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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76화 (76/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6화

아만타 경관과 함께 상인 길드의 입구에 들어선 나는, 입구의 카운터부터 찾아갔다.

카운터의 직원은 나를 보더니 비딱하게 앉아 있던 자세를 고치곤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게 누구세요. 아르비체 님 아니세요? 여긴 어쩐 일이시죠?”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마부들도 내 이름을 알 정도던데, 당연히 정보의 중심이 되는 상단 관계자라면 소문에 더 빠삭하겠다 싶어서.

“밀로라드를 찾아왔는데요.”

“어머, 밀로라드 드라셀 님이요? 지금은 길드가 아니라 상점을 살피러 가셨는데…… 여기 계시면 제가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상점에 있다고? 기분 전환도 할 겸, 상점 구경을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바로 찾아가 볼게요.”

“그러시겠어요? 바로 옆 골목을 돌면 나오는 곳이니 찾기 어렵진 않을 거예요. 시종을 한 명 붙여 드릴게요.”

“감사해요.”

“밀로라드 님께도 제가 안내를 잘해 줬다고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 네에…….”

고개를 꾸벅하고 몸을 돌리는데 시종 두 명이 얼른 나서더니, 한 명은 내 앞길을 안내했고 또 한 명은 길드 입구로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아마, 밀로라드에게 내가 오는 걸 알리러 가는 모양이지…….’

그렇게 급한 용무로 온 것도 아닌데 괜한 소란을 떠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골목을 돌았다.

파크에서도 꽤 큰 규모의 거대한 상점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번에 내가 앨라이를 만났던 살롱의 바로 옆 건물이었다.

‘아…… 여기가 밀로라드의 상점인 줄은 몰랐네.’

내가 밀로라드의 손님인 걸 아는 직원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해 보였다.

워낙 가게 규모가 큰지라, 열 번도 넘는 인사를 받고서야 제대로 된 입구로 들어설 수 있었다.

“왔어?”

밀로라드는 날 보곤 얼른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밀로라드의 상점은 정말 온갖 것을 다 취급하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안쪽에 있는 별실에 들어가기까지, 난 온갖 이국적인 것들이 모여 있는 코너와 귀족들 취향의 가구들이 한데 모여 있는 코너를 지나 고서적이 따로 관리되고 있는 코너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다양한 물건을 취급하는 것치곤 굉장히 정리가 잘되어 있고, 코너마다 다른 분위기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가장 안쪽에 있는 너른 방에 들어섰고, 아만타 경관은 방문 앞에 대기하고 섰다.

‘여기도 세 사람의 아지트구나.’

여기저기 덮기 좋은 담요며 카드게임을 하다 만 흔적 같은 게 보이는 것도 그랬고, 집어먹기 좋은 알록달록한 과자며 세 쌍의 슬리퍼가 놓여 있는 걸 봐도 그랬고.

내가 들어서는 걸 본 밀로라드는 새 슬리퍼 한 쌍과 차를 내오라고 주문한 뒤 날 소파 안쪽에 앉혔다.

“가게 너무 예쁘다. 위치도 좋고.”

“왔다 갔다 하며 관리하기 좋은 위치라서, 여기로 했지.”

“집이 이 근처인가 봐?”

“아아, 그건 아니고. 살롱이 내 거라서.”

‘……그래서 저번에도 살롱에 있었던 거였어?’

애초에 호감도를 올리는 난이도가 극악인 캐릭터인 만큼,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밀로라드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하긴, 귀족들하고 친해지는 거에 크게 흥미도 없는 세 명이 왜 거기서 놀고 있나 싶긴 했는데…….’

난 고개를 끄덕이곤 픽 웃었다.

밀로라드는 내어져 온 차를 내 앞에 따라 주곤 걱정된다는 얼굴로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하루 만에 상했는데?”

난 내 얼굴을 손으로 짚어 보았다.

‘그렇게 티가 날 만큼 안 좋아 보이나?’

“……아냐, 아무것도. 그냥 고민할 게 있었어.”

“레이커스 님 문제야? 어떻게 돼 가?”

“……어떻게 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그냥 그렇지 뭐.”

“어떻게 되고 말고 할 게 없다고?”

밀로라드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눈치를 살폈다.

“오늘 입궁하신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인제 와서 공주님하고 뭐 어떻게 좋은 소식을 발표하진 않으시겠지? 그 반반한 얼굴로 널 그렇게 홀려 놓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냥 여기 앉아만 있어도 레이커스 님이 너한테 간까지 빼 줄 기세라는 소문이 귀가 간지럽도록 들리던데.”

‘……도대체 그런 소문들은 누가 흘리는 거야?’

난 황당함에 다시 한번 한숨을 폭 내쉬었다.

밀로라드는 이제 정말 내가 걱정된다는 듯 표정을 심각하게 구겼다.

“뭐야, 정말로 무슨 일 있구나? 레이커스 님이 너한테 잘못하는 거 같으면 그냥 내다 버리고 우리한테 와. 왕궁 연회도 그냥 우리랑 가자.”

방금까지만 해도 응원해 주더니만, 내가 침울한 눈치이자 파크에서 제일 잘난 공작도 냉큼 차 버리라고 말하는 게 고맙고 웃겼다.

