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2화
샤인은 작은 응접실의 테이블 아래에 숨을 생각인 것 같았다. 재빨리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응접실의 깜짝 이벤트를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찾아 그 맞은편의 작은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응접실이 잘 보이도록 다용도실 문을 살짝만 열어 두고 난 문 뒤에 붙어 섰다.
“셋…… 둘…… 하나!”
루나가 숫자를 세는 소리가 끝나고, 신이 난 가벼운 발걸음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토토토. 토토토톡.
“찾았다!”
루나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의욕이 앞서는 데 비해서 제대로 숨을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샤인이었다.
“아냐, 아직이야!”
“찾았는데?”
“……알았어. 너도 참 고집이 센 편이야, 루나.”
“알비 선생님! 어디 있어요?”
“어디 있어!”
샤인은 그래도 숨바꼭질을 하는 게 어지간히 신나는지, 말도 안 되게 우기려다가 금세 그만두고 루나와 함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보이는 광경이 어찌나 귀여운지, 난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둘이서 좁은 응접실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커튼 쪽을 흘끗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저기 아냐?”
“찾았다! 알비 선생님!”
“선생님 진짜 못 숨는다.”
샤인과 알비가 동시에 커튼을 덮쳤다. 팔랑, 커튼이 휘날림과 동시에 세 쌍의 팔이 튀어나와 둘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
“……어라?”
난 그 얼빠진 소리를 들으며 혼자 웃었다.
‘샤인과 루나의 얼굴을 정면에서 봐야 하는데.’
“잘 지냈어요, 우리 도련님, 아가씨?”
“……어떻게…….”
“밀로라드! 르뮈에! 라떼! 보고 싶었어!”
밀로라드가 몸을 돌리며 샤인을 어깨 위로 달랑 안아 올리자, 샤인의 얼굴이 보였다.
샤인은 달랑 안긴 채로도 믿어지지 않는지 그 커다란 금색 눈이 휘둥그레져서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라 입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루나는 반가움에 강아지처럼 셋의 몸에 대고 머리까지 비벼 대며 양껏 안겼다.
샤인은 루나가 품에서 품으로 안겨 다니는 모습을 한참 멍하니 보다가, 눈이 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곤 셋을 올려다보았다.
“여긴 왜 왔어?”
밀로라드가 무릎을 굽혀 샤인을 내려놓고선 웃어 보였다.
“도련님 보러 왔지요. 그런데 우리 샤인 도련님이 너무 무거워져서 옛날처럼 마음껏 안아 주진 못하겠는걸요. 벌써 팔이 아파요.”
“……당연하지, 난 한창 성장기니까. 삼촌이…… 삼촌이 불렀어?”
밀로라드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면 왜 온 건데?”
“샤인 님은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예전엔 제가 자주 안아 드렸는데.”
“……그런 건 아닌데. 억지로 올 필요는 없어.”
셋 중에서는 가장 온화하고 항상 차분한 밀로라드가 샤인의 그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곧 울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치…… 이해할 수 있어.’
아이가 너무 웃자란 걸 보면, 마음이 안 좋다.
주위가 그 아이에게 강요한 성숙함이니까. 부모가 죽은 뒤, 샤인이 혼자 감내한 시간이 만들어 냈을 성숙함이니까.
샤인이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웅얼거리기만 하다가, 밀로라드의 눈이 새빨개진 걸 보고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그래? 괜찮아?”
밀로라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회색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주책이야, 밀로라드.”
“울지 마. 도련님 보러 모처럼 온 건데, 이럴 거야?”
라떼와 르뮈에가 밀로라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고, 밀로라드가 눈가를 손으로 꼭꼭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천천히 팔을 벌려 샤인을 끌어당겨 안았다.
샤인은 내가 샤인을 처음 안았을 때처럼 당황해서 바르작거렸다.
밀로라드는 샤인을 꼭 안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억지로라니. 전…… 절 보면 안 좋은 기억만 떠오를 것 같아서 못 왔던 것뿐이에요. 아르비체의 말이 맞았네요.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은걸요.”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어?”
“네.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 줄 알았으면 진즉 올걸 그랬어요.”
샤인은 잠깐 망설이는 것 같다가, 날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밀로라드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곤 다시 한번 날 찾는가 싶더니 한숨을 쉬며 밀로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이젠 나도 많이 컸으니까, 이렇게 인사해야지.”
“……후후. 그래요.”
밀로라드와 라떼, 르뮈에가 차례로 다가와 악수하고 나자 샤인은 그제야 밝게 웃었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훈훈하다, 훈훈해.’
꽤 성공적인 몰래카메라가 된 것 같다.
