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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75화 (75/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5화

그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들었던 것 같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난 레이커스에게 뭔가를 연기할 생각도 못하고, 그냥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수십, 수백 개의 계단을 허겁지겁 올랐다.

“그린 양?”

‘뻔뻔하기 짝이 없는 살인마 자식.’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 허겁지겁 계단을 올랐다.

등불을 놓고 왔다는 것을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지만 어떻게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범인이라 생각하고도 매일매일 얼굴을 맞대고 식사하고 지내 왔으면서, 수많은 증거 위에 하나의 증거가 더 추가될 뿐인데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버티기 힘들었다.

의심스럽게만 생각하는 건 괜찮았는데.

왜 괜히 사람을 믿고 싶게 만들어서.

왜 괜히 잘해 줘서.

‘……개자식.’

안 그래도 눈앞에 있는 거라곤 칠흑 같은 어둠뿐인데, 눈물이 앞을 더 가렸다. 그가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엉엉 소리 내서 울었을지도 모른다.

난 점점 느리게 걸으며 속절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왜 울어. 울긴 왜 울어.’

나로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그칠 때쯤, 뒤에서부터 희미하게 빛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레이커스다.’

그의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골치가 또 아팠다.

난 희미한 빛에 의지해 더 빠르게 발을 놀려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계단을 급히 오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고 숨이 차는 일이었다.

‘……이 많은 계단을 언제 다 올라가?’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다. 뒤늦은 반성을 하며 벽을 더듬더듬 짚어 가며 계단을 오르는데, 손에 뭔가가 덜컥 걸렸다.

“이게 뭐지?”

아주 희미한 빛에 의지해 벽을 더듬더듬 만져 보자 꽤 커다란 네모 모양으로 틈이 있었다. 마치 뭔가의 문처럼 보였다.

‘……지하실이 그렇게까지 깊은 이유는, 지하실까지 가는 중간에 다른 층의 방이 또 있기 때문이었나?’

더듬더듬 계속 문의 형태를 만져 보는 사이에 손잡이처럼 보이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등 뒤에서부터 쫓아오는 불빛이 점점 더 밝아져 온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난 이것을 지금 열어 보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여기까지 올 일도, 이걸 열어 볼 일도 없을 것 같아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의외로 수월하게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하지만 아래에서 위로 열리는 그 문 너머로도 보이는 것은 여전히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고저택 여기저기에 의미심장한 비밀 공간을 여럿 가지고 있잖아. 여기도 따로 용도가 있는 공간일 게 틀림없는데.’

난 한층 더 바짝 쫓아온 불빛을 보며, 일렁이는 어두운 빛에 의지해 조심스레 그 문 너머로 발을 들여 놓았다.

“거기 누구 계세요?”

내 말소리가 울리며 퍼져 나갔다.

쐐애-!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누군가 있는 걸까?’

한 발짝 더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쐐애애애액-!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기분 나쁜 소리가 고막이 터질 정도로 크게 들렸다.

그리고 아주 가까워진 등불 빛에 눈앞이 확 밝아졌다.

난 내가 들어선 공간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고 거대한 텅 빈 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바로 앞에 지옥에서 기어 나온 듯한 모양새의 거대한 거미가 서 있다는 것도.

놀랐다.

놀랐지만…… 처음에 이 크리쳐를 봤을 때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얼어 있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동안 나도 많이 변했다.

“조심……!”

레이커스의 말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난 몇 번이고 해 왔던 대로 아이템 창을 빠르게 열어 리볼버를 꺼냈다.

안전장치를 풀고 조준점에 의지하지 않은 채 거미의 머리통을 노려 총을 쏘는 데까지 2초? 3초?

탕! 탕, 탕!

지하 공간이라 그런지, 총성은 기분 나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꽤애애액, 꽤애액-!

크리쳐의 거대한 크기에 비하면 내 총알은 아주 조그마했지만,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거미는 온몸과 여덟 개의 다리를 뒤틀어 대며 그 기괴하고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이빨이 빽빽하게 돋아 있는 입 속에서 침이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탕!

그 기괴한 입속에 또 한 방의 총알을 박아 넣은 순간, 몸부림치던 거미의 형체가 바닥으로 쓰러지듯 무너져 내렸다.

“……이런.”

레이커스의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번쩍 들렸다.

쿵!

그리고 내가 서 있던 자리로 거미의 몸뚱어리가 쓰러졌다.

거기에 그대로 서 있었다면 상상하기도 힘든 무게에 짓눌려 버렸을 테다.

굉음 이후, 기묘하리만큼 조용한 정적과 날 안아 든 레이커스, 총을 든 채의 나, 그리고 주황빛을 뿜고 있는 등불만이 남았다.

“괜찮습니까?”

난 짜증스레 레이커스의 손을 밀쳤다. 그는 내가 계단에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놓아 주었다.

하지만 난 그가 방금 나를 구해 줬다는 사실도, 이렇게 나를 배려해 주는 것도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총 실력은 하루 만에 정말 일취월장했군요. 확실히 재능이 있습니다.”

