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1화
난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들은 잠에 취한 채로 밥을 먹고 남은 과제를 마저 풀었다.
난 아이들을 돌봐 주며 멍하니 레이커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내 손등에 키스를 남겼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제가 무슨 영화 주인공이야, 뭐야? 느끼해, 진짜.’
물론 영화 주인공은 못 되더라도, 공포 게임의 주인공 격 지위는 차지하고 있지만……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워낙 능글능글하게 구는 바람에 대화가 조금쯤 겉돌기만 한 기분이었다. 지하실에 대해서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얻은 소득이 있긴 했다.
‘레이커스는 납치범의 정체를 몰라. 적어도 그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으니, 만약 범인을 알고 있다면 정체를 폭로했겠지.’
‘납치범은 나를 노리고 있어. 아마 지금도. 그리고 레이커스는 나를 지켜 주고 싶어 해.’
그 외에도 국왕 전하는 레이커스와 공주의 사이를 반대한다는 것 정도.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골몰했다.
‘납치범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실체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 게임에서 상호 작용이 되는 등장인물 중에 귀신이나 유령 같은 존재는 분명 없었단 말이지……. 어쩌면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건,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말일지도 몰라.’
스스로 한 생각이지만 아주 그럴싸했다.
‘인간인 건 맞을까? 만약 인간이라면…… 레이커스나 내가 아는 사람이야. 혹은 너무 유명해서 알 수밖에 없는 인물이거나. 그래야 얼굴을 숨길 가치가 있을 테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납치범의 목소리와 머리카락, 덩치 같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변조한 것처럼 이상하게 들렸고, 머리카락은 두건 안에 숨겨서 보이지 않았다.
키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지만, 워낙 헐렁한 망토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덩치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철저히도 정체를 숨겼다니까.’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납치범의 이미지는 도끼를 든 미치광이에서 내가 아는 주변인 중 한 명으로 변해 갔다.
그것에는 꽤 큰 장점이 있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거북하고 두렵기만 하던 이미지 대신, 가면과 그림자가 되는 기술 같은 것으로 숨어서 도망 다니는 비열한 놈이라는 이미지만 남았으니까.
이젠 정말로 눈앞에 있어도 공포심에 휩싸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경시청에서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일부터 했다면…… 이렇게 여유 있게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을 거야. 레이커스가 납치범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해 줘서, 나도 그 생각이 옮은 걸 거야.’
난 무심코 레이커스에게 또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을 느끼곤 쓰게 웃었다.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범이란 아주 하찮은 존재이긴 하겠지.’
열심히 문제를 풀다가 깃펜을 뜯는 데 열중한 루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을 털어 내려다가 문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가설을 떠올려 봤다.
‘혹시, 혹시라도 레이커스가 진범이 아니라 그 납치범이 진범일 수도 있나? 레이커스는 그냥, 연쇄살인마까지는 아니고…… 그냥 범죄자인 거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역시 레이커스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너무나 많았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 연쇄 살인 현장마다 나타난 것,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소리, 갑작스레 눈빛이 변해 사람을 공격하는 것…….
‘……하지만 만약 레이커스가 진범이 아니라, 그 형체도 없는 이상한 놈이 범인이라면 그게 더 문제야. 레이커스는 형체라도 있지, 그놈은 레이커스도 못 죽이는 놈인데, 체포할 수 있어?’
난 레이커스가 검을 휘두르는 장면을 생각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레이커스도 아무도 건드릴 수 없기는 해. 하지만 그나마 아주 조금은 낫겠지.’
그리고 플레이어로서 게임을 할 때 수집했던 증거들을 봐도, 사건 현장과 부검에서 레이커스와 관련된 정보를 얻은 게 꽤 많았단 말이야.
난 의미 없는 가설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블리에 씨였다.
“무슨 일이에요?”
“역시 여기 계셨네요. 좀 쉬시는 게 나을 텐데요.”
“아…… 좀비 사태가 터져도 출근부터 하고 볼 나라 출신이라서요.”
“……네?”
내가 빙긋 웃기만 하자, 블리에 씨는 내 농담을 이해하길 포기하고 옆에 놓인 카트를 내 쪽으로 보여 주었다.
“편지가 좀 와서요.”
그녀가 내 쪽으로 내민 은쟁반 위에는 편지 여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꽤 많은 양의 편지에 난 눈을 깜박였다.
“다 저한테 온 거예요?”
“네, 그럼요.”
블리에 씨는 내 옆에 쟁반을 내려놓고, 끌고 온 카트에서 다른 쟁반도 들어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아이들이 집어먹기 좋은 간식들과 함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것 같은 따끈한 차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직접 묻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의상실에서 연회 드레스를 가지고 온다고 기별이 와 있는데, 그건 다음에 다시 오라고 미룰 테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쉬셔요. 경시청에서 온다는 사람도 공작님께서 만류하셔서 다음에 올 모양이에요.”
난 얼른 손을 저었다.
“아녜요. 둘 다 그냥 오늘 오라고 하세요.”
“정말로요?”
“차라리 바쁜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블리에 씨는 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일정으로 할게요. 일정을 조율하고 싶다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하세요.”
“그럴게요.”
