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3화
뚜벅, 뚜벅, 뚜벅.
발소리는 다용도실 앞에 잠깐 머물렀다가 이내 멀어졌다.
‘……뭐야, 손님들을 초대한 것에 대해 말한 건가 봐. 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난 다리에 힘이 풀려서 등을 벽에 댄 채로 바닥으로 줄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러곤 오래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어휴, 왜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이래서 죄짓곤 못 산다고 했던가. 아니, 난 죄지은 게 아니라 그냥 증거 수집을 한 것뿐인데. 아무튼, 이렇게 매 순간 긴장하다간 제 명에 못 살겠다.
그때 밖에서 날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어디 있어? 몰래 이런 일을 꾸미고 어디 갔어?”
“알비 선생님! 루나, 이제 항복이에요! 못 찾겠어요!”
터질 것 같은 심장께를 손으로 누르면서, 슬쩍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레이커스가 복도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얼른 응접실로 들어갔다.
“절 찾았어요?”
“이 방에서만 숨바꼭질하자고 했잖아요! 선생님, 치사해요!”
“응접실에서만 하기로 했잖아. 어디 갔던 거야?”
샤인과 루나가 각기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서 내게 푸념하는 것이 귀여워서, 난 샐쭉 웃어 버렸다.
라떼와 밀로라드, 르뮈에는 샤인, 루나의 부모와 꽤 친했던 모양이었다.
슬쩍 물어보니 샤인, 루나의 부모는 여자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했다는 것 같았다.
나이에 비해 상당히 능력 있는 여자들이 많은 세대에는 역시 다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 외에는 세 사람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 대신 라떼와 밀로라드, 르뮈에는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숨바꼭질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어울려 주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나도 그들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하게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샤인은 정말로 그들이 자신을 보러 왔다는 사실에 기뻐 보였으니까. 물론 루나도 아주 행복해 보였고.
세 사람은 아이들이 잘 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샤인과 루나와 손을 꼭 잡은 채 현관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갑작스레 와 달라고 했는데, 와 줘서 고마워.”
“아냐.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와야지. 물론 덕분에 일이 좀 늘어난 직원에겐 미안하지만.”
르뮈에가 너무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해서, 난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밀로라드가 날 보며 입 모양으로 ‘진담이야’라고 속삭이며 하는 말에 당황했지만, 라떼가 ‘르뮈에는 월급을 후하게 주니까 걱정할 것 없어.’라고 속삭이며 날 달랬다.
셋은 한꺼번에 몰려왔지만, 사라질 때는 각자의 마차를 타고 차례차례 돌아갔다.
마지막에 남은 건 밀로라드였다. 나는 샤인을 다시 한번 안아 주고 일어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물었다.
“있잖아, 밀로라드.”
“응?”
“혹시 괜찮은 총알, 구할 수 있을까?”
밀로라드는 그 말을 듣고 내 눈을 흘끗 쳐다봤다. 과연 상인답게 그녀는 이런 질문으로는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더한 것도 많이 취급한다는 걸까?
그녀는 오히려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을 겪고 났으니까…… 언제 한번 길드에 들러. 괜찮은 것들을 좀 보여 줄게. 내가 특별히 취급하는 작은 상점이 있거든.”
밀로라드가 장난스레 속삭여 오는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고마워.”
“이런 걸로 뭘. 아껴 둔 것들이 있으니 입맛에 맞을 거야.”
비밀 상점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밀로라드는 내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선 마차에 올랐다.
마차 세 대를 배웅하고 나니 소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오자, 고저택의 앞마당이 이상할 정도로 스산하게 느껴졌다.
“자, 이제 우린 올라갈까요?”
샤인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잔뜩 껴 있는 구름 사이로, 손톱만큼의 하늘이 보였다. 가을의 하늘은 높고 아름다웠고, 오후에서 밤에 맞닿아 있는 시간에만 볼 수 있는 붉은색은 썩 고왔다.
샤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고마워.”
“후후, 세 사람을 봐서 그렇게 반가웠어요?”
“응. ……슬픔이라는 거 있잖아.”
“……네?”
“같이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위로가 될 때가 있는 것 같아. 슬픔이 꼭 나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아이들이란 가끔 깜짝 놀랄 만큼 성숙한 소리를 하곤 한다.
나는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작은 손이, 하루 사이에도 부쩍 자랐다는 생각을 했다.
[샤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68/297)]
호감도 창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샤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루나도 발돋움하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도!”
“응?”
“루나도 고마워요!”
“그래요?”
“네! 루나도 밀로라드랑 라떼랑 르뮈에랑 줄곧 친구였는걸? 이렇게 다시 봐서 너무 좋아요! 그리고 선생님 너무너무 좋아요! 너무너무!”
[루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68/297)]
루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겠는지, 내 다리를 안고 매달렸다.
