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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66화 (66/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6화

앨라이 쿠스까지 떠나고 나자, 남은 건 로스 그린 한 명이었다.

그녀는 저번에 봤던 때와 그리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턱 끝에 길이를 맞춰 자른 연녹색의 머리카락과 옴폭 들어간 눈두덩이가 인상적인 얼굴.

그래도 공작가에 온다고 차려입은 건지, 고가의 장신구들과 그에 걸맞은 정장 차림.

하지만 조금 다른 것은 눈빛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는 그저 짜증이 가득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많아 보였고 어딘가 움츠러들어 보였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기에,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나를 아주 오래, 처음 보는 사람을 보듯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린가에서 봤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몹시 왜소하고 지쳐 보였다.

“아르비체, 넌 여기 온 뒤로 너무 많이 변해서 마치 딴사람인 것 같구나.”

“그런가요?”

“그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니…… 너무 대단한 사람이 됐어. 고작 한 달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전혀 안 그래요.”

로스 그린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 다른 마차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신전에서 사용하는 새하얀 마차와 값비싼 장식이 매달린 다른 마차들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천천히 내게로 돌아왔다.

“……우리 딸은 한 번이라도 왕궁 연회에 참석해 보는 게 소원인데, 아르비체 너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다, 됐다.”

저번과는 달리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질투보다는 체념이 더 짙게 서려 있었다.

“이 정도쯤 되니까, 내가 뭐라고 말을 얹을 수가 없구나.”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혼잣말인 것처럼 한참을 중얼거리는 로스 그린에게 다가갔다.

“손을 좀 잡아 주련.”

난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귀족인 그녀의 손은 집안일을 많이 하지 않아 제법 고왔지만, 세월의 흐름을 비껴갈 수는 없어서 꽤 주름져 있었다.

난 그 손을 양손으로 쥐고 톡톡 두드려 주며 생긋 웃었다.

“그래도 제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와 주시고 감사드려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날 바라보았다.

“……넌 내가 밉지도 않니?”

“밉다기보단 너무하다고 생각하죠.”

내가 솔직하게 대답한 게, 오히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로스 그린은 뭐가 그렇게 허탈한지 작게 웃었다.

“내가 네가 걱정되어서 왔겠니? 가족도 하나 없는 네가 그렇게 큰일을 겪었다는데 고모인 내가 얼굴도 비치지 않으면 얼마나 욕을 먹겠어?”

‘하여튼, 말 한번을 예쁘게 하는 법이 없다니까.’

“그렇게 대외적인 이미지가 걱정되어서 오신 것치곤 너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던데요.”

그녀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아주 큰 결심이라도 하는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켜고서야 한숨처럼 말했다.

“네 부모의 유산은 원래도 네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요?”

‘저번엔 절대 못 주겠다는 것처럼 말하더니만……?’

로스 그린은 내키지 않는 말을 하려니 자꾸 입술이 마르는지, 제 창백한 입술을 몇 번이나 축이더니 날 바라봤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구나.”

“그야…….”

“저번에 경관을 데리고 올 때부터 알아봤지만…… 조사를 할 거라느니, 협박이나 일삼고. 좀 잘나가게 됐다고 그런 식으로 굴 줄은 몰랐다.”

“……제가요?”

“아무튼, 됐으니 가져가거라.”

그녀는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던지듯 내게 안겨 주었다.

가볍기 짝이 없는 주머니의 안을 열어 살펴보니, 무슨 은행 증서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그걸 받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던 나는 숨을 흡 들이마셨다.

‘……10,000G?’

귀족 사회에서 이 돈은 단 한 번의 사치로 다 써 버릴 수 있는 정도의 돈일지도 모른다.

레이커스가 내게 사 주었던 드레스와 장신구 일체가 6,000G 정도 했던 걸 생각하면 약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봉급을 받아 생활하는 일개미에겐 정말 대단한 액수였다.

아르비체 부모의 유산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나로서는 반가운 돈이었다.

일단 무엇보다도 당장 돈이 필요했고, 유산 분쟁까지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로스 그린이 입술을 축이더니 날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어떻게 운이 좋아서 대단한 분들과 알고 지내는 모양인데 괜히 어디 가서 내 딸이나 나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는 하지 말고…… 그리고, 괜찮은 자리 있으면 소개도 해 주고 그러렴. 친척 좋다는 게 다 뭐니?”

‘이렇게 내키지 않는 얼굴로 떼먹은 돈을 돌려주면서, 말이나 못하면.’

참 대단한 뻔뻔함이다.

로스 그린은 어디다 내놓아도 참 행복하게 살겠다.

