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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68화 (68/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8화

답답함을 못 이겨 신문을 덮었다가 다시 열어서 좀 더 읽었다가, 다시 또 덮었다 하고 있는데 레이커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긴장한 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가 뭔가 생각에 잠긴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납치범, 정체를 알았다고 하는데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나를 떠보는 건가?’

레이커스는 분명히 납치범의 정체는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왜 지금 그의 얼굴과 말투에서, 그도 모리슨 알터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강한 인상이 느껴지지?’

난 뭐라고 대답할까 한참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아이들도 있는 자린데, 나중에 이야기하세요.”

레이커스의 시선이 양배추 샐러드를 포크로 세고 있는 두 아이에게 가 닿았다.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식사 후에, 제 방에서 뵙죠. 꼭 혼자 오셔야 합니다.”

난 어제 그가 했던 초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려고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초대하는진 모르겠지만 가 준다, 가 줘.’

비장하게 결심을 굳히는데, 마지막 요리를 내오던 앰버와 순간 시선이 맞닥뜨렸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볼이 발그레해지고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 있던 앰버가 주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무슨 소문을 퍼뜨릴지 뻔히 짐작되었다.

앰버가 제 입을 가리며 과일 접시를 내려놓고 후다닥 퇴장했다.

난 쌓이기만 하는 오해에 또 한숨을 쉬었다.

‘……느는 건 어째 한숨뿐이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앰버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황급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아르비체 님!”

“응?”

“지금 바로 공작님 방에 가시는 거예요?”

“어, 그런데……?”

앰버의 투명한 밤색 눈에 또 빛이 반짝반짝 돌았다.

“이러고 가시면 어떻게 해요! 자자, 제가 도와드릴 테니, 얼른 아르비체 님의 방으로 가셔요.”

‘……이러고?’

난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유행이 지나긴 했지만 깨끗하고 단정한 아르비체의 옷에, 식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긴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게 전부였다.

“이러고 가는 게 어때서?”

“에이, 그래도 데이트잖아요. 물론 큰일을 겪은 직후라 그런 걸 신경 쓰실 정신이 아니시겠지만…… 그래도 기분 내시면 좋으니까요.”

“아냐, 데이트 같은 거 아니야.”

앰버는 내 말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까르르 웃었다.

그러곤 눈을 한층 더 반짝이며 내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택의 일을 함부로 퍼트리면 이 일마저 잃을 테니까 절대 비밀은 지킬 테지만요, 실은 어제 아르비체 님의 손님 시중을 든 게 저예요.”

“어머, 그랬어?”

“공작님께서 질투하시는 건 처음 봤지 뭐예요? 정말……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지긴 하나 봐요. 아르비체 님은 복도 많으세요. 저희 공작님처럼 아름다운 분을…… 하.”

“……질투라니.”

‘누가 누굴? 레이커스가 나를?’

그렇게 무서운 소리가 또 어디 있겠어.

난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저었지만, 앰버는 이미 저만치 앞장서서 내 방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도대체 뭘 얼마나 꾸며 줄 셈인지, 벌써 그녀의 발걸음에서 신남이 느껴졌다.

‘……어젯밤에 드레스 걸쳐 본 것만으로도 일주일 치 꾸밈 노동은 다 했는데.’

난 절로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하는 수없이 앰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가 워낙 이런저런 치장을 모두 사양했기 때문에, 앰버가 할 수 있었던 건 내 머리를 솜씨 좋게 땋아 두꺼운 붉은 리본으로 장식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선물이라도 된 것 같네…….’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레이커스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따로 할 것도 없이 그의 방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레이커스는 오늘자 신문을 아직도 읽고 있었다.

“저 왔어요.”

그의 방 분위기와 지독히 잘 어울리는 레이커스의 잘난 외모에서 최대한 시선을 돌리려 애를 쓰며 들어서자, 레이커스는 나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날 서가 쪽으로 안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레이커스는 서가로 다가가 책꽂이에서 책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저번에도 레이커스의 책장에서 리볼버를 발견한 기억이 있으니까, 혹시 다른 책에 총알이라도 들어 있는 걸까 싶어서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해 본 적 있는 듯한 익숙한 태도로 높은 곳과 낮은 곳에 있는 책들을 차례로 뽑아 다른 자리에 배치하고, 다시 또 뽑아 다른 자리에 놓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가 등을 돌린 틈을 타 사건 수첩의 빈자리에 그 책이 바뀌는 순서를 몰래 기록했다.

워낙 손을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순서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적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잔뜩 집중해서 기록하던 나는 그의 동작이 멈추는 순간, 후다닥 수첩을 접어 넣었다.

탁.

마지막 책까지 꽂아 넣고 나자, 뭔가가 맞물리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끼리릭.

그리고 책장이 문처럼 열리기 시작하자, 난 조금 겁을 먹고 뒤로 주춤 물러섰다.