“저 거미는 대체 뭐죠?”

“그린 양.”

“그리고 저는 왜 구해 주는 거예요? 왜 이러는 거냐고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다 설명하겠습니다.”

방금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뻔히 봤으면서도 레이커스는 대답을 미뤘다.

기가 막혔다.

알고는 있었다.

이걸 따져 묻는다고, 그가 다 대답해 줄 리가 없다는 걸.

도대체 저 망할 거미 크리쳐가 여기 왜 있는지, 레이커스의 지하실에 왜 실종자의 머리카락이 있는지.

하지만 이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에는 너무 지쳤다.

너무 피곤했다.

그가 차라리 날 구해 주지 않았으면 싶었다.

‘……이게 뭐야. 지옥 같아.’

“……그린 양에게 제 주박이 듣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여길 찾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제 잘못입니다.”

그의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난 그냥 계단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감싸 안고, 떼를 부리는 철부지 꼬마처럼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무엇을 사과하는 걸까.

레이커스는 내가 왜 이러는지 묻지도 않고, 날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난 내려놓으라고 발버둥을 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팔을 감아 안기 편하도록 안기지도 않고 그냥 팔다리를 내던져 놓은 채 한 계단 한 계단 그가 오를 때마다 몸이 흔들리는 감각을 느끼기만 했다.

계단이 질릴 정도로 많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언젠가 지쳐서, 혼자 걷기에도 힘들고 무겁다고 하면서 날 내려놓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냥 눈을 감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내 기대를 배신하는 그는, 나를 안은 채로 덤덤하게 그 지옥같이 긴 계단을 끝까지 덤덤하게 올라갔다.

* * *

번쩍.

게임 속에 들어와서, 이 고저택에 살면서……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이 힘든 적도 많았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나는 레이커스가 날 침대까지 데려다줬던 것도, 내게 뜻 모를 사과를 남기고 사라졌던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대로 잔 건지, 어쩐 건지…….

생각이 너무 많았던 간밤에는 제대로 자지도 못해서 그 때문에 온몸이 뻐근했다.

“……하아.”

한숨을 쉬며 팔을 들어 올리는데, 어깨와 팔도 알이 배긴 듯 아팠다.

‘……아, 어제 사격 연습을 너무 많이 했나 봐.’

그리고 뜻하지 않게 실전까지 경험해 버렸고.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할 지경이다.

난 한숨을 몰아쉬곤 폭신폭신하고 까슬까슬한 가을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 위까지 폭 덮었다.

‘……진짜, 최악이야.’

어제 하루 만에, 레이커스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찍은 것 같았다.

그에 관한 생각이 롤러코스터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너무 지치고 힘이 든다.

‘……인제 어쩌지? 뭐가 뭔지…… 점점 더 모르겠어.’

새하얀 이불만 한참을 노려보다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문밖에서 사용인들이 오가는 소리와 멀리서부터 풍기는 고소한 빵 굽는 냄새 같은 것들에서 곧 아침 식사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깊은 고민에 짓눌려 있어도, 일상은 잘도 굴러 간다.

‘……그래, 일단 당장 해야 하는 것들을 하면서 생각해 보자.’

손으로 꼽아 가며 할 일을 하나씩 차분히 떠올려 보았다.

‘무엇보다도 당장…… 트리버 경감이 신문 배달부를 지명 수배하는 것부터 어떻게 해야지. 그리고 밀로라드에게 다녀와야 하고…… 며칠 앞으로 다가온 앨라이의 차기 대신관 지명식에도 가 봐야 하고…….’

또, 뭐가 있나?

‘……그리고 사격 연습도 더 하고 싶고…….’

손등 위를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살살 겹치던 조심스러운 촉감이 절로 떠올랐다.

난 입술 안쪽 살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또 깨물었다가 놓았다. 마른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손등을 다른 손으로 비벼 다른 생각을 억지로 지워 버리는데, 가벼운 발소리 두 개가 내 문을 향해 달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난 이불을 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생각은 뒤로하고, 오늘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 레이커스는 없었다.

‘의외네.’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뻔뻔하게 고개를 들이미는 그였는데.

어제의 일이 내게는 충격이고 거북하더라도, 레이커스에게는 그럴 것도 없을 텐데.

난 아이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블리에 씨를 불러 말했다.

“오늘은 외출을 좀 할 생각이에요.”

레이커스가 내게 이번 주는 쉬어도 좋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블리에 씨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어요? 오늘부터 날씨가 좀 쌀쌀할 텐데 두꺼운 겉옷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하면 제가 좀 준비해 드릴게요. 그리고 아만타 경관님을 부르겠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레이커스가 함께 가곤 했었는데, 오늘은 아만타 경관을 바로 부르겠다고 하는 거로 봐서…… 레이커스가 미리 말을 해 둔 모양이지?’

난 그렇게 생각하다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그와 함께하지 않는 외출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게 웃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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