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7화
부티크의 사장은 뭔가 이야기를 더 하려다가, 정신이 퍼뜩 든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흔들어 댔다.
“아이고, 주책이야. 아닙니다. 아르비체 님께서 돌아와서 이렇게 기쁜데, 괜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요. 그보다 드레스를 한번 입어 보시죠.”
“아…… 네.”
“사이즈에 맞춰 조정한 상태입니다만, 그래도 한번 입어 보시면 조정할 부분이 있는지 봐 드리겠습니다.”
“굳이 또요?”
“중요한 작업입니다. 미세한 치수 조정이 드레스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결정하게 된답니다.”
나는 드레스보다는 부티크 사장님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에 더 흥미가 있었지만, 사장님은 그 뒤로는 제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지 않았다.
내가 생각에 골몰한 채로 드레스를 입고 벗는 동안, 사장님은 드레스의 치수를 조정해 주는 본업을 충실히 이행하고는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가만히 서서 남들이 입혀 주는 걸 입고 벗겨 주는 대로 벗으면 된다고 해도 은근히 중노동이었다.
부티크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나자 방으로 올라갈 기력도 없어 1층 거실에 잠깐 앉아 있었다.
‘분명 낮잠까지 잤는데도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어. 밤새 악몽에 시달려서일까?’
레이커스가 쉬어도 된다고 했을 때 그냥 확 쉬는 게 좋았을지도.
하지만 루나와 샤인이 그렇게 귀엽게 날 기다리고 있는 걸 외면할 수가 없었다.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봐, 나도 은근히 일벌레인 것 같아.’
작게 한숨을 쉬고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익히 아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딱 부러지는, 발을 끌지 않는 소리.
‘레이커스……?’
분명 그임이 분명한데, 내 바로 뒤에서 멈춘 발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자, 레이커스와 그대로 시선이 맞닥뜨렸다. 그는 사람을 앞에 둔 눈빛치고는 꽤 아련한 눈을 하고 있었다.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제게 할 말이 있으신가요?”
그는 작게 웃고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볼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요?”
“그냥, 이 저택에 그린 양이 있고 없고가 이렇게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갑작스럽게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제가 아니라도 다과회도 종종 주최하시고, 시끄럽고 즐겁게 아주 잘 지내시잖아요? 그…… 혼자만의 술 파티도 자주 하시고.”
옥상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 말에, 레이커스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까지 접어 가며 웃는 모습에 황당해서 그를 바라보는 사이에, 레이커스는 겨우 진정했다.
“내일, 아침 식사가 끝나고 제 방으로 좀 와 주시겠습니까?”
“내일…… 어떤 볼일 때문에 그러시죠?”
“왕궁 연회 준비를 할 생각입니다.”
레이커스가 어딘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그의 방에 오지 말라는 사람치고는 자주도 초대하네.’
난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커스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모르겠으니까. 그의 곁에서, 더 가까이에서 그를 살펴보고 싶었다.
그가 만약 살인마라면,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그가 나를 죽일 거라면, 도대체 왜 그렇게 할 건지.
만약 연쇄살인마가 아니라면, 그라는 사람과 그의 주변 일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지.
그가 나를 왜 지키고 있는지.
내 속에서 빙빙 맴돌기만 하는 질문들의 답을 찾고 싶어서.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여기까지 찾아와 준 고마운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며 하루를 시작했다.
라떼와 르뮈에, 밀로라드에게는 한 통의 편지에 할 말을 함께 썼다.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왕궁 연회 때 만나자는 인사말 끝에, 샤인과 루나가 그리워하고 있으니 날을 잡아서 방문해 달라는 말을 함께 적었다.
랑비엘에게도 감사 인사와 함께 왕궁 연회 때 다시 인사하자고 적었고, 아만타 경관에게도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인사를 적었다.
마지막으로 앨라이 쿠스에게도, 감사 인사와 함께 대신관 후보로 정식 책봉된 것에 대한 축하를 적었다.
앨라이 쿠스의 책봉 행사가 왕궁 연회 바로 전날이라고 했었다.
‘……앨라이 쿠스의 행사니까 직접 가 보고 싶은데, 레이커스가 또 따라온다고 하려나?’
난 잠깐 망설이다가, 갈 수 있으면 최대한 가겠다는 인사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편지들을 블리에 씨에게 맡긴 나는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어제 풀던 수학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하고 잠든 샤인과 루나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떼도 쓰지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숨바꼭질이 그렇게 하고 싶어요?”
“네에.”
“……왜 물어봐? 오늘 할 거야?”
‘산책’이라는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루나와 샤인이 눈을 반짝이는 걸 보며 난 쓰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레이커스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적극적으로 수집해 봐야겠다 싶은 참이었다. 숨바꼭질하는 척하며 좀 더 뒤져 보는 것도 좋겠지.
난 우리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신문만 읽는 레이커스의 눈치를 슬쩍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음식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샤인과 루나가 신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중에. 점심 식사 다 하고 나서요.”
“……아, 역시 그렇지.”