‘옥상이 비밀 공간이 아니라, 여기가 레이커스의 비밀 공간인 거 아냐? 이렇게 기계 장치까지 만들어 가면서 숨겨 둔 공간에 대체 뭐가 있을지…….’

하지만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심을 떠올리기도 전에 책장이 활짝 열리며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그 장소는 터키색 벽지로 디자인된 레이커스 방의 응접실과도, 차분한 베이지 톤으로 장식된 서재와도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대체 뭐야?’

그곳은 이 고저택이 워낙 넓다고는 해도, 비밀 공간치고는 꽤 넓었다. 교실 두 개를 붙인 듯한 크기에, 창문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방 전체에 디자인적인 요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삭막한 회색 벽뿐인 방이었다.

벽의 보충재는 방음을 위한 소재로 만들어진 듯 계란판처럼 올록볼록 튀어나와 있는 게 특이했다.

그 방에 있는 거라곤 한쪽 벽에 다트 과녁처럼 보이는 게 하나 달랑 걸려 있는 것과 바닥에 큼직한 몇 개의 상자가 놓인 게 전부였다.

“따라오시죠.”

레이커스는 내게 말하며 먼저 그곳으로 발을 들였다.

내가 거기로 들어서자,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들어섰던 문이 자동으로 다시 봉인되었다.

그 공간은 내가 예상했던 어떤 공간과도 달랐다.

‘사방에 비닐을 발라 놓고 전기톱이 있는 피 칠갑한 그런 곳도 아니고, 희생자 리스트라도 전시해 놓고 사진을 하나하나 보관해 두는 그런 곳도 아니네.’

내가 수사물을 너무 많이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긴…… 그러니까…….”

마치…… 사격 연습장 같다. 아주 깔끔한.

“이런 곳이 왜 있는 거죠?”

“왜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걸 제가 알면 안 물어봤겠죠?”

내가 겁에 잔뜩 질려 있던 어깨를 펴며 볼 것도 없는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레이커스가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더니 바닥에 놓인 상자의 뚜껑을 열어 주었다.

덜컹, 쿵.

크기가 크긴 해도 그냥 상자일 뿐인데, 뚜껑을 여는 소리가 깜짝 놀랄 만큼 컸다.

하지만 더 놀랄 만한 건 상자 안에 있었다.

내 허벅지까지 오는 큰 상자 안에 총기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레이커스는 내가 당황해서 그 안을 멍하니 들여다보는 걸 보더니, 뭔가 하나 골라도 좋다는 듯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이게 다…….”

“왕궁 연회에 갈 준비, 해야 하잖습니까?”

난 그제야 우리가 여기에 왜 왔는지 깨달았다.

그가 내게 총 다루는 법을 알려 주겠다고 한 말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진심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앰버가 머리에 달아 준 리본이 무색해진 게 웃겨서.

‘그래, 사실 내가 왕궁 연회에 가면서 준비하고 싶은 건 이거지. 사교계에 데뷔하는 아가씨로서의 교양이나 춤이 아니라.’

그중에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총을 하나 집어 들었다.

내가 양팔을 벌린 길이보다 조금 짧은 나무 총은 퍽 길기도 했지만, 무게도 상당했다.

양손으로 총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자, 그 총의 아이템 설명창이 눈앞에 떴다.

[드라이제 : 사거리가 긴 소총. 재장전에 30초 소모. 부싯돌(30/30). 공이(12/12). 사용법을 조회할 수 있습니다.]

‘……어우, 부싯돌이니 공이니 하는 걸 보니 진짜 손이 많이 가겠는데.’

난 그 총을 다시 내려놓았다.

위력은 상당해 보였지만, 보아하니 총 안의 소모품들이 소진되는 속도도 빠른 듯했고 관리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조금 더 짧은 총을 집어 들었다.

[반자동 소총 : 자동으로 장전되는 소총. 전용 총알 4개. 사용법을 조회할 수 있습니다.]

‘이쪽이 더 간편해 보이긴 하는데…… 역시 너무 무거워.’

난 상자 가득 들어 있는 이런저런 총들을 구경해 보았지만, 역시 마음에 쏙 드는 건 없었다.

작은 총도 많긴 했지만, 딱히 특수 능력이나 부가 기능이 붙은 총이 없었고, 사용법이 까다로운 게 너무 많았다.

내가 유심히 이것저것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들자, 레이커스는 벽에 기대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장난감을 고르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부모 같은 그의 얼굴이 당황스러워서 난 얼른 몸을 바로 세웠다.

‘……언제부터 저렇게 보고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부티크에 데려갔을 때, 그린 양이 심드렁했던 거 기억나요? 그때와 달리 지금은 엄청나게 신나 보여서요.”

난 좀 당황했다.

아무리 레이커스가 내게 호신용으로 권총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기로서니, 더불어 다른 총을 골라 봐도 된다고 했기로서니, 그의 앞에서 이렇게 신이 나서 총기를 뒤적거릴 일이 아니었다 싶었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아이템 파밍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진짜 중요한 상황이란 말이야.’

등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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