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3화.
경관이 돌아가고 나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다가 밖으로 나오자, 블리에 씨가 얼른 내게 다가왔다.
“방으로 올라가실 거죠?”
“네? 아, 네. 그런데 의상실에서 올 사람도 곧 만나야 하니까, 그냥 아이들하고 놀아 줄까 해서요.”
블리에 씨는 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관님께서 얼마나 염려하고 가셨는지 몰라요.”
“……그건.”
그 경관이 사람 말을 도저히 믿지 않고 오해를 했기 때문인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갔기에 저렇게 걱정하는 얼굴을 해?’
“푹 쉬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올라가시죠.”
난 애초에 세이브 캐릭터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품고 있었던 데다, 이곳에 온 뒤에 블리에 씨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의지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날 염려하는 표정을 하며 강권하는 것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좀 쉬고 올게요.”
난 거의 내쫓기듯 방으로 올라갔다.
아마 그 경관이 경고하고 간 것은 내 마음의 건강과 관련된 것이겠지만, 블리에 씨는 가을치고는 조금 두꺼운 솜이불을 덮어 주고 따뜻한 모과차까지 내주고서야 물러갔다.
난 문틈으로 사라지는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면서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 게 기분 좋다는 걸 인정했다.
목까지 덮은 이불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게임에서 벗어나서 원래 세계로 완전히 돌아가면, 블리에 씨와도 헤어지는 거네.’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미친 거 아냐?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그럼 이 공포 게임 속에서 살 거야? 매일매일 간 졸이면서? 언제 도끼니 칼이니 하는 것에 찔려 죽을까 두려워하면서?’
진짜 나도 안이해졌다.
안이해 빠졌다.
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내 양쪽 볼을 착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막막하긴 해도, 겁은 그리 많이 나지 않아서 이딴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니, 무서워 죽겠는데…… 진짜 너무너무 무서운데, 그 두려움 중에 레이커스에 대한 두려움은 포함되어 있었지만, 납치범에 대한 것은 어쩐지 많이 희석되었다.
‘그런데 총을 쏴도 죽지 않는 그 괴상한 괴물이 더 무서워야 하는 거 아냐?’
나는 나도 모르게 레이커스가 나를 지켜 주는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난 누운 채로 머리를 헝클었다.
‘……진짜 환장한다.’
어쩌면 정경유착의 대표 주자인 트리버 경감이 나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살인마에게 돈을 받는 게 낫지, 살인마의 보호를 받는 건…… 그걸 넘어서서 고마워할 지경이 되는 건 도대체가…….’
나는 정신을 차리자고 중얼거리며 얼른 사건 수첩부터 열었다.
하지만 사건 수첩을 아무리 뒤적여 보아도 새로 추가된 내용은 없었다.
계속 확인하고 있었지만, 그저 내가 납치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사건에 관한 기사가 새로 스크랩되어 있을 뿐이었다.
난 실망이 섞인 한숨을 푹 내쉬며 예상 피해자가 적힌 페이지를 다시 열었다.
[유력 예상 피해자 : 모니카 파울로
거주지 : 왕궁
참고 : 동료 웨인 이슈의 실종 사건 수사에 협조 중. 까마귀 그림이 그려진 편지를 받았다고 함.]
역시 적힌 것은 모니카에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모니카 다음의 예상 피해자가 슬슬 표시될 때가 되었는데, 그것조차 아직인 모양이었다.
‘플레이어일 때는 누군가 죽어 나가는 것을 막는 게 아니라, 누가 죽어야 사건이 전개되니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자료 수집에 진짜 도움되는 유용한 수첩이었는데. 이젠 그렇게 도움이 안 되네.’
난 아쉽게 수첩을 접어 넣고, 다른 창을 이것저것 클릭해 보았다.
[아이템 : 6연발 권총. 전용 총알 0개. 사용법을 조회할 수 있습니다.]
6연발 리볼버의 총알이 다 떨어진 것 말고는 달리 특이한 점은 없었다.
난 리볼버를 아이템창에서 꺼내 손에 쥔 채로 천장을 겨냥해 보았다. 이것을 실제로 사용했던 감각이 손에 그대로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걸 좀 더 제대로 활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레이커스에게 언제까지 보호받을 순 없잖아?’
문득 총을 겨눈 사이에 납치범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총을 가진 것 따윈 그저 재밌는 유흥거리에 불과하다는 듯 계속 낄낄거리면서 그가 중얼거렸던 말이.
‘레이커스의 총알이군. 그렇지?’
‘아주 조금은 아파. 아주 조금은.’
‘레이커스의 총알이라고 언급한 걸 보면, 총알의 종류마다 부가 기능이 다르다는 뜻인가?’
난 문득 밀로라드 드라셀과의 호감도 이벤트에 있던 비밀 상점이 떠올랐다. 분명히 거기에 있던 아주 질 좋고 희소한 아이템 중에 총알이 있었다.
난 인상을 찌푸려 가며 최대한 기억을 떠올려 봤다.
‘뭔가, 특수 효과가 붙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게임 내에서 내가 소지한 돈으로는 도저히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 본 적이 없어서 그 효과까지는 떠오르질 않았다.
