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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65화 (65/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5화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구는 편이라고 생각했던 라떼가 이렇게 틱틱 대는 건 좀 의외였다. 랑비엘이 워낙 여자들에게 인기몰이 하는 편이라 더.

랑비엘은 날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큰일을 겪으셨으니 힘드시겠습니다. 어디 가지도 못하고 당분간은 푹 쉬셔야겠군요.”

“네? 아…… 그렇죠.”

난 손부채로 촉촉한 눈가를 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랑비엘 님도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

“왕궁 연회에 함께 가자고 청할 셈이었는데, 안타깝게 됐습니다. 하지만 굳이 연회가 아니라도 데이트할 장소는 많으니까, 언제든 다시 청하겠습니다.”

“……아, 왕궁 연회요? 거긴 갈 생각인걸요?”

랑비엘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순간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나는 랑비엘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중 제일 큰 목소리의 주인은 아만타 경관이었다.

“연회를…… 가신다고요? 아니, 아직 마음도 다 추스르지 못하셨을 텐데,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하지만.”

아만타 경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가…… 제가 부족해서, 이런 일을 겪게 해 드리고…….”

난 고개를 저었다. 캐서 헌트의 부검 결과를 보고 싶어서 경관을 일부러 따돌린 내가 나빴다.

“정말로 괜찮은걸요.”

“……정말 왕궁 연회에 가시겠다면 제가 호위로 함께 가겠습니다!”

“네?”

“제발 제가 지켜 드리게 허락해 주세요.”

“……아뇨,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아요. 경관님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줄곧 구석에서 기도만을 올리던 새하얀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번에 봤을 때는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이미지뿐이었는데, 그사이에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건지 앨라이 쿠스는 꽤 단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만타 경관이 더 이상 우기길 포기하고 길을 터 주었고, 라떼와 르뮈에, 밀로라드는 앨라이 쿠스의 기백에 눌려 나를 놓고 옆으로 물러났다.

“꼭 가셔야 한다면, 저와 함께 가시죠.”

내게 다가온 앨라이는 대뜸 이상한 소리를 꺼냈다.

“……네?”

앨라이 쿠스는 내 반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서 대뜸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내 손을 양손으로 쥐고 작게 기도문을 읊었다.

신관의 앞에 신도가 무릎을 꿇는 일은 흔하겠지만, 그 반대는 절대 흔하지 않을 거다.

응접실 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와 앨라이를 바라보았다.

‘……분명, 주목받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자는 목표가 있었는데 말이야.’

“……저, 왕궁 연회에 함께 가자는 건 어떤 말씀이신지.”

“망각의 축복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임을……. 만약 아르비체 님께서 연회에 가고자 하신다면, 그 또한 큰 안배를 위한 한 걸음이시겠죠.”

“네?”

앨라이가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시선을 맞추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에 제가 대신관 대리로서 왕궁 연회에 참석합니다. 파트너로 간다면 당연히 제가 호위도 겸하겠죠.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에 놀라움이 더해지는 게 느껴졌다.

‘대신관 대리?’

‘이 신관분이 이번에 차기 대신관으로 지명받은 그분이잖아. 몰랐어?’

‘헉, 그분이 이분이시구나. 워낙 무명이셔서 얼굴을 몰랐어. 그전에 쟁쟁한 후보들이 많았는데, 다 제치고 갑자기 등장하신 걸로 말이 많았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

밀로라드가 손가락으로 앨라이를 가리켰다.

‘저분, 저번에 우리랑 살롱에서 마주쳤잖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헉! 진짜 그러네, 그분이다. 근데, 약간 알비한테 마음 있는 눈치 아냐?’

‘약간이라니, 저렇게 대놓고 티를 대는데?’

‘뭐야 뭐야, 알비 인기 완전 많아.’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랑 같이 가는 게 더 재밌을 텐데. 파트너는 무슨 파트너야, 완전 구식이야!’

‘그러니까! 그래도 재미는 있지 않아?’

‘너희 둘, 호들갑 좀 그만 떨어.’

라떼와 르뮈에, 밀로라드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얼굴을 붉히며 수군거려 댔고,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로스 그린 고모가 뭔가 분하다는 듯 제 옷을 다 구겨 놓을 기세로 꽉 움켜쥐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 신관 나리. 그린 양은 나와 선약이 있는데?”

그 와중에 눈치라곤 없는 랑비엘이 말을 얹었다.

라떼와 르뮈에는 또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흥미로운 눈으로 랑비엘과 앨라이, 나를 번갈아 보며 꺅꺅거려 댔다.

‘아니, 내가 괜찮은지 보러 왔다며? 그런데 이야기가 왜 여기로 흘러간 거야?’

