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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64화 (64/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4화

내 방과 레이커스라는 단어를 결부시키자, 그가 내 등을 오래도록 토닥여 주며 날 달래고 안정시켜 주었던 장면이 절로 연상되었다.

‘……설마, 경관과 인터뷰하고 나서 내가 또 겁에 질려 있기라도 할까 봐 와 본 건…… 아니겠지?’

레이커스는 내가 조사받는 것에 대해서 줄곧 걱정해 줬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난 한숨과 함께 팔로 눈가를 덮었다.

얇은 커튼 사이를 파고 들어오던 이른 오후의 햇살이 가려지자, 시야가 검게 변했다.

수치스럽고, 황당하고, 혼란스럽다.

‘그 와중에 레이커스의 사격 강의를 받게 생겼다는 게 제일 웃겨.’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머릿속으로 한참 생각하다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지쳐 깜박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어느덧 창밖에 해가 떨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가을이라 그리 해가 짧지 않은데도 저 정도면, 한두 시간은 잔 게 틀림없었다.

시계를 확인한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상실에서 오기로 한 시간이 지났잖아. 도대체 왜 아무도 깨우러 안 온 거야?’

후다닥 일어나 찬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겉옷을 쥐고서 문을 열고 나가자, 마침 급한 걸음으로 지나가던 블리에 씨가 멈춰 서더니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 깨셨네요.”

“아…… 네. 제가 자는 거 아셨어요?”

“사실 공작님께서 이번 주는 그냥 쉬라고 하셨는데 굳이 아이들하고 놀아 주신 거니까요. 주무시는데 깨울 수는 없죠.”

그렇게 말하는 블리에 씨의 눈 속에는 아직도 염려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그 멀대같이 커다란 경관이 어지간히도 이상한 소리를 하고 간 모양이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살짝 웃는데, 그녀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슬슬 일어나시지 않으면 곤란할 참이긴 했어요.”

“네?”

“손님이 오셨거든요.”

‘손님? 내 손님?’

내 앞으로 손님이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편지로 안부를 물었던 사람 중 누군가가 아닐까?’

“어머, 그러면 정말 깨워도 괜찮았는데요. 누가 왔어요?”

“그게…… 의상실에서도 오셨고, 손님은 총 일곱 분이나 오셨어요.”

나는 계단 쪽으로 다가가다가 굵은 난간 손잡이를 쥐고 그대로 멈춰 섰다.

“일곱…… 명이요?”

“네. 어제도 오셨던 분도 계시고요.”

“……그렇게나 올 사람이 있나요?”

난 좀 당황해서 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고저택의 1층에는 응접실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가장 넓고 고풍스러운 공간은 공작 본인의 손님을 받을 때만 이용했다.

그런데 의외로 블리에 씨가 나를 안내해 준 곳은 바로 그 가장 큰 응접실이었다.

좀 놀라서 블리에 씨를 돌아보자, 그녀가 둥근 안경 너머로 작게 웃으며 귀띔해 주었다.

“공작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저 옆의 작은 응접실에 옹기종기 모인 이분들을 보고는 얼른 여기로 옮기라고 하셨어요.”

난 응접실 입구에 도착하자, 레이커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단박에 이해했다.

응접실의 광경은 썩 기묘했다.

아무래도 일곱 명의 손님은 내게 편지를 보냈던 사람과 그대로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아만타 경관, 랑비엘 멕레이, 앨라이 쿠스, 라떼 라커, 르뮈에 라루스, 밀로라드 드라셀, 거기에다가 답신은커녕 편지를 열어 보지도 않은 아르비체의 고모 로스 그린까지 와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문틈 사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새삼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진짜 화려한 면면이긴 해…….’

한 명은 경관이고, 또 한 명은 곧 대신관이 될 이였고, 마탑과 외과 병동, 상단길드에서 각각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 잘나가는 귀족 영애들도 섞여 있었다. 거기에 레이커스와도 친분이 있는 후작가의 도련님까지.

난 그사이에 섞여 있는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고모 로스 그린이야말로 아르비체 그린의 본체와 인연이 있던 유일한 인물인데…… 어째 이 구성에 섞여 있으니 귀족이라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초라해 보이네.’

인원이 많기도 했지만, 워낙 화려한 구성이라 그들을 어디 좁은 응접실에 몰아넣어 놨다고 생각하면 내가 다 진땀이 날 일이긴 했다.

물론 납치 사건이 큰일이긴 하지만, 이 바쁜 사람들이 내 납치 사건 하나에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와 줬다는 게…… 정오쯤 답신을 했는데 이렇게 빨리 전부 다 모여서 응접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게 너무 당황스럽고 고마웠다.

“다들 도착한 지 얼마나 됐어요?”

“정말로 오래 안 됐습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래요?”

“네. 앨라이 쿠스 신관님께서 제일 먼저 오셨고, 멕레이 후작님께서 그다음, 그리고 경관님과 나머지 분들이 한꺼번에 오셨어요. 아르비체 님께서 쉬고 계시다고 하니, 신관님께서 깨우지 말라고 당부하셔서 이렇게 됐네요.”

“그렇군요…….”

‘여긴 공포 게임 속이잖아. 연쇄 살인 사건이 횡횡하고, 실종 사건은 더 빈번한.’

