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58화
‘……레이커스에겐 살해도 당했잖아. 정신 차리자.’
손을 들어 내 양 볼을 힘껏 꼬집고서야 눈물이 찔끔 나오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스푼을 들었다. 구석에 서 있던 블리에 씨가 눈치 빠르게 손짓하자 시종이 수프를 다시 내왔다.
눈앞에 있던 수프가 없어진 줄도 몰랐던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따끈한 단호박 수프를 한 술 떴다.
‘……따뜻해.’
우유가 들어가 부드럽고 달콤한 수프는 빈속을 달래기에 딱 좋았다.
레이커스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최대한 없는 여유까지 끌어모아 느긋한 척 식사를 했다.
얹힐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블리에 씨의 배려 덕분에 즐기는 따뜻한 식사는 속을 덥혀 주어서 좋았다.
내가 식사를 반쯤 마쳤을 때 루나는 숟가락과 냅킨을 내려놓고 감사 인사를 마친 뒤 후다닥 의자에서 뛰어내렸고, 샤인은 마치 철이 다 든 아이처럼 의젓하게 냅킨을 내려놓곤 루나의 손을 쥐고 사라졌다.
“유모를 다시 나오라고 할 순 없으니, 새 유모를 뽑는 편이 낫겠군요.”
레이커스가 내 옆통수에 대고 말을 걸었다.
내가 대꾸 않고 다시 식사에 집중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유모가 오래 일해서 그럴 겁니다. 이젠 나이가 많이 들었으니, 쉬게 해 줄 때도 되었는데…… 워낙 제가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걸 안 좋아하고, 굳이 뭔가 새로운 일을 하는 걸 안 좋아해서.”
묻지도 않은 말을 길게도 한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필요 없는 말을 하는 스타일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난 애써 계속 외면하고 있던 그에게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레이커스는 턱까지 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담담하고 고상한 얼굴에 스친 표정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무사히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에……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듯한.
‘대체 뭐야…….’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숟가락을 쥔 손이 입으로 잘 옮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커스가 날 바라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식욕에 비해 음식이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는 단호박 수프 한 그릇만을 겨우 비우고서야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는 내가 스푼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을 때까지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가, 내가 일어날 때가 되어서야 의자를 빼 주며 물었다.
“식사를 다 하셨으면, 저와 잠깐 이야기를 하시죠.”
‘그래, 나도 바라던 바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내가 먼저 꺼내려던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솔직히 레이커스와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지만…….
레이커스를 협박할 만큼 간 큰 놈이 파크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야기를 좀 나눠 보아야겠지.
그리고 지하실 루트가 개방되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난 레이커스가 잡고 있는 의자와 식탁 사이에서 슬며시 몸을 빼냈다.
“좋아요. 샤인과 루나가 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잠깐 다녀온 뒤에요.”
레이커스는 그 하늘하늘하고 긴 속눈썹을 두어 번 깜박이고, 손에 쥔 의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걱정할 건 없습니다. 블리에에게 새로운 유모를 불러 두게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에요. 루나가 절 너무 오래 기다려서요.”
“알겠습니다. 다녀오시죠. 방에서 기다리죠.”
“네, 알겠어요.”
내가 식당 문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레이커스의 시선이 나를 따라붙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시선을 떼면 내가 뭐 어떻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고 간지럽고, 동시에 웃겼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루나가 두 팔을 번쩍 들고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유모가 있을 때는 항상 땋거나 올려 묶었던 은색 머리카락이 풀려 있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어딘가 가엾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유모와 정이 많이 들었을 텐데.’
“선생님!”
난 루나가 들어 올린 손에 스케치북이 꼭 쥐여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받아 주었다.
“빨리 봐요! 루나, 숙제 열심히 했어요!”
“그럴까요?”
바닥에서 그리 높지 않은 낮은 의자에 앉자, 루나가 내 옆으로 와 매달리며 목을 쭉 뺐다.
나는 스케치북을 펼치기 전에 샤인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서서 쭈뼛대는 태도로 서 있던 샤인의 손에도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이리 와요.”
내가 손을 뻗자, 샤인은 머뭇거리면서도 뻗대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여튼, 귀엽다니까.’
난 두 아이를 나란히 옆에 끼고 루나의 스케치북을 먼저 펼쳤다.
루나의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는 건 어제 새벽에도 보았던 그림이었다. 삐뚤빼뚤한 선은 엉망이었지만 또렷한 색으로 나와 레이커스, 샤인과 루나를 표현했다.
“집 그리라고 해서. 가족을 그렸어요.”
가족.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를 가족에 포함시켜 준 걸까.
“그랬어요?”
“네에.”
“선생님도 같이 그려줘서 고마워요. 가족이라고 말해줘서, 더 고맙고요.”
“헤헤.”
루나는 내가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는 게 기쁜지 샐쭉 웃었다.
[루나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Lv.3(2/297)]
‘루나는 정말 칭찬 듣길 좋아한다니까.’
