반지의 디자인이 단순하고 예뻤다.
왼손 검지에 껴 보고 이리저리 돌려보자, 마음에 쏙 들었다.
“난 절대 흥정도 안 하고 덤도 안 끼워 주는 사람인데, 너니까 흥정도 하고 덤도 주는 거야.”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밀로라드가 말하는 고마움은 아무래도 샤인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나는 샤인이 슬픔에 대해 말했던 것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밀로라드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부터 얼굴을 구기더니,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게임 속에서는 한 줄 서술로 처리되고 마는 이야기인데…….’
죽음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무게라는 게, 참 무거웠다.
밀로라드와 나는 낮이라는 것도 잊고, 그 뒤로도 한 시간 가까이 와인을 마셨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빈 와인 병이 세 개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제 가 볼게.”
“응.”
“또 와. 아니, 다음엔 외과 병동에 있는 아지트도 구경하러 가자.”
“……너희 정말 공평하게 공간을 분배하는구나?”
“후후, 우리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군.”
밀로라드가 킬킬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아만타 경관과 나는 상점에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직원들의 인사 세례를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나는 꾸물꾸물한 하늘을 한참 노려보았다.
‘외출의 목적 중 하나는 이뤘는데, 두 번째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리슨 알터의 누명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적어도 왕궁 연회 전에는 어떻게 해 주고 싶었다.
‘조금 더 돌아다니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해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에 오르던 나는, 누군가 뒤에서 날 쳐다보는 것 같은 감각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아만타 경관이 문을 잡아 주다 말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며 내가 바라본 방향을 살폈다. 한참을 둘러보던 그녀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세요? 누군가 있습니까?”
난 천천히 고개를 저었지만, 누군가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나는 세 번이나 마차를 멈춰 세우고 주변을 확인했다. 분명 누군가 숨어 있기도 힘든 대로였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진짜 누가 날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PTSD에 시달리는 건지…….’
아만타 경관이 곁에 있었지만, 솔직히 백 퍼센트 의지가 되지는 않았다.
난 아이템 창에서 꺼내 든 총을 소매 속에 숨긴 채로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눈을 눌러 감았다.
‘레이커스가 곁에 있을 때는 납치범에 대해서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으면 생각도 나지 않았었는데…….’
“경관님.”
“네?”
“……그냥 돌아가요.”
“벌써 말입니까?”
“네. 잠깐이나마 바깥 공기를 쐬니까 좋네요. 이만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난 마차가 리어먼드가로 향하는 익숙한 경로로 들어서고서야 마음속 한편에 안심이 스며드는 걸 알아차렸다.
아직 내가 외출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가 리어먼드가로 들어설 때, 고저택 앞에 금발의 남자가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가끔, 레이커스가 우수에 찬 눈빛을 해 보일 때마다 그의 단정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종종 비 맞은 개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곤 했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정말 불쌍한 척은 혼자 다 해.’
난 그를 못 본 체하려 애쓰며 아만타 경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전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오늘 하루 함께 돌아다녀 줘서 고마웠어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네.”
손을 흔들어 경관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레이커스가 내가 지나갈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던 게 맞는 모양이었다.
난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이젠 듣고 싶은 말도 없었고.
레이커스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가 한 발짝 옮겨 내 앞을 가로막았다.
짜증이 나서 반대쪽으로 한 발짝을 옮기자, 레이커스도 똑같이 발을 옮겨 내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뭐 하는 거야, 유치하게.’
난 약이 바싹 올라 고개를 쳐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독기가 올랐어도, 상대가 맞장구를 쳐 줘야 화를 내는 보람이 있는 법이다.
평소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상냥한 빛을 띠고 날 바라보기만 하는 그의 잿빛 눈동자를 보는데, 절로 그를 노려볼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비켜 주세요. 지나가게.”
“화내지 마십시오.”
“……화내는 거 아니에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합니까?”
이제 레이커스의 저 대사도 지긋지긋했다. 내가 뭔가를 잊지 않았는지 집요하게 살피는 질문들.
그 질문들이 레이커스에게 중요한 것이겠거니 생각했고, 그래서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이젠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자꾸 그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이젠 놀리는 것 같으니까.”
레이커스의 눈동자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기억하고 있군요. 그럴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공작님, 비켜 주세요.”
“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떤 이야기? 인제 와서 또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하고, 또 어떻게 기대감을 주고, 또 어떻게 실망시킬 건데?’
이젠 더 이상 싫다. 너무 피곤하고 지친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레이커스도 더 이상 나를 막고 서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옆으로 반 발짝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그의 옆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레이커스가 뭔가의 결심을 굳힌 것처럼 입을 뗐다.
‘이제 그가 어떤 말을 해도, 결코 들을 생각도 없고 발을 멈출 생각도 없어.’
난 아무것도 듣지 않을 셈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그 거미에게 물린 인간은, 똑같은 거미가 됩니다. 믿기지 않을 테지만.”
‘……지금, 뭐라고 했어?’
레이커스에게는 늘 그랬듯이, 난 또 방금 세운 결심을 무너뜨리고 레이커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딘가 난처한 표정으로, 눈썹 끝을 아래로 떨어트린 채 날 바라보았다.
“……지독한 이야기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은 어쩐지 이 이야기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면서도 레이커스는 자꾸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고, 내 표정을 쉴 새 없이 살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레이커스의 말이 도저히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아서.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입니다.”
나는 레이커스의 잿빛 눈동자를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레이커스의 눈동자는 빛이 제대로 내리쬐지도 않는 구름 아래서도 빛으로 반짝였고, 맑았다.
그는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듯, 느리게 사방을 한번 둘러보곤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절 의심할 거라는 건 압니다.”
“도대체…… 만약 그게, 그게 정말이라면…… 왜 진작에 얘기하지 않았죠?”
“파크의 사람들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의 그릇이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본 바로는.”
“……그걸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요. 그것에 얽힌 모든 것을, 사람마저 잊는 것 같습니다.”
나는 또 한 번, 흔들렸다.
그의 말은 진실처럼만 들렸다.
“……그러면, 이걸 저한테 이야기하는 이유는요?”
레이커스가 내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번 한 번의 삶에 모든 걸 걸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가 중얼거린 영문 모를 말을 해석하기 위해 있는 힘껏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레이커스가 허리를 굽히고 내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고서야.
내 입술에서, 레이커스가 좋아하는 홍차의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나고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