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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62화 (62/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2화

난 슬쩍 샤인에게 말을 꺼냈다.

“샤인, 그러지 말고 한번 초대해 봐요. 라떼, 르뮈에, 밀로라드는 샤인과 루나를 보고 싶어 하던걸요?”

하지만 샤인의 반응은 영 미적지근했다.

“……으응.”

“왜요? 안 올 것 같아서요?”

“……그런 건 아냐. 리어먼드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데, 누가 초대를 거절하겠어?”

‘그 와중에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쉬는 법이 없네.’

이제 좀 친해지긴 했는지, 저렇게 딱딱하고 오만하게 말할수록 샤인이 제 본심을 가리려 한다는 게 딱 보였다.

권력이나 가문 때문에 사람들이 오가는 게 싫은 거다. 그들이 본심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게.

‘하지만 모두가 샤인을 예뻐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왜 저렇게 의기소침해하는 거야?’

그런 의문이 든 와중에 문득, 다과회 날이 떠올랐다.

그날, 내가 들었던 대화들이.

‘리어먼드 공작님께서도 본인 아이들이면 맡겼겠어요? 부모 없는 불쌍한 더부살이 조카들이라 저런 여자한테 맡기는 거겠죠.’

‘정말 공작님도 착하셔서 탈이라니까요. 갈 곳 없는 형의 애들을 돌봐 주시는 것만 봐도 대단하시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없이 사는 것들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데.’

샤인은 정말이지 가끔 깜짝 놀랄 만큼 소문에 예민했다. 영민하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시녀들이나 레이커스의 손님이 하는 이야기들에서 귀를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란 원래 어른들의 이야기에 끼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냥 심심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곧잘 주워듣나 보다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눈치를 많이 보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더부살이 조카들’이라는 취급이나 받았으니까.

어느 날, 삶이 통째로 바뀌었겠지. 부모님을 잃고 레이커스가 돌보게 되면서부터.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지만, 눈치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다.

분명 처음에는 이런 가정교사 일 같은 거, 대충대충 하면서 레이커스 가문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정이 들어 버렸는지 그런 식으로 생각되질 않았다.

‘……나라도 해 줄 수 있는 일을 해 주고 싶어.’

몇 번 더 권해 봤지만, 샤인은 계속 말을 돌리면서 다음 편지를 보고 싶다는 얘기나 꺼냈다.

‘역시 그 삼인방이랑 샤인과 루나의 깜짝 만남을 기획해 봐야겠는데?’

어차피 내게 초대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었고, 내 상태가 걱정돼서 라떼가 어제 왔다는 이야기도 들은 참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거다.

‘물론 내가 이렇게 예정에 없는 일을 자꾸 벌이는 게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건 알아.’

그렇지 않아도 원래의 스토리에서 자주 벗어나고 일탈하고 있는데, 돌발 행동을 하면 할수록 미래는 더 예측하기 힘들어질 테다.

그러면 내가 가진 정보를 활용하기도 어려워지겠지.

범인을 잡기 위한 일만 해서, 빨리 진엔딩을 보는 게 플레이어로서 가장 효율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내게 그냥 NPC가 아니게 된 지 오래니까.

내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고 있는 동안, 샤인이 얼른 다음 편지를 집어 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건 누가 보낸 거야?”

다음 편지는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두꺼운 흰 봉투였다. 신전의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겉봉만 봐도 누가 보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구석에 적힌 글씨는 역시나 ‘앨라이 쿠스’였다.

‘그러고 보니, 왕궁 연회 때 모니카와 만나는 일에 대해서 한번 상의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뜯는데, 샤인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또 누군데? 남자잖아, 그렇지? 왜 그렇게 그윽한 눈을 하는데?”

“어머, 그윽하다는 말도 알아요?”

“말 돌리지 마. 남자지?”

“뭐…… 남자는 맞는데, 신관이에요.”

“신관은 맞는데, 남자잖아.”

내가 억지로 공포 게임 속의 가정교사 역할을 도맡게 된 뒤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을 상대로 논리적인 설득을 한다는 건, 제법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였다.

같은 이야기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할 때는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는 게 불가능하다.

‘또 저런다, 또 저래.’

대체 남자라는 것에는 왜 이리 집착하는 건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편지를 펼쳤다.

[아르비체 그린 씨에게.

앨라이 쿠스입니다.

좀 괜찮으십니까?

저와 만난 날 그런 큰 봉변을 당하셨다니…… 마음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제가 댁까지 바래다드렸어야 했는데, 일과 중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잠깐 나왔던 거라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중책을 맡게 될 거라는 통보에 더 혼란스러워서…….

어제 댁으로 찾아갔었지만, 공작님께서 지금 만나는 건 어렵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습니다.

언제든 시간이 되실 때 연락해 주시면 곧장 찾아가겠습니다.

당신이라는 크나큰 안배에 제가 위안이 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PS. 저는 이번 주말에 공식적으로 차기 대신관으로 지명받을 예정입니다.

망각의 축복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임을.

- 앨라이 쿠스 드림]

난 편지를 읽으며 작게 웃고 말았다.