당황스러워서 다른 이야기를 막 꺼내려는데,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부드러운 저음이 아주 자연스럽게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손님 대접을 제가 해야 했는데, 그린 양의 손님이라 얼굴을 내밀지 않았더니 이야기가 멋대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쟁쟁한 인물들로 가득한 방인데도, 그는 문간에 기대선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 저택의 주인, 레이커스였다.

단박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레이커스는 랑비엘과 앨라이를 한 번씩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그린 양은 저와 파트너가 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안부 인사가 끝났으면 심약한 환자를 괴롭히지 말고 돌아가 주시죠.”

레이커스는 아주 부드러운 투로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서 가벼운 불쾌감이 느껴진 것은 착각이 아닐 거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앨라이가 차분하게 앞으로 나섰다.

“리어먼드 공작님, 아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앨라이 쿠스, 차기 대신관으로 지명받은 사람입니다.”

차기 대신관 지명에 대해 소식이 늦은 사람들 사이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레이커스는 놀라기는커녕 신관에 대한 예를 차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건 지금은 평신관이라는 건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뭐, 여기까지 와서 우리 그린 양을 걱정해 준 건 고맙군.”

“그게 아니라…… 제가 아르비체 님의 곁에 있는 게 더 마음이 안정되실 겁니다. 최근 큰일도 겪으셨고…….”

“피차 토론할 주제도 아닌 것에 대해 논의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리어먼드 공작님께서 신관들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하시던데, 직접 이야기를 섞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속에 털어놓지 못하는 부분이라도 있으신지요?”

희미한 미소를 띤 앨라이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레이커스가 서로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금발에 잿빛 눈을 한, 웃을 때면 붉은 장미처럼 아름다운 사내와 그저 희디흰 청초한 한 떨기 백합 같은 사내를 나란히 놓고 보니 눈은 즐거웠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레이커스는 왜 갑자기 나타나서 깽판을 놓고 그래?’

정말로 나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저들끼리 그냥 사이가 안 좋은 것 같긴 한데…… 얘길 들어 보면 막상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 같았다.

‘이걸 뭐라고 말려야 해……?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당황한 채로 둘을 이리저리 바라보는데, 내가 말을 꺼내기 직전에 랑비엘이 먼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 다 큰 귀족과 신관님께서 이런 걸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그럽니까? 응? 그러지들 맙시다.”

이제 화려한 얼굴이 셋이 되었다.

하얀 머리와 금색 머리 사이에 끼어든 은빛 머리의 랑비엘이 싱그러운 미소를 흘리며 웃더니 둘을 중재했다.

난 랑비엘에게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랑비엘 멕레이가 이리저리 마당발인 캐릭터인 걸 생각해 보면 성격도 좋긴 한 모양이야. 잘한다, 잘한다.’

하지만 랑비엘도 딱히 내 뜻대로 따라 주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커스, 왜 그래? 저번에 따로 만나 물어봤더니, 그린 양이 너와는 절대로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던데?”

그는 뜬금없이 내 이름을 들먹이며 레이커스를 긁었다. 낌새를 눈치챈 레이커스의 표정이 금세 미묘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랑비엘?”

“나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 그린 양에게 파트너 고를 기회는 줘야지?”

난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랑비엘도 철없긴 마찬가지야. 싸움에 기름을 붓는 것도 아니고. 고르긴 뭘 골라? 내가 거길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앨라이는 랑비엘의 제안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로 나를 바라봤지만, 레이커스는 기도 안 찬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피곤한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그만하고, 이제 정말 가 주시죠. 시간이 늦었습니다.”

레이커스는 말 한마디로 날 위해 모여 준 고마운 손님들을 아주 배려심 부족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다.

앨라이와 랑비엘은 더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슬슬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시간이 늦긴 했죠. 이렇게 인사도 드렸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엔 더 달라진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만타 경관의 인사를 필두로, 라떼와 르뮈에, 밀로라드가 날 꼭 껴안고선 근시일 내에 초대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내가 배웅을 위해 황급히 그 뒤를 따라 나가자, 앨라이와 랑비엘도 어쩔 도리 없다는 얼굴로 더 우기지 않고 마차가 있는 쪽으로 나섰다.

나는 모처럼 이렇게 모여 준 이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제오늘 봄바람처럼 부드럽게만 굴던 레이커스가 피곤하단 얼굴로 모두를 내쫓고 있는 걸 보니 더 이상은 역시 무리였다.

난 재빨리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고서 모두를 배웅했다.

모두가 떠나고 남은 것은 앨라이와 로스 그린이었다.

앨라이는 새하얀 마차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가 나를 다시 돌아봤다.

“차기 대신관 지명식이 왕궁 연회 전날에 있습니다만…… 그때도 참석이 매우 힘드시겠지요?”

“알면서 뭘 물어보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팔짱을 낀 레이커스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내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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