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71화
지하실이 왜 궁금하냐는 듯한 레이커스의 눈을 마주하는 것은 내겐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괜히 살인마의 역린을 건드린 건 아니겠지……?’
침을 꼴깍 삼키고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레이커스가 잠깐 생각을 해 보는 눈치더니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귀여운 짓을 하는 아이라도 보는 듯한 것이라서…… 난 긴장해 있다 말고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저래……?’
“……왜 웃어요?”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니잖아요. 웃었잖아요, 절 보고.”
“그냥…… 저번에는 귀걸이를 잃어버렸다고 하셨잖습니까? 지하실에서 마주쳤을 때. 그런데 지하실에 관심이 있으신 걸 이렇게 갑자기 털어놓으셔서요.”
그때 그 어설픈 변명이 안 먹혔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창피해.’
아마 얼굴뿐만 아니라 귓불까지 붉어졌을 거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사이, 레이커스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관계인 이상, 그린 양에게 숨길 필요는 없겠죠.”
‘여기까지 온 관계라니……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잖아.’
난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를 재촉했다.
“지금 가 볼까요?”
“지금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잖아요.”
“쇠뿔을요?”
어지간한 건 게임 밖의 세계와 같은데, 가끔 이런 속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듯 구는 게 어쩔 땐 귀엽다.
세계가 달라서 당연한 거긴 하지만, 지금까지 날 놀리던 주제에 이런 것도 모르고.
난 미소를 가리려 손으로 입을 덮다가 깜짝 놀라서 그대로 멈췄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그가 내게 잘해 주고, 그래서 그를 믿고 싶기도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직 그를 믿어도 좋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귀엽다고 생각한 거야?’
난 입술 안쪽 살을 또 습관적으로 깨물곤 레이커스에게 최대한 딱딱하게 말했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어차피 갈 건데, 지금 당장 가면 곤란한 점이라도 있나요?”
그는 고개를 저었지만 행동과 말은 달랐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목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잠깐 귀찮은 선약을 처리해야 해서요. 자정에 다시 뵙죠.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지하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걸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지.’
그가 뭔가를 숨기기 위해 시간을 끄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오늘은 이미 내게 시간을 충분히 할애해 줬으니 바쁘긴 바쁠 것이다.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방에서 물러났다.
난 거의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레이커스의 방에서 나오다가, 바로 문 앞에 서 있던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꺅!”
“아르비체 님?”
난 비명부터 질러 놓고서야, 곱게 틀어 올린 붉은 머리와 동그란 안경을 발견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제가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할 걸 그랬네요.”
문을 벌컥 연 건 난데, 사과는 블리에 씨가 먼저 했다. 난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좀…… 긴장할 일이 있어서…….”
“휴, 역시 너무 무리하신 것 같아요.”
그녀는 안쓰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내 이마와 볼을 한 번씩 짚어 보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평소답지 않게 놀란 게 납치범의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방으로 얼른 돌아가세요. 제가 따뜻한 걸 좀 내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럴 거 없어요.”
“아닙니다. 마음의 안정이 무엇보다 제일 중요하지요. 필요하시다면 신관도 불러드리겠습니다.”
블리에 씨가 어찌나 다정하게 말을 하는지, 난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여 버릴 뻔했다.
“괜찮아요. 그보다 절 찾으셨던 건가요?”
“아…… 네.”
그녀는 허리에 두른 하얀 앞치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아침에 보낸 편지의 답신이 온 것 같습니다.”
받아 보니 라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진짜 빨리도 답장했네. 샤인과 루나가 저를 보고 싶다는 말에 얼마나 신이 났으면.’
난 흐뭇하게 웃다가, 블리에 씨가 내 방에 두어도 될 편지 하나 때문에 날 찾진 않았겠다 싶어 물었다.
“그리고요?”
“아, 네. 도련님과 아가씨께서 아르비체 님이 오기 전엔 밥을 안 먹겠다고 해서…… 하지만 쉬시는 게 우선이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가서 잘…….”
“아뇨, 제가 갈게요.”
난 싱긋 웃어 보이고 그녀의 팔을 토닥여 주었다.
블리에 씨는 한숨을 쉬며 알겠다는 듯 내게 길을 내주었다.
“어쩜 그리 책임감이 있으신지…….”
[블리에 화이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62/198)]
갑자기 뜬 호감도 창에 낯간지러워 얼른 걸음을 재촉하는데 블리에 씨의 반짝이는 눈빛이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식당에 들어서자, 날 기다리던 두 아이가 내 다리에 매달려 왔다.
“다 했어요!”
“다 했어!”
“……어머, 그래요?”
샤인과 루나가 내게 앞다투어 문제지를 내밀었다.
‘어제 다 못 풀고 남은 분량이 꽤 됐는데.’