샤인은 마치 어린아이를 보듯 루나를 바라보고 작게 웃더니, 아주 의젓하고 어른스럽게 내 손을 놓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잡아 주었다.
‘저런 건 언제 또 배웠대?’
평소에 귀족 어쩌고 하면서 대접받는 것만 좋아하더니, 제 삼촌을 보고 배웠을까?
나는 웃음을 흘리며 샤인이 잡아준 문을 지나 리어먼드가의 고저택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와 시간을 확인하니 꽤 늦어 있었다. 밤 9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는 꽤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레이커스와의 약속 시각까지 앞으로 3시간…….’
레이커스라는 이름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슨 비밀 공간이 그렇게 많은지, 제 방에 있는 또 다른 비밀 공간으로 날 초대해 주었던 것, 그리고 마치 국가대표의 사격 연습장 같은 그곳에 잔뜩 쌓여 있던 무기들과…….
‘……그에게서 리볼버 다루는 법을 배운 것.’
“으…….”
난 나도 모르게 내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쌌다.
총을 쥐는 법이라거나 방향을 설정하는 법 같은, 오늘 들은 설명들이 먼저 생각나야 할 텐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 손 위에 가볍게 겹쳐졌던 온기와 귓가에서 속삭이던 나지막한 목소리 같은 것들이었다.
“……진짜, 뭐 하는 거야.”
오늘 레이커스에게서 배운 것들을 한번 복기해 보려고 했지만, 길게 숨을 몇 번 내쉬어 보아도 한번 떠오른 기억은 쉽사리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때는 손으로 뭘 만지는 게 최고야.’
난 고개를 저으며 아이템 창을 열었다.
거기에는 오늘 숨바꼭질을 하면서 창고에서 얻은 아이템들이 있었다.
게임 초중반에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이었던 만큼, 특출 나게 대단한 것은 없었지만 있으면 유용한 것들이었다.
[쌍안경 :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보여 줍니다.]
[폴라로이드 사진기 필름(30매)]
[괴담집 : 파크에 널리 퍼진 괴담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여신상(3/6) : 조립한 후, 아이템 정보를 조회할 수 있습니다.]
이 여신상 조각은 다 모아 본 적이 없긴 하지만, 다섯 개까진 위치를 알고 있었다.
난 아이템들을 한 번씩 꺼내 자세히 조사해 보면서, 머릿속으로 레이커스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국왕이 싫어하는 사람, 공주가 사랑하는 사람, 나와 연인이라고 소문이 난 사람, 내게 이상할 만큼 잘해 주는 사람, 그리고…… 어쩌면 살인마일지도 모르는 사람.’
‘살인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는 분명 납치범을 연쇄살인마로 생각한다고 했다.
‘……자정이 되면, 뭔가 조금이라도 명확해지겠지.’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을 만큼 피곤했지만, 레이커스의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가득 메워서 잠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딱 밤 12시 정각.
레이커스는 마치 유령처럼 1층 계단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는 등불로 그를 비춰 보았다. 낮과 같은 차림새인 걸로 봐서, 레이커스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질문은 몸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가 정말 걱정하는 건 내 마음이나 정신이었던지 그는 내 눈을 아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불에 비쳐 원래 빛깔은 죄 잃었지만, 오렌지빛과 짙은 그림자로만 이루어진 레이커스도 지독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곤 지하실이 있는 쪽을 서둘러 가리켰다.
그는 내게 그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먼저 지하실이 있는 문을 향해 앞장서 걸었다.
지하실 문은 잠겨 있었다. 레이커스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열쇠 꾸러미를 꺼내, 녹색의 큼직한 열쇠로 문을 열었다.
달칵, 하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난 정신이 바짝 들었다.
‘……레이커스와 함께 단둘이 지하실에 가도…… 살아나올 수 있겠지?’
하트가 세 개에서 두 개로 줄어들던 순간이 자꾸만 뇌리에서 반복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발을 억지로 내디뎠다.
계단 아래쪽에 내려앉은 칠흑 같은 어둠을 한번 바라보고 침을 꼴깍 삼키고 한 발짝 내딛길 반복하는데, 순간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훅-!
등불이 꺼진 모양이었다.
‘……공포 게임 아니랄까 봐, 공포 영화에 나오는 단골 연출은 다 나오네.’
나는 유일하게 의지가 되었던 등불을 잃은 게 속상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올라갈까?’
“레이커스, 저, 등불이 꺼졌어요. 기름이 다 된 것 같은데…… 잠깐만 올라갔다가 올게요.”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뚜벅, 뚜벅, 뚜벅.
끼이익, 끼익, 끼익.
규칙적으로 멀어지는 발소리와 그에 맞춰 울리는 계단의 낡은 널빤지가 지르는 비명만 반복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레이커스는 이 어둠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빠르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벽을 손으로 짚은 채 덜덜 떨리는 발로 계단을 확인하며 한 발짝씩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