아직 차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속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동행하는 게 아니면, 참석 못하는 걸로 되어 있어서.”

“……뭐야, 너무 별로다. 리어먼드 공작님 그렇게 안 봤는데, 보기보다 엄청나게 구속하는 스타일이네.”

난 레이커스가 내 안위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납치범이 아직 나를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납치범이 인간이 아니란 이야기도 해도 좋았지만, 레이커스를 옹호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어서.

내가 가만히 찻잔만 노려보고 있자, 밀로라드가 걱정된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가도 괜찮아.”

“연회에?”

“응. 이제 여자들이 남자 파트너랑 같이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그런 구시대는 지나갔단 말이야. 여자끼리 가는 게 훨씬 더 재밌을걸?”

그건 너무 당연한 말이다.

입 밖으로 내서 이야기하는 게 새삼스러울 만큼.

“연회 문화도 바뀌어야 해.”

“그러니까 말이야. 짝짓기하려고 모이는 것도 아니고.”

소녀들의 꿈이라는 왕궁 연회를 멋대로 깎아내리는 대화에 흥이 올랐는지 밀로라드는 차를 한쪽으로 밀어 두고 와인을 꺼내 들었다.

“낮부터 갑자기?”

“고민 있을 땐 술이지. 이거, 떫지 않고 괜찮을걸?”

“어? 응…….”

난 거절할까 하다가, 내 앞에 놓인 와인 잔에 쪼르륵 따라진 투명한 술의 향을 맡아 보았다.

달콤한 꽃향기는 썩 기분 좋게 느껴졌다. 밀로라드를 따라서 잔을 살살 흔들어 입에 머금어 보자 도수도 세지 않고 꽤 달콤했다.

입 안에 말끔하고 기분 좋은 꽃향기 같은 게 맴돌았고, 와인 특유의 떫은맛도 거의 나지 않았다.

문득, 레이커스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따금,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굳이 또 하루를 버텨서 내일을 맞이하는 게 무의미할 때가 있잖습니까?’

‘……네?’

‘그럴 때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조금 손이 가고 귀찮은 점도, 확실하게 마음의 위안이 된달까요.’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의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몰라.’

정말로 사소한 것은 도움이 되었다. 향을 맡고, 와인을 삼키고도 꽤 오래 지속되는 부드럽고 좋은 맛을 느끼는 것은 기분을 썩 좋게 해 주었다.

나는 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집에서 굳이 나오면 뭐 해? 레이커스에 대한 생각밖에 안 하는데.’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생각을 전환하려 애쓰는데, 밀로라드가 작게 웃었다.

“와인, 새콤해?”

“응?”

“아니, 그런 표정을 짓기에.”

‘……레이커스는 맨날 나보고 표정이 너무 뻔하다고 하는데, 이거 봐. 하나도 안 뻔하잖아. 표정만 보고 내 속내를 다 읽는 레이커스가 이상한 거 아냐?’

이젠 레이커스의 생각만 주야장천 하는 것이 놀랍지도 않아서, 난 그냥 허탈하게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냐. 너무 맛있어. 한 잔 더 마실래.”

“그래그래. 우울할 땐 간혹 술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 너무 의지하면 르뮈에처럼 외상 전문 병원장인 주제에 장기 상태는 안 좋아진다거나 하는 일을 겪게 되지만.”

난 그녀의 말에 낄낄거리고 웃다가 문득 밀로라드의 옆에 놓인 신문을 흘끗 쳐다보았다.

어제자에 이어 오늘자 신문에도 신문 배달부 모리슨 알터에 대한 지명 수배나 다름없는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밀로라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난 경찰이 아니니까. 경찰이 가지고 있는 증거에 뭔가 결정적인 게 있으니까 범인으로 이렇게 지목한 게 아닐까?”

내가 뭐라고 해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잠깐 한숨을 쉬는데, 밀로라드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라떼도 르뮈에도 나도 이 수사 방식이 완전히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왜?”

“이거…… 모리슨 알터의 가족사진인데.”

난 밀로라드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사진을 바라보았다.

우편물이 든 것으로 보이는 가방을 멘 남자의 어깨에 딸이 매달려 있고, 부인이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단란해 보이는 가족사진이었다.

“모리슨 알터는 행방불명이지만, 이 가족들은 아직 원래 살던 곳에 있거든. 뭐 얼마나 대단한 증거가 있어서 이렇게 공개수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인이랑 딸은 요즘 가는 길마다 돌 맞고…… 아니, 돌이 뭐야, 귀족 나리들에게서 온갖 협박을 다 당하고 있는 모양이야.”

정말 문제다.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더 큰 문제다.

“……범죄자라고 완전히 확정되기 전엔 무죄라고 추정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말이야. 이렇게 경찰이 무능해서야 어디 발 뻗고 자겠어? 모두 호신 무기라도 하나씩…… 아, 맞다!”

밀로라드는 걱정이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갑자기 잔을 놓고 일어나 그녀 옆에 쭉 걸려 있는 몇 개의 설렁줄 중의 하나를 골라 잡아당겼다.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보라색 커튼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은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 내 비밀 상점에.”

밀로라드가 씩 웃으며 윙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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