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60화
레이커스는 제 손깍지를 풀었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연회에 로망이 있어서입니까?”
절로 웃음이 났다. 그 말도 안 되는 핑계를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게 웃겨서.
“네.”
“……이런 상황에서 연회를 취소할 생각조차 없는 국왕 전하도 전하시지만…… 그린 양도…….”
그는 내가 간이 크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괜히 그저께의 기억을 자극할까 봐 염려되는지 뒷말을 흐렸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뭐라고…… 제게 일어난 사건 가지고 연회를 취소하고 말고 하겠어요.”
“아뇨.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넘치면 넘쳤지, 모자라지는 않습니다.”
레이커스가 너무 단호하게 부정해서, 난 낯부끄러워질 타이밍도 잡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국왕 전하께서는 그 연회를 왜 하시는 건데요?”
“딸의 혼처를 찾으려고.”
“네?”
“농담인 것 같겠지만, 진심이십니다.”
“딸이라면 저번에 만났던 블란테 공주님……?”
레이커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나는 눈알을 위로 도르륵 굴렸다.
‘레이커스에게 진심이었던 그 공주님 말이지. 혼처를 따로 찾아 연회까지 벌일 필요가 있나? 그렇게까지 관심을 둔 인물이 눈앞에 있는데?’
“공주님은 레이커스 님을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그는 내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하긴, 공주님이 그렇게까지 대놓고 어필하는데 모를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도, 기뻐하는 눈치도 없었다.
“아마 그 부분이 문제일 거라 생각합니다.”
“국왕 폐하께선 공작님을 탐탁지 않게 여기신다는 말인가요?”
그는 대답을 않고 담담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건 몹시 완곡하게 표현한 긍정임이 틀림없었다.
난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제 딸이, 이 나라의 제일 큰 공신을 좋아한다는 데 왜 반대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듯한 이유가 없었다.
‘국왕이 레이커스가 하고 다니는 일을 아는 걸까? 하지만 레이커스가 범죄자라는 걸 국왕이 안다면, 이미 감옥에 처넣었을 테니까 그건 아닐 거고.’
“공주님의 마음에만 차면, 공주님께서 설득해 주시겠지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니까.”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중얼거린 말을 공작은 단칼에 잘랐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저번에 보니까 둘이 잘 어울리던데. 게다가 그렇게 예쁘고 능력 좋은 공주님이 좋아해 주시면 황송해해야 하는 거 아냐?’
하여튼, 얼굴이 잘난 남자란 그저 오만하기 짝이 없다.
나는 혀를 끌끌 찼다.
물론 저렇게 오만해도 그와 한 번이라도 춤추고 싶은 여인이 넘쳐 나기야 할 테지.
하지만 남의 연애에 내가 참견할 필요는 없다.
난 뭐라 말을 얹으려다가, 문득 우리는 지금 이야기의 중심을 빙빙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몇 입 남지 않은 밀크티를 마저 다 마셨다.
그러고는 잔을 받침에 내려놓고, 레이커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런 뒤 숨을 합 들이마시고 천천히, 그리고 똑똑히 말했다.
“레이커스 님, 저를 납치한 범인이 누군지 아세요?”
제 무릎 위를 톡톡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딱 멈췄다. 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그자가, 인간이 아니었는데도 놀라지조차 않으셨잖아요. 납치범에 대해 진즉에 알고 계셨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레이커스의 긴 속눈썹이 또 몇 번 팔랑거렸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그것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작은 한숨을 토했다.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4(23/396)]
이젠 다른 사람이 아닌 레이커스의 호감도 알림창은 워낙 일상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아주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그린 양은 뭐든 똑바로 마주 보는군요.”
“마주 보다뇨?”
“그냥…… 잊어버리고 싶은 일도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는구나 싶어서요.”
“그럼요. 다행히도 아직 심한 건망증이 오지는 않았는걸요?”
뭘 그런 소리를 다 하냐는 말이었는데,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레이커스는 내 진지한 대답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픽 터뜨렸다.
“그건 다행이군요.”
그러곤 제 머리를 가볍게 헝클고서 아름답게 조형된 입술을 뗐다.
“뭐랄까, 범인과 마주친 적이라면 많습니다. 누군지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죠.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네?”
“그런데 왜 잡지 않으신 거죠?”
“보셨다시피. 잡을 수가 없는 존재라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커스의 무력은 절대적이었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거미 크리쳐를 단번에 해치웠고, 총을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던 납치범 놈을 먼저 도망치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존재라면, 다른 사람들은 도움이 못 될 거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경시청에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으니까, 경시청도 도움이 안 될 테지.