“응! 루나는 기다릴 수 있어요!”
계속해서 기다리는 법을 가르친 덕분인지, 둘은 더 이상 조르지 않고 얌전히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았다.
비스킷, 버터, 애플파이, 우유, 삶은 계란과 양배추 샐러드, 흰살생선찜과 양파 수프가 차례로 나오는 동안, 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신문을 쥔 레이커스의 손만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잘해 주고, 온 파크의 사람들이 우리를 연인으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부추기기도 하고, 왕궁 연회에도 가지 못하도록 뜯어말리더니 다른 사람들이 나랑 같이 가자고 하니까 제가 파트너를 하겠다고 나서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을 잘하나?’
왜 그럴 수 있잖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마음 맞는 고용인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내가 그의 마음에 쏙 드는 가정교사인 거지.
한밤중에 공작가의 지하실을 염탐하다가 딱 걸려도 자르기 싫을 정도로, 너무너무 마음에 들고 놓치기 싫은.
‘……샤인과 루나가 날 좋아하긴 해.’
하지만 이 가정은 좀 틀린 부분이 있는 게, 아무리 봐도 샤인과 루나의 호감도보다 레이커스 본인의 호감도가 너무 빨리 올랐고 제일 높았다.
‘……그는, 뭔가…… 그가 내게 느끼는 감정은 뭔가…… 반가움 같이 느껴진달까?’
난 내가 떠올린 단어가 정말 딱 적절하다고 느껴서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반가움. 그는 뭔가…… 날 반가워해.’
그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가 가끔 나와 단둘이 있을 때마다 말하곤 하는 ‘잊지 않는다’라거나 ‘기억한다’라는 말들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이 있었다.
“오늘 아침 기사에, 트리버 경감의 인터뷰가 실렸군요.”
레이커스가 내게 말을 거는 소리에, 난 그가 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내 식기가 놓인 쪽으로 얼른 시선을 옮겼다.
“아, 그…… 그래요?”
“네. 파크의 범죄를 뿌리 뽑겠다는 기사입니다만,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요?”
“용의자를 확정했고, 그 뒤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
“……네?”
난 깜짝 놀라 레이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레이커스의 사이에는 샤인과 루나가 줄줄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두 번 접힌 갈색 신문은 두 아이의 손을 통해서 내게 넘어왔다.
얼른 신문을 펼치자, 1면에 대문짝만하게 트리버 경감의 얼굴이 실려 있는 게 보였다.
흑백 사진인데도 어쩜 그렇게 온 얼굴에 난 수염이 산타클로스같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파크를 둘러싼 범죄, 드디어 종식되나……
중앙경시청의 트리버 경감, 용의자를 추적 중이라고 밝혀.]
그럴듯한 타이틀을 보자, 어쩐지 불안한 생각부터 들었다.
‘이 산타클로스 경감님, 대체 왜 겨울이 되기 전부터 나와서 이 난리야?’
누누이 말하지만, 게임 속의 경찰들은 일단 무능한 게 기본이다.
물론 원래 스토리보다는 더 많은 증거를 수집했을 테지만…… 그들이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사건이 깔끔하게 해결될 거라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는다.
난 타이틀 아래의 기사를 읽어 내렸다.
[……아**체 그린(27)이 무사히 돌아옴과 동시에 사건의 진척이 있었다고 트리버 경감은 말한다. 그녀가 납치되어 있던 곳의 벽에 남은 거대한 증거가, 캐서 헌트의 집에서 발견된 증거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오망성!’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부분을 생각했었다. 연쇄살인마가 남긴 흔적이 납치범의 은신처에도 남아 있다는 건, 모방범죄자이거나 범죄자 사이에서 그 오망성 마법진 같은 게 대유행이라도 하고 있거나…… 그 집이 연쇄살인마와 알콩달콩 함께 쓰던 집이거나…….
혹은, 그자가 연쇄살인마라는 걸 테니까.
‘그럼 레이커스는 뭔데? 연쇄살인마가 두 명이야? 아니면, 각각 다른 범죄자인 거야?’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런데 트리버 경감이 벌써 감을 잡았단 말이야?’
난 한숨을 푹 내쉬며 얼른 신문의 다음 구문을 읽었다.
[트리버 경감은 여러 연쇄 살인 장소에서 동시에 목격된 바 있는 유력 용의자인 모리슨 알터(49)를 공개 수배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실종 중인 모리슨 알터의 행방을 추적 중에 있으며…….]
난 모리슨 알터라는 이름을 읽는 순간 속이 터져서 신문을 덮어 버렸다.
‘……아, 이 아저씨. 사고 칠 줄 알았어. 모리슨 알터를 범인으로 지목한 루트는 옛날 옛적에 배드 엔딩으로 결론 난 지 오래네요.’
만약 트리버 경감이 정말 선량한 신문 배달부에 불과한 모리슨 알터를 잡아다 심문이라도 한다면, 진엔딩과는 상관없는 전개를 봐야 할지도 모른다.
‘아, 배드 엔딩은 이제 질렸다고요.’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