귀여운 루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난 다시 루나와 함께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집은요?”
“네에?”
“집을 그려오는 게 숙제였는 걸?”
“……우리 뒤에 있어요!”
루나가 손에 크레용을 묻혀 가며 열성적으로 설명했지만, 역시 거대하게 표현된 네 명의 인물이 스케치북을 꽉꽉 채우고 있어서 그 뒤에 있다고 하는 집은 도저히 그림의 주제로는 보이지 않았다.
난 루나가 열심히 설명하도록 한참을 내버려 두곤 작게 웃으며 스케치북을 돌려주었다.
“루나, 잘했어요?”
루나가 눈을 반짝이며 날 올려다봤다.
“응, 아주 잘했어요.”
“그럼 숨바꼭질!”
“그런데 과제와는 좀 다른 걸 그려왔으니까, 다음 숙제도 보고 결정할게요.”
“……잘했는데도요?”
“그럼요.”
“……으응? 으응…… 네에? 네에…….”
루나는 분명히 칭찬을 듣긴 들어서 기쁘지만,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해서 영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내게 항변을 할지 말지 한참을 망설이면서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는 동안 루나의 분홍색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게 너무 귀여워서 난 픽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곤 샤인의 스케치북도 받아 펼쳤다.
앞에 몇 장에는 그간 내주었던 다른 숙제들이 그려져 있었기에 휙휙 넘기다 보니 고저택의 그림이 나왔다.
‘……음침해.’
나는 그 그림을 보자마자 혀를 찼다.
정직하게 투시라곤 쓰지 않고 그린 평면의 고저택 그림은 검은색과 갈색, 회색 등 어두운 색들을 주로 사용해서 도저히 어린아이의 그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어두운데…… 날씨가 흐려서 이렇게 보이는 거죠?”
“응. 그리고…… 그 어두운 것도 있으니까.”
“그 어두운 것?”
나는 무슨 소린가 해서 샤인을 돌아봤지만, 샤인은 제가 내뱉은 말에 스스로 놀란 눈치로 한참 말없이 굳어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샤인도 내 품에 꼭 안겨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샤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한참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림에 재능이라곤 없는 샤인의 그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정원을 생략한 저택의 모습을 앞에서 본 그대로 그린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림자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다시 바라보자 좀 달라 보이기도 했다.
‘확실히, 어떤 그림자가 집을 휘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가까이에서 봤다가 또 원시가 있는 사람처럼 스케치북을 멀리 떼고 바라보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까만 그림자의 거대한 날개 같은 게 저택 지붕 쪽에서부터 펼쳐져 저택의 아래쪽까지 축 내려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괴담을 너무 많이 들은 어린아이의 상상력이란 이런 거구나.’
공포 게임 속에 사는 아이의 삶은 너무 가엾다.
난 혀를 차며 두 아이를 다시 한번 품에 꼭 안아 주고서, 레이커스에게 가기 전에 다시 다른 과제를 내주었다.
샤인이 자꾸 내 눈치를 보는 데다가 루나도 샤인과 내 일을 자꾸 궁금해하는 게 곤란했기 때문에, 난 일부러 둘이 오늘 풀어야 하는 수학 문제를 양껏 내주었다.
아마 두 아이의 집중력을 고려했을 때, 몇 시간이 지난 뒤 돌아와도 다 풀지 못할 만큼의 양이었다.
내가 방에서 나올 때, 키가 작고 다부지게 생긴 여인 한 명이 나를 스쳐 지나가려다 멈춰 섰다.
짧게 친 커트 머리와 반소매 아래로 보이는 두꺼운 팔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와, 아이를 안는 거 하나는 정말 잘하시겠는데.’
아이라는 건 은근히 무겁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상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머, 그 소문의…… 아르비체 님 맞죠? 오늘 새로 온 유모 델리아랍니다.”
“아, 네…….”
‘……그 소문이라는 게 대체 뭔데?’
난 나도 모르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는 처음 다과회 자리에서 들었던 아르비체 그린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커스에게 꼬리를 치러 왔다느니, 보잘것없고 가난한 중소 귀족 출신인 게 다 티가 난다느니…….
그래서 지금도 소문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방어적으로 된다.
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잘하신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다과회에서 있었던 일도요.”
“아…… 네.”
“이렇게 아이들을 아끼는 가정교사분도 드문데. 레이커스 님께서 까다롭게 잘 고르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맞받아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쑥 들어온 칭찬에 허망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마차에 탔을 때 만났던 그 마부도 좀 과장되어서 그렇지 내게 칭찬만 해 주었다.
‘물론 다들 내 앞에서 대놓고 안 좋은 소문을 전할 리는 없겠지만…… 아르비체 그린의 평가도 조금쯤 좋아진 것 같기도 해.’
흐뭇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가려는데, 델리아가 이어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공작님께서도 연인이 그런 일을 겪으셔서……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네……?”
‘내가 레이커스의 연인이라는 소문은 여전한 모양이네.’
난 한숨을 폭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