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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74화 (74/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4화

한 번 와 본 곳이었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쉽사리 적응되지 않는 것이다.

“레이커스?”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주 멀어졌던 발소리가 뚝 멎었다. 그러곤 재빠르게 내 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멀어지는 것도 무섭지만, 돌아오는 것도 무서워.’

“너무 어둡지 않아요? 괜찮아요?”

“……아, 이런. 등이 꺼진 모양이군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몰랐습니다.”

내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말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 태연했다.

‘아니, 모를 게 따로 있지……? 레이커스의 눈엔 적외선 센서라도 달렸어? 내가 같이 안 왔으면 혼자서는 빛도 필요 없이 다닌다는 거야?’

하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번에 이 계단에서 레이커스를 마주쳤을 때도 등을 가지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마치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나 사람을 기함하게 했었다.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그가 있을 방향을 쏘아보는데, 그가 날 달래듯 손을 잡아 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등불이 있습니다.”

그의 살과 맞닿은 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간지러웠다.

어둠 속에서는 뭐 하나라도 쥐고 있는 게 훨씬 낫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몇 번이고 손을 달싹거리다가 그만 손을 뿌리치듯 빼 버렸다.

“조심하세요. 앞에 계단이 더 없습니…….”

“……헉.”

레이커스가 경고하는 것보다 한 박자 빠르게 발을 내딛던 나는, 바닥에 계단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내려놓은 발아래에 바닥이 있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심장이 떨어지겠어.’

“다시 계단입니다.”

“……네. 악!”

계단이 어디서부터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어서 발로 앞을 더듬더듬 짚어 보다가, 그만 삐끗해 넘어질 뻔한 나는 불안함을 못 이기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다시 조금 멀어지던 발걸음 소리가 황급히 내게로 돌아오는 게 들렸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아. 누가 이렇게 빛 하나도 없는 새까만 어둠 속을 활보하고 다녀?’

무슨 어둠 체험하는 곳이 따로 있다고 하던데, 돈을 내고 이런 곳을 가는 사람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어둠은 지독히 두려웠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쉽사리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레이커스가 다시 한번 내 손을 부드럽게 쥐고 제 팔 위에 올려놓았다.

“절 잡는 게 나으실 겁니다.”

‘그것 봐라, 내가 잡아 준다고 할 때 잡지.’ 이렇게 뻐길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난 레이커스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날 배려해 줄 때가 제일 이상하고 불편했다.

진짜 고마워질까 봐.

“……잠깐만 그렇게 할게요.”

난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그의 팔을 쥐었다.

어둡고 서늘한 공간에서, 손안에 들어오는 단단한 팔의 체온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반가웠다.

난 그의 팔을 쥐고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갔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 속을 얼마나 오래 내려갔는지 모른다.

게임 속에서 지하실에 들어왔을 때는 다 새까맣게 타 버린 공간이었기도 하고, 중간에 장면 전환이 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깊게 내려왔는지 실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하실 바닥은 상상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지하실이라 그런지 공기가 점점 차가워짐에도 그의 팔을 쥔 내 손은 촉촉해졌고, 등줄기를 따라 땀이 몇 번이고 흘러내렸다.

“아직도 멀었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아직도 멀었…… 어요?”

“거의 다 왔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운 상상들에 지배당해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그가 당장이라도 날 지하에 가둬 버릴 것 같다는 상상, 살려 달라는 목소리의 주인이 내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상상들.

하지만 계속 그의 팔에 의지해서 걷는 사이에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졌다.

내가 몇 번이고 물어도 차분하게 대답해 주는 그 때문에 그럴 거다.

‘이 상황, 마치 등산 같아.’

난 혼자 어두운 벽을 짚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왜, 등산을 하면 이런 대화 하잖아. 얼마나 남았냐고 하면, 산행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이 초보를 달래느라고 거의 다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힘내게 해 주는.’

맥락 없는 생각은 다른 맥락 없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연인이 되기 전의 사람들이 같이 등산을 하면, 빨라진 심장 박동 때문에 쉽사리 반한다고 하잖아.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그게 사랑이라고 오인해서.’

난 내가 떠올린 생각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들은 등산하기 전에 어지간히 서로에게 반할 거리가 없었던 게 틀림없어. 얼굴만 쳐다봐도 넋이 나가게 생긴 사람을 상대로, 심장 박동이 대수겠어? 그가 살인마일 거라는 게 문제지.’