<살인자들의 밤>은 선택지형 게임이라서 반복 노가다로 돈을 벌 수가 없었으니까, 아무리 리플레이를 해 봤자 비싼 건 비싼 거였다.
어쨌든 효과가 뭐가 붙어 있든, 비밀 상점에 있던 다른 아이템들의 효력을 생각하면 그것도 꽤 좋은 것일 테다.
‘……밀로라드의 상점에 가기 전에 돈을 좀 마련해야 한다는 얘긴데…….’
난 다시 고민에 빠져 거의 습관적으로 이것저것 다른 창들을 눌러보았다.
문득 내 손이 멎은 곳은 호감도 창이었다.
[랑비엘 멕레이 Lv.2
라떼 라커 Lv.2
레이커스 리어먼드 Lv.4
루나 Lv.3
르뮈에 라루스 Lv.1
밀로라드 드라셀 Lv.1
블란테 빅토리아 아레나 Lv.1
블리에 화이트 Lv.2
샤인 Lv.3
아만타 벨브 Lv.1
앰버 레몬 Lv.1
앨라이 쿠스 Lv.3
트리버 루악 Lv.1]
통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호감도를 올리기 어려워야 하고, 실제로도 더 많은 호감도 수치가 필요한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레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게 눈에 들어왔다.
만약 이 게임 내에서 누군가가 내게 조금이라도 돈을 투자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저 사람 아닐까.
‘……비밀 상점에서 파는 총알이라면 몇 달 치 월급을 가불받는 수준으로 해결될 금액이 아닐 텐데. 어쩌지?’
난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혼잣말로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그린 양.”
“아, 안녕하세요. 생긴 것 하나는 번듯한 공작님.”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쪼르륵.”
쪼르륵은 그가 아주 재수 없는 태도로 음료를 따를 때 나는 소리를 표현해 본 거였다.
난 허공을 쳐다보며 맥없이 일인극을 계속했다.
“돈을 좀 빌리려고요. 아니, 그냥 돈을 좀 받으려고요.”
“제가 호감도가 좀 높긴 하죠. 그래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아, 레이커스 님의 서재에서 몰래 훔친 그 권총 있잖아요. 6연발 리볼버. 거기에 들었던 총알을 다 써서, 괜찮은 거로 좀 사 보려고요.”
“그린 양이 필요하시다면, 총알뿐만 아니라 새 권총도 사 드려야죠. 괜찮은 거라고 하시는 걸 보니 따로 선호하는 취향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오, 그러고 보니 총도 새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더 좋은 부가 기능을 가진 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의 대사는 내가 낸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새파랗게 질려서 딱딱하게 굳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예상대로 문간에 어떤 그림자가 서 있었다.
섬뜩할 만큼 잘생긴, 보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게 되는 남자가.
‘지금 내 말을 다 들은 거야?’
두려움이나 공포보다 수치심이 앞설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거다.
나는 온 얼굴이 다 새빨개진 것을 느끼며 내가 뭐라고 중얼댔는지를 반추했다.
‘내가 이상한 소릴 한 건 아니겠지? 아니, 이상한 소리뿐이었지만…… 아니, 내가 미쳤나 봐. 왜 그랬어? 왜…….’
“여, 여자 혼자 쓰는 방에 이렇게 무례하게 들어오시면 어떻게 해요?”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양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들어 보이면서 입술을 당겨 웃었다.
침실로는 들어오지 않고 문간에 기대서서 그런 제스쳐를 하는 게 나름대로 선을 지키고 있다는 어필인 것 같았다.
“이거, 일부러 엿들은 것도, 일부러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문이 열려 있었고, 말을 걸려다가 ‘공작님’이라는 말이 들리기에 절 부르는 줄 알고 들어왔습니다.”
‘……진짜 못살아.’
난 내 얼굴을 쓸어내리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 애를 썼다.
“저한텐 무슨 볼일이세요?”
레이커스는 내 얇디얇은 낯짝을 살펴보곤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호신용으로 권총 다루는 법을 좀 알려 드릴 생각이었거든요. 총알 정도는 당연히 마련해 드려야죠.”
“……아.”
“따로 구매하시는 것보단 제가 마련해 드리는 게 나을 겁니다.”
나는 지금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비밀 상점 이야기까지 꺼낼 자신이 없어서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죠.”
레이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그걸로 볼일이 끝인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래도 이야기를 다 들은 건 아닌가 보다.’
난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어깨에서 겨우 힘을 뺐다.
레이커스는 돌아 나가려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곤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덧붙였다.
“그래도 생긴 것 하나라도 번듯해서 잘됐군요.”
아마 그와 내가 좀 친한 사이이고, 둘 중 하나가 유력 범죄자 후보가 아니었다면, 난 그에게 베개라도 집어던졌을 거다.
내가 그런 강단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유유자적하게 내 방을 빠져나갔다.
‘……진짜 어이없어.’
난 황당함에 한숨을 내쉬며 털썩 드러누웠다.
한참을 혼잣말을 들킨 수치심과 그런 나를 보고 레이커스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염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나는, 슬슬 졸음이 몰려올 때쯤 문득 의문을 하나 떠올렸다.
‘……그래서 여긴 왜 왔던 거야? 레이커스가 내 방까지 올 일이 뭐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