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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59화 (59/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59화

레이커스의 방문 앞에 선 나는, 은색으로 빼곡한 무늬가 들어간 나무문 앞에서 한참 멈춰 서 있었다.

‘……후.’

레이커스의 방에 찾아오는 것은 이걸로 세 번째다.

첫 번째는 권총을 찾았을 때, 두 번째는 그에게 공격당할 때.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커스라는 사람을 잘 모르겠어.’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습관적으로 물었다가, 같은 부분을 오늘 아침 내내 깨물어서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레이커스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핑핑 돌았다.

‘살인마에 대해서 살인마라고만 생각하면 됐지. 다른 생각은 그만하자. 괜히 좋게 해석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난 마음을 단단하게 굳히고 문손잡이를 당겼다.

미리 간다는 기별을 시종을 통해했던지라, 레이커스는 이미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

지난번에도 놀랐지만 다시 봐도 웅장한 책장의 크기에 감탄이 나왔다.

레이커스는 창가에 놓인 고상하게 생긴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 앞에 놓인 커피 테이블 위에는 티타임용 세팅이 완벽히 갖춰져 있었다.

책장이 있는 쪽과는 달리 응접실 소파가 놓인 쪽은 은색에 가까운 하얀 바닥재와 터키색으로 이루어진 가구들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그 공간은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아름다운 공간과 아름답고 우아한 사람의 조화는 각각이 가진 아름다움을 두 배로 만드는구나, 싶었다.

‘여길 설계한 사람도, 리어먼드가 가주들의 미모에 걸맞은 공간을 만들려고 애를 썼던 건 아닐까?’

그런 감상에 젖어 있는데 나를 돌아본 레이커스와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이지…… 저 반반한 얼굴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

“이쪽으로 앉으시죠.”

“네.”

난 레이커스가 권하는 대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젠 그가 의자를 잡아 주려고 굳이 일어나는 수고를 하는 것에도 익숙해져서 거절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달각, 달각.

사람을 부를 줄 알았는데, 레이커스는 스스로 받침 위에 뒤집어 놓았던 찻잔들을 다시 똑바로 뒤집어 놓곤,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들어 잎차가 든 주전자에 부었다.

‘잘나디잘난 공작가의 잘나디잘난 공작님치고는 스스로 뭔가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아.’

난 그가 저번에도 내게 브랜디를 손수 내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굳이 잘 모르는 일을 거드는 대신 고용주의 서비스를 얌전히 감상했다.

그는 차가 우러났다 싶을 때가 되자, 찻잎을 걸러 주는 스트레이너를 컵 위에 올리고 차를 한 잔씩 따라 냈다.

“우유나 설탕은?”

난 홍차를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닌 데다, 여기에 와서 마신 차들도 간단하게 먹기 좋은 허브차가 전부였던지라 내 취향을 잘 몰랐다.

‘게다가 지금 뭘 마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데…….’

대답을 잠깐 망설이자, 레이커스가 눈썹을 으쓱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린 양은 향이 달콤한 걸 좋아하고, 독한 술은 그리 즐기지 않고, 식사 때도 달콤한 디저트는 남기지 않고 드시는 편이시던데…… 아마, 그냥 드시기엔 쌉싸래할 겁니다. 우유와 설탕을 적당히 넣어 드릴 테니 취향에 맞게 더 넣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레이커스는 우유를 먼저 넣고 설탕을 그다음 넣고서 부드럽게 저어 준 뒤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제 잔도 채웠다. 내 것에 들인 정성에 비해 제 것은 대충 찻잎만 걸러 따른 게 전부였다.

블리에 씨가 스콘이나 케이크도 함께 준비해 준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둘 다 그것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나는 레이커스가 만들어 준 따뜻한 차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장미와 녹색 이파리가 테두리를 따라 그려진 새하얀 찻잔은 퍽 아름다웠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밀크티는 아주 부드럽고 달콤해 보였다.

‘……정말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기 짝이 없네.’

난 당장 이런 걸 마실 기분은 아니었지만, 고용주가 기껏 만들어 준 성의를 봐서 찻잔을 들어 입에 살짝 댔다.

한 모금을 마시고 찻잔을 받침에 내린 나는 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어.’

너무 달지도 않고, 딸기 향과도 닮은 홍차의 향을 가릴 만큼 우유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딱 내 취향의 음료였다.