난 둘 다 장난치는 걸까 싶어 문제지를 받아 들고 몇 장 넘겨보았지만, 정말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꾹꾹 눌러쓴 글씨가 가득했다.
“어머, 이걸 벌써 다 했어요?”
내 깜짝 놀란 표정을 보고 유모가 한숨을 푹 쉬었다.
“글쎄, 이걸 다 하기 전에는 점심 식사도 안 드시겠다고 하면서 두 분이 어찌나 몰두해서 푸시던지요. 여기 오기 전에 후작가에 있다 왔습니다만, 이렇게 집중력이 좋은 도련님과 아가씨는 처음 봅니다.”
‘유모가 요 두 아이의 진정한 산만함을 봐야 하는데.’
“걸려 있는 게 있을 때는 열심히 하긴 해요.”
난 작게 웃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공부방으로 가서는 테이블에 앉아 답안지와 내용을 비교하며 채점했다.
정말 집중해서 풀었는지, 둘 다 평소보다 정답률이 높았다.
아이들 과외 몇 번 한 경력이 다인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정도의 그리 어렵지 않은 수학인 게 다행이었다.
틀린 문제는 왜 틀렸는지까지 설명해 주고 나자, 샤인과 루나는 다 이해했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의자 위에서 손발을 마구 흔들며 저들이 원하는 것을 외쳤다.
“숨바꼭질!”
“숨바꼭질! 이번엔 루나가 술래 차례예요!”
‘……아니, 저번 숨바꼭질을 한 게 언젠데, 술래 차례까지 외우고 있었어?’
초롱초롱한 눈빛이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모르겠다.
난 포슬포슬한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다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편지를 떠올리곤 빙긋 웃었다.
‘꽤 괜찮은 계획인데?’
“이렇게 훌륭하게 숙제를 다 했는데, 숨바꼭질 당연히 해야죠. 근데, 선생님이 잠깐 볼일이 있어서 조금만 있다 해도 괜찮을까요?”
“응!”
“네에!”
두 아이는 내 속내도 모르고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밥 잘 먹어야 해요.”
“응. 대신에 약속 지키기야.”
“루나, 당근도 잘 먹어요.”
“알았어요.”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 더 차례로 쓸어 주고 식당으로 가라고 보내자, 유모가 감탄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곤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진짜 너무 유능하세요.”
“하하…….”
“만약 제가 공작님의 연인이었다면 정말 해 주시는 것만 받고 놀면서 지낼 텐데, 어쩜 아르비체 님께선 이렇게 부지런하시고 아이들을 사랑하시는지…….”
“……아니에요.”
“이렇게 성실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분이시니까, 공작님께서도 사랑에 빠지신 걸 테죠?”
“……하하.”
[델리아 리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1(45/99)]
지금까지의 경험에 미루어 난 그녀의 대단한 오해를 아무리 정정해 보려 해도 안 될 걸 알았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어설프게 웃어 주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샤인과 루나와 나는 리어먼드 저택의 1층에 있는 제일 작은 응접실과 다용도실 사이로 내려왔다.
아이들이 원하는 걸 약속대로 들어주는 게 주목적이지만, 내 나름대로 숨바꼭질의 목적이 더 있기도 했다.
이 기회에 혼자서 어슬렁거리면 수상해 보이기 짝이 없을 공간들을 탐방할 계획이었다.
플레이어일 때 이미 주운 적 있는 아이템 중에는 저택 다용도실에 숨겨져 있는 게 있었기 때문에, 파밍이 가능하다면 하고, 트리버 경감이 레이커스에게 줬다는 사건 파일들을 찾을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리고 오늘의 숨바꼭질은 특별한 목적이 하나 더 있었다.
가볍게 박수를 한번 쳐 주의를 집중시킨 나는 루나와 샤인에게 속삭였다.
“어디 보자, 너무 멀리 가면 루나가 찾기 힘드니까, 1층 안에서만 숨기로 해요. 처음엔 저 응접실에서만 할까요?”
“좋아.”
“좋아요!”
“루나가 술래!”
“그래, 루나가 술래해.”
“열까지 꼭 세고 나서 잡으러 와야 해? 알았어, 루나?”
“응! 열 셀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잔뜩 신이 나서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며 난 응접실의 커튼 쪽을 바라보았다.
어른이 숨기에는 그렇게까지 넓지 않은 공간이라, 커튼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샤인과 루나를 위해 초대한 깜짝 선물이 거기에 숨어 있었다.
난 그 뒤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을 세 사람을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루나의 신호를 기다렸다.
‘이 맛에 사람들이 몰래카메라를 하나 봐.’
“열…… 아홉…… 여덟…….”
루나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을 꼭 가리고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샤인은 신이 나서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