혀를 차는데, 레이커스가 웃는 소리가 났다.

사위가 컴컴한데, 도대체 뭘 보고 웃을 수 있는 건지……? 저음의 듣기 좋은 웃음소리임에도 소름이 쫙 끼쳤다.

난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왜 웃는 거예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네? 아,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그렇습니까.”

‘……독심술사야, 뭐야?’

“생각이 깊어지실 때면 하시는 습관이 있어서요.”

“……제가 그런 게 있어요?”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 다 왔습니다.”

레이커스는 웃는 기색을 지우지 않고, 내 손을 슬쩍 떨어트려 놓더니 어딘가로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둠 속에서 저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까닭을 모르겠다. 난 그가 옆에 있지 않았더라면 어둠에 질식해서 당장 미쳐 버릴 것 같은데.

“……멀리 가지 마세요.”

탁, 탁.

성냥을 긋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지독한 어둠 속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이내 환한 등불이 주위를 밝혔다.

주황색 불이 일렁이는 등불은 그렇게까지 밝은 것도 아니었지만, 새까만 어둠에 적응된 눈에는 눈부실 정도로 밝았다.

방금 웅얼거린 말이 민망할 정도로, 레이커스는 정말로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가 등불을 높이 들며 빙긋 웃었다.

“멀리 가지 않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내 말에 대답하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놀리는 것 같고 민망해서 숨고 싶고 그런지 모르겠다.

“이쪽입니다.”

난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그를 따라갔다.

지하실은 퍽 기묘한 공간이었다.

마치 감옥과도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

쇠창살이 공간을 여러 개로 분리하고 있었고, 각 공간마다 사람이 갇혀 있었던 듯, 벽에 쇠사슬이나 족쇄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각 칸마다 환기구가 있어서, 정원 쪽에 있는 창문과 연결된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유적지 같았고, 또 어떻게 보면 최근까지도 사용된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집 안에 이런 곳이 있는 거야……? 너무 오싹해…….’

칸칸이 나누어져 있는 작은 방들을 모조리 둘러보았지만, 대충 둘러보아도 여기에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동굴 같은 구조 때문에 울리는 내 발걸음 소리가 전부였다.

‘……이게 뭐야?’

내가 공간을 한 바퀴 다 둘러보고서 레이커스를 돌아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뗐다.

“개국 공신 집안이라, 국왕이 직접 처리하기 꺼리는 애매한 숙적들을 처리해 주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처음에 이 공간이 생긴 건 그런 목적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왜 굳이 여기 내려가지 못하게 한 거예요?”

“이 성에는 전쟁을 대비한 장치들도 있으니까요. 지하에 들어오는 건 쉽지만,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사용인들이 여기 들어왔다가 못 나오면 곤란하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그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공간은 그간의 괴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해 주었지만…… 내가 들은 그 말소리만은 설명해 주지 못했다.

‘물어볼까, 말까?’

잠깐 망설였지만 여기까지 와서 주저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최근에 사람이 갇힌 적은 없나요?”

“사람이 말입니까?”

도대체 내 질문의 어디에 고민할 만한 구석이 있는지,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여기 갇힌 적은 없죠. 적어도 제가 공작으로 있는 동안에는.”

‘……거짓말.’

난 침을 꼴깍 삼켰다.

서서히 그에 대한 믿음이 다시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설프고 옅은 믿음이 다시 깨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두 손으로 양껏 퍼 올린 물이 순식간에 흩어져 버리는 듯한 허망한 감각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레이커스가 앞장서서 지하의 다른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쇠창살로 나누어진 공간들 말고 뭐가 더 있을까?

‘……레이커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난 그에 대해서 뭘 기대했을까?

그래, 그를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이커스를……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의 장점들과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를 계속해서 의심하기에는 지칠 만큼 내게 너무 잘해 주니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은 날 보며 레이커스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잡지 않고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날 달래듯 말했다.

“뭐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내려오자고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둠을 자주 보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 되도록 어둠과 그림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지요.”

난 그 말을 흘려 들었다.

주저앉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레이커스의 뒤로 보이는 바닥 틈 사이에 삐죽 튀어나온 연한 파란색 머리카락이 보였기 때문에.

딱 한 가닥이었지만, 난 분명히 그것을 알아봤다.

‘실종자 중에 왕실에서 일한 웨인 이슈라는 시종이 있는데, 아주 독특한 머리카락 색이었거든요.’

트리버 경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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