블리에 씨가 문을 닫고 떠나가자, 샤인이 문득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새 유모가 입혀 준 말쑥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빗어 넘긴 샤인은 나비넥타이까지 하고 있어서 정말로 꽤 신사처럼 보였다.
‘레이커스를 닮은 얼굴인데도 어쩜 이렇게 조금도 재수 없지 않고 귀엽기만 할까?’
“왜 그래요?”
흐뭇하게 웃으며 물어보는데, 샤인이 멀뚱히 날 보다가 불쑥 물었다.
“선생님 연애해?”
“네?”
“선생님 남자 만나?”
“풉.”
난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샤인의 얼굴이 너무 웃겨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사처럼 보이긴 해도, 역시 아이는 아이인 모양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아이들이란.’
난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 연애 안 해요.”
샤인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찌푸리더니, 문제지 위에 펜을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나 높은 의자 위에 냉큼 올라가 앉았다.
그러곤 어서 내게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샤인이 이렇게 나오는데 루나가 얌전히 문제에 열중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은색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땋아 올려서 곰돌이 귀처럼 한 루나가 양팔을 번쩍 들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난 결국 쪼르르 달려온 루나를 품에 안고, 샤인의 감독하에 편지를 하나하나 개봉하기로 했다.
첫 번째 편지의 겉봉에는 [라떼 라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겉봉에는 그때 보았던 마탑의 모양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샤인이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사람…… 유명한 마법사잖아. 이 사람도 알아?”
마탑주의 손녀로 더 유명한 줄 알았는데, 샤인까지도 저렇게 알 정도면 라떼는 그녀 자신도 꽤 인정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친구예요.”
샤인은 놀랐다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호들갑을 떨며 빨리 열어 보라고 재촉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풀이 죽어 있더니만, 그 차분함이 하루를 못 가네.’
난 웃음을 흘리며 편지를 펼쳤다.
[친애하는 친구, 알비에게.
리어먼드가로 찾아갔을 때, 리어먼드 공작님께서 네가 절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강경히 나오시는 바람에 얼굴도 못 보고 왔어.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신께 감사드리지만, 지금도 너무 걱정돼.
너만 괜찮으면 당장 찾아갈게! 르뮈에와 밀로라드도 함께 가고 싶다고 전해 달래.
마탑에는 효과 좋은 호신 도구가 많으니까, 전부 싸 들고 갈게.
빠른 회복을 빌며,
라떼 라커가.]
진심이 담긴 편지는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따지고 보면 고작 딱 하루 함께 어울렸을 뿐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친밀감이 들었다.
워낙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이고 여유가 있는 이들이라 그런지 말하는 것도 위트가 있고 아는 게 많은 것도 좋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파크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고 의심하는 이들을 처음 만난 거라 그럴 거야.’
캐서 헌트의 그 영상을 보고 난 뒤의 기묘한 유대감도, 그래서 생긴 거겠지.
샤인은 편지를 보고 내가 흐뭇하게 웃는 것을 보다가, 문득 침울하게 눈썹을 구겼다.
“어머, 왜 그래요?”
“……아냐.”
“아니긴요. 톡 튀어나온 입술이 벽에 닿겠는걸요?”
“어린애 취급하지 마!”
“그래서, 왜 그러는데요?”
샤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곤, 나비넥타이를 고쳐 매며 작게 중얼거렸다.
“옛날엔 몇 번 봤었거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라떼와 르뮈에, 밀로라드가 처음에 내게 말을 건 것도 샤인과 루나의 가정교사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 두 아이를 아주 좋아하는 것처럼 말했었는데…….’
난 샤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왜 한숨이에요?”
“……옛날엔 자주 봤었는데, 그땐…… 유명인들을 자주 초청해서 수시로 파티를 열고…… 그랬거든. 사람들은 우리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늘어놓으러 오곤 했어. 그런 게 대귀족의 할 일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랬어요?”
“지금과는 다르지…… 지금은…… 난 밖에도 잘 못 나가니까…….”
난 풀이 죽은 샤인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그럼 샤인이 먼저 초대하면 되잖아요? 라떼와 르뮈에, 밀로라드는 샤인도 루나도 보고 싶어 하는 걸요?”
“……셋 다, 날 보러 왔던 게 아니었거든.”
샤인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평소엔 꽤 오만한 귀족처럼 구는 주제에, 가끔 이렇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굴 때가 있다.
문득, 샤인이 말하고 있는 ‘옛날’이 샤인과 루나의 부모님이 살아계시던 시절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루나가 다리를 쭉 뻗으며 몸을 뻗댔다.
내 손에 들린 편지가 보고 싶어 죽겠다는 듯한 몸짓을 하며, 루나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 정말로 루나를 보고 싶어 한대요?”
“루나도 보고 싶어요?”
“나도 보고 싶은데! 밀로라드 언니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진귀한 것만 가져오는걸? 르뮈에 언니도, 라떼 언니도 너무너무 멋있고, 선물도 많이 줘요.”
‘루나는 귀족 집 아이치곤 좀 물질적인 욕심이 있네.’
난 작게 웃다가 아직도 멍하니 내 편지를 바라보고 있는 샤인을 보고 안쓰러움이 들었다.
난 샤인과 루나가 가진 근본적인 그늘 같은 게 부모님의 부재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예 그 시절의 인연으로부터 격리되어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