그런 곳에서 납치 사건은 어쩌면 별것 아닐 수도 있을 텐데.

눈에 물기가 핑글 도는 게 느껴져 빠르게 눈을 깜박이는데, 블리에 씨가 옆에서 뿌듯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다들 아르비체 님이 걱정되어 오셨습니다. 감사한 분들이세요.”

그렇지 않아도 괜히 마음이 뭉클한 와중에 블리에 씨가 한 말 때문에 눈물이 더 날 것 같았다.

날 걱정해서 와 준 사람들을 보고 블리에 씨가 정말로 고맙다는 얼굴을 하는 게, 그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마웠다.

나를 그냥 같은 건물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한 식구처럼 대해 주는 기분이 들어서.

“맞아요. 정말, 정말로 고마운 분들이에요. 그리고 블리에 씨도, 항상 신경 써 줘서 정말 고마운 거 알죠? 덕분에 정말로 좋아졌어요.”

“어머, 정말요? 하지만 경관님께서…….”

“모과차 효과가 정말 좋았거든요.”

내가 눈을 찡긋해 보이자, 블리에 씨는 문을 잡아 주다 말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블리에 화이트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2(181/198)]

호감도 창이 갱신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그녀가 품에서 단정하게 각이 잡힌 손수건을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렇게 항상 사소한 일에도 매번 인사하실 필요 없어요. 뭐…… 그 점이 아르비체 님의 매력이시긴 하지만요.”

“하지만 정말로 고마운걸요.”

“자자, 알았으니까 얼른 가 보세요. 다들 기다리시겠어요. 전 다과를 좀 더 내올게요. 의상실에서 오신 분께는…….”

“아, 지금 어디 계세요?”

“바로 옆 응접실에 계세요.”

“제가 곧 가 보겠다고 전해 주세요.”

“네.”

블리에 씨는 답지 않게 쑥스러운지 나를 등 떠밀어 들여보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애매한 침묵만이 흐르던 방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봤다.

한 명씩 따로 만나도 반가운 면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꺼번에 내게 다가오는 것을 보자 난 결국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괜찮아?”

“좀 괜찮아요?”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고, 대뜸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많은 사람 사이로 앨라이 쿠스와 눈이 마주쳤다. 눈꽃을 닮은 정결한 그 눈동자가 나를 보고서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곧 차기 대신관 지명식을 한다고 했던가?

정말 연일 정신이 없을 텐데…… 편지로 안부를 전했는데도 굳이 내 얼굴을 보겠다고 와 준 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손수건을 손에 말아 쥐고 눈가를 꼭꼭 눌러 닦는데, 라떼 라커가 다가와 다짜고짜 날 껴안았다.

그 와중에도 르뮈에는 내 팔다리를 쥐고,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봤고 밀로라드는 둘을 뜯어말렸다.

“알비! 괜찮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진짜 아직도 놀라서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 내가 괜히 마탑에 놀러 가자고 해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다 내 탓인 것 같아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좀 괜찮아? 겉으로 봐서는 괜찮은 것 같은데…… 어디 긁힌 곳도 없는 것 같고.”

“미안해, 알비. 라떼와 르뮈에가 이렇게 정신없이 굴 줄 알았는데 워낙 둘이 걱정이 심해서 안 데려올 수가 없었다니까.”

셋이 한꺼번에 종알종알 말을 걸어 오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뭐부터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방긋 웃고 말았다.

“괜찮아. 다 괜찮아. 이렇게 걱정해 주는 너희가 있는데, 내가 뭐가 문제야.”

라떼가 내 말이 마음이 드는지 내게 폭 안긴 채로 날 토닥거려 주었다.

하지만 라떼가 나보다 훨씬 더 키가 작아서 내가 그녀를 안아 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납치범은? 어떻게 됐어? 잡았어? 내가 기요틴보다 훨씬 더 악독하고 고통을 주는 사형 수단을 만들어 볼게. 응?”

“뭐…… 아직.”

내 진술을 제대로 들어 주지도 않던데 제대로 된 범인을 잡아 올 거라는 기대는 전혀 들지 않는다.

대답에 담긴 허탈함을 눈치챘는지 라떼와 밀로라드, 르뮈에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나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내 어깨를 한참 토닥거려 주었다.

“거기 아가씨들, 언제까지 순서를 기다려야 합니까? 저도 그린 양 얼굴 한번 보자고 여기까지 왔는데.”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자 은빛 곱슬머리를 한 미남자가 고양이처럼 긴 동공으로 생긋 웃고 있었다.

“맥레이 님?”

“안부를 여쭈러 왔지요.”

맥레이는 자연스럽게 손등 키스라도 할 생각으로 내 손을 쥐려고 했지만, 라떼가 내 양손을 낚아채는 게 먼저였다.

“이거,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파다한 랑비엘 님 아니세요? 저희 알비한테는 무슨 볼일이세요?”

라떼의 방어적인 태세에 랑비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 속에서는 호감도 올리는 난이도가 그렇게 어려운 캐릭터였던 주제에, 여성에게 말 한번 걸기가 너무 힘들다는 듯한 태도를 해 보이는 게 너무 웃겼다.

난 혼자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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