‘게임에서 만났을 때랑 이미지 진짜 다르지 않아? 크나큰 안배라니, 아주 주접 왕이야.’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앞을 바라보자, 샤인이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너무 기분 좋아 보여서.”

“……기분이 좋으면 안 되나요?”

샤인이 불만스레 입을 비죽거렸다.

“많이 친한가 보네.”

루나도 내 품에 안긴 채로 얼른 말을 보탰다.

“선생님, 루나보다 이 사람이 더 좋아?”

‘뭐야, 이 쪼꼬미들이 질투하는 거야?’

난 작게 웃으며 루나의 볼을 잡아 늘였다.

“선생님은 루나와 샤인이 제일 좋아요. 알았어요?”

“아라쪄.”

잔뜩 늘어난 볼로 냉큼 수긍한 루나는 행복한 듯 다리를 흔들어 댔지만, 역시 아홉 살이나 되는 샤인은 그렇게 쉽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아냐. 됐어. 다른 편지는 또 뭔데?”

‘왜 갑자기 내 편지에 관심을 가지는 거지?’

난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른 편지들을 한꺼번에 펼쳐 보았다.

하나는 고모로부터 온 거였는데 굳이 뜯어 보지도 않았고, 또 하나는 아만타 경관에게서 온 구구절절한 사과문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랑비엘 맥레이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납치 사건에 대한 안부와 함께 왕궁 연회 전에 언제 한번 찾아뵙고 싶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이 사람은 계속 마주치는 것치고는 묘하게 가까워지질 않는단 말이야.’

하지만 그 또한 피해자 후보니까, 미리 앨라이 쿠스를 만나게 해서 설득해 놓을까 싶기도 했다.

레이커스의 지인이라 자주 이 저택에 들락거리는 모양이니 언젠가 이야기를 할 기회도 있겠지.

편지를 착착 정리하는데, 샤인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선생님은 만나는 남자가 많네.”

난 깜짝 놀라서 샤인에게 손을 내저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해요. 그냥 다 친구예요.”

“친구라고?”

“그럼요.”

샤인은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가 풀었다. 그러곤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종알거렸다.

“난 허락 못 하니까, 알아 둬.”

“……네?”

“다른 조무래기들하고 만나는 건 허락 못 한다고.”

그 귀여운 선언에 난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만나는 게 아닌데요?”

“아무튼! 아무튼. 이미…… 리어먼드가에 한자리 꿰찰 거라는 소문도 다 났으면서.”

‘한자리 꿰찬다’라는 말이 긍정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또 어디서 말을 주워들었을 뿐인 샤인을 탓할 수야 없었다.

그보다 샤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다.

뭔가…… 제 삼촌인 레이커스와 내가 연인이라는 소문이 난 게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샤인도 가끔 뜬금없을 때가 있다니까.’

난 작게 웃으며 루나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자자, 이상한 소리 말고 구경 다 했으면 수학 문제나 풀어요.”

샤인은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삐죽거렸지만, 오늘따라 어른스러운 척하는 샤인은 더 이상 투정 부리지 않고 문제지에 다시 코를 박았다.

샤인과 루나가 짧은 집중력으로 힘들어하며 문제를 푸는 동안, 나는 편지의 답신을 일일이 작성해 블리에 씨에게 들려 보냈다.

안부를 묻는 사람들 모두에게 언제든 시간이 될 때 방문해 달라는 요지의 답신이었다.

의상실보다 경시청에서 나온 사람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내가 경시청을 방문했을 때 나를 안내해 준 키가 큰 경관이었다.

우리는 공부방 옆의 작은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르비체 님께서 갇혀 있던 건물은 지금은 소유주가 없는 폐건물입니다. 그 장소에 대한 조사는 마쳤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습니다.”

예상한 대로였다.

난 크게 실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좀 괜찮으십니까?”

“네, 레이커스 님께서 빨리 찾아내 주신 덕분에요.”

경찰의 무능함을 탓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지만, 난 내 말에 진심이 듬뿍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관은 내게 범인을 목격한 정보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으며 가져온 조사지에 기록했다.

하지만 경관의 집중력은 범인의 가면이 반으로 쪼개졌다는 데에서부터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에, 그러니까…….”

경관이 펜으로 종이 위를 괜히 긁적거리며 내 말을 되짚었다.

“……그, 실체가 없었다고요?”

“네, 그렇다니까요? 그림자처럼 슈슉 하고 창문으로 사라졌어요. 레이커스 님께서 뒤를 쫓으셨지만…… 듣고 계신 거죠?”

“그렇긴 합니다만…….”

“아까부터 메모를 안 하시는데요?”

경관은 마치 내가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걸 걱정하는 듯 바라보더니, 그 뒤로 추가적인 질문 한두 가지만 하고서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경관을 불만스레 쳐다보았다.

‘지금보다 더 정신이 멀쩡할 수가 없는데.’

“오늘은 이만하죠. 더 생각나시는 게 있으면 알려 주시고요.”

“잠깐만요.”

나가려는 그를 붙잡고, 난 내가 알아낸 놀라운 정보를 귀띔해 주었다.

“그 범인, 왕궁 연회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경관이 내 놀라운 추리력에 감동했는지, 이제는 나를 아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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