흐뭇하게 웃으며 이제 다용도실 문을 열고 등장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레이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벽 너머에서 들렸다. 선약이 있다더니, 이 옆에 다른 응접실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호기심에 무심코 귀를 가져다대자, 목소리가 더 명확해졌다.
“……네, 말씀하십시오, 국왕 전하.”
난 레이커스의 방을 나오기 전에 들었던 ‘귀찮은 선약’의 스케일에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연회를 하시는 건 이제 더 이상 말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불쑥불쑥 연락을 주시는 건 그만둬 주십시오. 나름대로 나라의 위기 상황을 대비한 비상 연락 수단이지 않습니까?”
‘……이게 뭐야? 정말 국왕과 얘기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모든 연락을 편지로 해야 하는, 이 발전이 지독히도 뒤떨어진 게임 속에도 전화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보편화되기엔 한참 이른 것 같지만.
‘아무리 전화가 개발됐다고 해도 국왕과 레이커스 사이에 핫라인이 있는 건…… 진짜 신기한 일이긴 해. 그만큼 레이커스가 국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걸까?’
뭔가 중요한 대화를 운 좋게 엿듣게 된 모양이었다.
난 처음 듣는 내용에 침을 꼴깍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당일 통보이질 않습니까?”
“저와 같은 족속이 지독히 싫으신가 봅니다.”
“항상 그 경고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굳이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커스의 말밖에 안 들리니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난 내 입을 틀어막은 채로 눈알만 굴렸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국왕이 레이커스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눈치인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지.
리어먼드 공작가는 파크 내에서 왕가 못지않은 대단한 가문이었고, 파크의 일반 시민들도 공작을 만나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청할 정도로 레이커스의 위신은 대단했다.
‘그런데 족속이니 뭐니 하는 말을 쓸 정도라니…… 대체 뭐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는 계속되었다.
“어떻게 해석하시든 국왕 전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저번에도 말씀드렸듯 공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제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그것까지 제가 뭘 어떻게 막을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국왕 전하께서 그런 소문에도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연애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반색하실 줄 알았으면, 진즉 할 것을 그랬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연회 날의 경비를 늘려 주시는 것만 신경 써 주십시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저번에는 듣고 흘렸었는데, 정말로 국왕은 레이커스와 공주님 사이를 마뜩잖게 여기는 모양인데.’
대체 왜?
난 혼자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레이커스의 존재 자체를 국왕이 반갑지 않게 여기는 이유.
국왕은 게임 이벤트 중에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뭐, 신분이 그렇다 보니 성실하게 운동할 기분이 안 드는 거야 이해하지만, 저러다 금방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동글동글하다 못해 비만이었다. 게다가 머리숱도 부족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레이커스의 빼곡하게 숱이 많은 금발과 천사가 빚은 듯한 수려한 얼굴, 어깨선만 봐도 감탄이 나오는 몸매 같은 것들이 국왕의 콤플렉스라도 자극한 걸까?’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이유인 것 같았다.
손으로 턱을 쓸며 다른 이유를 떠올리려 애를 쓰던 나는, 레이커스의 연애 이야기니 뭐니 하는 게 혹시 나에 대한 걸까 하는 생각에 그대로 굳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아주 오해가 깊던데. 이대로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하나의 캐릭터와 호감도 노선을 깊게 타는 건, 다른 캐릭터와 호감도를 쌓을 때 방해가 되기도 한다.
달칵.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던 나는, 옆방에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를 눈치챘다.
레이커스가 방에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헉.’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엿들은 걸 들키면 오늘 밤의 이벤트고 뭐고 아주 큰일이 날지도 몰라.’
여긴 신분제 사회고, 파크에서 제일 대단한 신분의 두 사람이 한 대화를 멋대로 엿들은 걸 들키는 건 정말 좋지 못한 일이었다.
뚜벅, 뚜벅.
너무 귀에 익어서, 이젠 완전히 구분할 수 있게 된 레이커스의 발소리가 옆방에서부터 출발해 복도를 지나 내가 숨어 있는 다용도실 앞으로 다가왔다.
뚜벅, 뚜벅, 뚝.
발소리가 다용도실 바로 앞에서 멎었다.
‘……히익.’
난 입을 틀어막은 채로 숨까지 삼켰다.
“어제 오셨던 손님들이 오늘 또 오셨군요.”
그는 아무래도 응접실에 모인 손님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인사를 나누는 소리에 이어 레이커스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그린 양께선 정말로 공사다망하시군요.”
‘내, 내가 여기 숨어 있는 걸 아는 거 아냐?’
희미하게 웃음기가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내가 있는 곳을 향해 하는 말 같았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멈출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