나도 모르게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또 한 모금을 마시자 손안에 쏙 들어오는 조그마한 찻잔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다 마셔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레이커스를 흘끗 바라보자, 줄곧 나를 관찰하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그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맛이 좋으신 것 같군요.”

“……그럭저럭요.”

“그럭저럭인 것치고는 순식간에 비우셨습니다.”

‘……어쩜 저렇게 얄밉게 말하지?’

하지만 나 역시도 차 정도는 순순히 맛있다고 말해도 좋은데, 괜히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대꾸했다.

게다가 따뜻하고 달콤한 것을 먹어서 그런지 마음속의 혼란스럽고 불안하던 부분이 한결 더 좋아진 것 같아서 더 이상 대거리하지 않았다.

“레이커스 님은 이런 것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뭐랄까…….”

레이커스는 찻잔의 테두리를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이따금,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굳이 또 하루를 버텨서 내일을 맞이하는 게 무의미할 때가 있잖습니까?”

“……네?”

“그럴 때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조금 손이 가고 귀찮은 점도, 확실하게 마음의 위안이 된달까요.”

그가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감춰 두었던, 남들에게 잘 비치지 않던 본심의 한 조각을 내보였다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내일을 맞이하는 게 무의미하다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레이커스는 내가 그의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대답하지 못했음에도, 그것에는 별 불만도 없는지 내가 비워 버린 잔을 똑같이 한 번 더 채워 주었다.

이번에는 조금 덜 달게.

아까 달콤하게 마셔서 입 안이 달 거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정말로 내 취향을 완벽히 안다니까.’

조금 불만스레 잔을 내려다보는데, 레이커스가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린 양에게도 이게 위로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난 인상을 찌푸렸다.

어젯밤, 그가 내내 함께 있어 주며 날 위로해 주었던 것이 단박에 떠올라서.

나는 괜히 또 그에게 고마워지는 내가 싫어서, 그의 말을 자르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 뭐길래 절 부르신 거죠?”

레이커스는 내 물음에 천천히 허리를 펴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손을 깍지 껴 가슴 앞에 모으고 아주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납치 사건의 범인에 대해서는 트리버 경감이 최선을 다해 수사하고 있습니다.”

“……네.”

“아마, 제 관할 구역에서 그린 양과 샤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걸 생각하면, 밤이고 낮이고 없이 일하고 있을 겁니다. 제 목이 위험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트리버 경감과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꽤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제 권한으로 그린 양이 조사받는 건 일단 미뤄 두었습니다. 당장은 마음을 추스를 생각만 하세요.”

“……감사합니다.”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일단 수사 중이라는 말은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경찰들이 수사 중인데 또다시 나타나 나를 덮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레이커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부탁?’

레이커스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딱 정해 둔 것은 아니었지만, 범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생각한 나는 뜻밖의 말에 뒷이야기를 예상할 수가 없었다.

“부탁…… 이요?”

“왕궁 연회 말씀입니다만, 역시 참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왕궁 연회. 맞아, 그런 게 있었지.’

하룻밤 사이, 내 상황에 너무 매몰되어 있던 나머지 내가 뭘 해야 하고 이 파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체를 싹 까먹고 있었다.

난 지금 당장이라도 사건 수첩에 나에 대한 기록이 어떻게 남아 있을지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왕궁 연회를 가지 말라고요…….”

“네.”

레이커스가 단호하게 말했지만,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여 줄 수가 없었다.

아르비체 그린은 본디 초반에 죽는 인물이다. 그 말인즉슨, 그 이후에 아르비체 그린에게 할당된 이벤트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아르비체의 죽음은 어차피 예정되어 있던 거니까, 시간과 장소가 달라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지만…… 납치라니?’

아무리 내가 샤인이 납치당하려는 상황에 끼어든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큰 사건이 일어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즉, 이 게임 속, 파크 속의 사건들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뜻이야.’

캐서 헌트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 때는 절망했었다. 그때는 내가 개입한다고 해서 사건의 결과가 변할까에 대한 의문만 남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플레이어일 때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샤인의 일탈이나 납치 사건 같은 것들 덕분에.

‘기분 좋은 사건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점은 있네.’

원래도 가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인제 와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더욱더 가야겠다.

난 쓰게 웃으며 레이커스를 향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죄송하지만, 전 꼭 그 연회는 가야겠어요.”

레이커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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