난 신중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커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질문이 내겐 가장 중요했으니까.
“그 범인은…… 공작님, 그는 저를 우연히 납치한 게 아니에요. 샤인을 지키려다 납치된 건 맞지만, 그게 아니라도 이미 범인과 만난 적이 있어요.”
그의 잿빛 눈동자 속에 희미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감정 변화라 빤히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거다.
레이커스는 제 찻잔을 내려다봤다가 나를 마주 봤다.
“그렇습니까.”
‘저 뻔뻔한 얼굴 좀 봐.’
“공작님은 줄곧 저를 보호하려고 했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제가 쓰러졌던 날부터였잖아요. 제가 범인과 만났다는 걸 공작님이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우연이죠.”
그는 부인하지 않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눈썹을 추켰다. 입가엔 희미한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여유가 만만한 그의 얼굴을 보니 짜증이 났다.
거짓말을 들켰으면 당황한 얼굴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알고 있었죠? 범인이 날 노린다는 거. 알아서, 아만타 경관이 저를 호위하도록 한 거죠?”
레이커스는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혀. 범인을 마주친 적도 없는 것처럼 말했으면서.’
마치 열심히 고심해서 정답을 찾아낸 아이를 칭찬하는 듯한 표정에 난 인상을 구겼다.
“저한테도 말해 줬었어야죠! 그래야 제가 조심을 하죠.”
“진실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네?”
“다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습니다. 그 이상의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은 거추장스럽기만 하죠.”
또, 또 그 표정.
저 혼자 어딘가에 버려진, 불쌍한 강아지 같은 저 표정이 나는 달갑지 않았다.
그가 언제 돌변해서 나를 죽이려 들지 모르는 사람인 걸 알면서도, 자꾸 시선이 가게 하는 그 표정이.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범인이 절 노리고 있고 한 번은 실패했지만, 왕궁 연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제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참석을 만류하는 거라면…… 전 갈 거예요.”
“왜죠?”
“처음에 골목에서 그가 노린 건 제가 아니라 샤인이었어요. 범인이 노리는 건 저만이 아닐 거예요.”
“그거야…….”
“그리고 왕실 연회를 콕 집어서 가지 말라고 하는 걸 보면, 거기에 뭔가 있는 거 아닌가요? 범인이 무슨 예고라도 했나요?”
레이커스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이거야, 원. 추리의 여왕 납셨군요.”
“정확히 뭐라고 했죠?”
“……정확히 뭐라고 했다기보다, 당신을 돌려주는 대가로 제가 그곳에 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자를 막을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으니까.”
난 눈을 깜박이며 레이커스를 바라보았다.
일단 여기까지는 진실인 것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연회장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왕실 연회라는 루트 자체가 워낙 뚫기 어려운 루트라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이벤트를 다 본 것이 아니라서 어떻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모니카에게 경고하러 가야 했고…….
‘그리고 그 납치범이 레이커스에게 소중한 이들에게 위해를 가할 셈이라면, 공주님도 위험할지 몰라. 가서 경고를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난 씩 눈웃음 지었다.
“그럼 더더구나 가야겠네요.”
“어째서죠?”
“방금 말씀하신 대로 그자를 막을 수 있는 게 공작님밖에 없다면, 공작님께서 지켜 주시겠죠. 전 꽤 쓸 만한 가정교사니까.”
레이커스가 눈썹을 구기더니 쿡 웃었다.
큭큭큭.
“저기요?”
큭…… 큭큭.
허리까지 접어 가며 한참을 웃던 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허리를 폈다.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4(43/396)
호감도 퀘스트 - 티타임 개방]
[레이커스 리어먼드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4(56/396)
호감도 퀘스트 : 티타임 완료 보상으로 호감도 추가 상승 +30
Lv.4(86/396)]
아무리 레이커스의 호감도가 오르는 것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지만, 이렇게 연달아 뜨는 창에는 낯이 간지러웠다.
‘……저 미치광이가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역시 전 당신이 좋습니다.”
누가 들으면 고백인 줄 안다.
‘또, 또 이상한 소리.’
난 살인마의 황당한 말을 반쯤 흘려들으려 애썼다.
레이커스는 입가에 달린 웃음을 지우고 아주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이번 생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 보겠습니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 봐야 후회가 안 남겠지요.”
알 듯 모를 듯 한 말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얼떨결에 손을 잡혀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레이커스가 내 손등에 부드럽게 키스를 남겼다.
“……지, 지금 뭐…… 뭐……!”
“그럼 어쩔 수 없이, 연회에 함께 참석하실까요, 나의 파트너?”
분명 더 할 대화가 많이 남았는데, 나는 손등이 덴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