“전 그런 악담을 늘어놓은 적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뭐, 그러면 됐지만…… 이제 제대로 정산했으니까, 이제 그만하렴. 그동안도 내가 무슨 다른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니라, 네가 허투루 쓸까 봐 잘 보관해 두었던 것뿐이잖니.”

“……네?”

길게 기른 손톱으로 에메랄드빛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빗어 넘긴 그녀는, 이제 볼일을 다 봤다는 듯 몸을 홱 돌렸다.

난 그녀의 등에 대고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협박을 일삼았다니 무슨 말이지? 그린가에 대해서는 신경도 써 본 적이 없는데?’

아만타 경관이 내 일을 누구한테 말했을까?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누가 굳이 협박까지 해?

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 사는 법이다.

‘여기까지 평판 하나 때문에 온 사람이잖아. 괜히 평판이 나빠질까 봐 겁이 나서 돈을 돌려주려고 없는 얘기를 핑계 삼아 지어 낸 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저 갑자기 늘어난 재산을 어디에 쓸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협박이니 하는 얘기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 일정은 의상실에서 온 손님들이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블리에 씨가 안내해 주는 대로 작은 응접실에 들어갔다가, 여덟 명이나 되는 의상실 직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음으로 놀란 것은 내가 주문한 드레스 때문이다.

“……와. 정말 예쁘긴 예쁘네요.”

솔직히 말해서 부가 기능 하나만 보고 고르느라 제대로 디자인을 보지도 않았는데, 막상 이렇게 이 드레스만 따로 보니 너무 예뻤다.

난 부티크에서 보았던 것보다 두 배는 더 반짝거리는 것 같은 드레스 자락에 대단히 감탄했다.

몇 겹이고 겹쳐진 레이스의 겉감에는 반짝이는 스팽글 같은 것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고, 그 아래의 레이스에는 하얀색 실로 장미가 수놓아져 있었다. 게다가 허리선을 따라 박힌 작은 장식들은 자세히 보니 진주였다.

‘와…… 엄청나게 비싸더라니, 부가 기능 빼고도 대단한 드레스였네. 드레스에 대한 없던 로망도 생기겠어, 정말.’

저번에 본 적 있는 사장님은 나보다 더 설레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르비체 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정말.”

사장님의 목소리가 너무 진심이라 작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걱정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드레스 사이즈를 다 조정하고 배달을 가야지 하는 순간 그 비보를 들었단 말입니다. 드레스도 드레스지만, 아르비체 님의 그 용기 있고 대단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찌나 존경심이 들던지…….”

“……네?”

“샤인 도련님을 지키려고 휘슬을 건네고 대신 납치당하셨다면서요. 그게 사실인가요?”

“……아, 그러긴 했는데요.”

[안톤 리오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3/198)]

알림창을 보며 난 좀 당황했다.

그냥 의상실 NPC라고만 생각했던 분이 내게 이렇게 높은 호감을 가질 줄은 몰랐다.

“요즘같이 흉흉한 시대에 다들 제 한 몸 사리기 바쁜데, 이렇게 용기 있는 분이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이렇게 아르비체 님의 드레스를 만들어 드릴 수 있는 게 어찌나 영광인지…… 제가 그 짧은 시간에 구할 수 있는 사람이란 사람은 다 구해서 추가 작업도 해 드렸답니다.”

난 드레스를 다시 바라봤다.

‘……어쩐지.’

다시 생각해 봐도, 처음 구매를 결정할 때는 드레스가 저렇게까지 화려하게 반짝거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추가 작업이 들어갔다는 말을 들으니까 납득이 됐다.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요.”

“마음에 쏙 들어요. 너무 튀는 것 같긴 한데…….”

“에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레이커스 님의 첫 공식 연인이신데 이 정도는 하셔야죠.”

‘이 소문은 어째 사그라들질 않네.’

난 이제 더 이상 부정할 기운도 없어서 작게 웃기만 했다.

“……하하. 공식 연인이라니,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레이커스 님께서는 당신의 옷도 맞추기 귀찮아하시는데, 아르비체 님과 나란히 오셔서 다정하게 드레스를 골라 주시는 모습을 보고 단박에 알았지요.”

장사를 오래 하다 보면 보는 눈이 생긴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던 사장은 내 칭찬에 이어 레이커스의 칭찬까지 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천생연분이세요. 레이커스 님께선 정말 희망의 지팡이 같은 분이시니까요. 제 집사람도 레이커스 님께서 후원하는 병원이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 무슨 일이 있었어요?”

“뇌출혈이었습니다. 길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 통째로 기억이 안 난다고는 하는데…….”

“어머머머. 지금은 괜찮으세요? 어쩌다 그런 일을…….”

난 대답하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랑 묘하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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