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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56화 (56/130)

공포게임 조연인데요, 죽이지 마세요 56화

드르르륵. 드륵.

무언가로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문틈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보고 싶지 않은 마음만 가득한데, 뭔가에 홀린 듯이 등 떠밀려 거기로 다가가게 되었다.

문틈 사이에 언제부턴가 자리 잡고 있던 가면이 무기질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그 가면의 벌어진 구멍 사이로 보이는 것은 눈. 나를 마주 보고 있는, 색을 알아볼 수도 없는 그림자 진 섬뜩한 눈.

그 눈이 나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을까를 생각하자 등이 오싹해졌다. 손과 목뒤에 땀이 배어났다.

그와 동시에 도저히 피할 사이도 없이 질척한 피로 젖어 있는 양날 도끼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았다.

몸이 아래로 덜컹, 추락하는 감각과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허억. 허억.”

익숙한 천장.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아르비체 그린의 방이다.

“허억, 허억.”

‘숨을, 천천히 제대로 쉬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하지만 도저히 숨이 똑바로 쉬어지질 않았다. 난 몸을 둥글게 말며 앞으로 숙였다.

똑똑똑.

그때,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까?”

‘……레이커스?’

“……괜찮, 허억.”

“실례하겠습니다.”

내 대답 소리가 짧게 끊어짐과 동시에 문이 달칵 열렸다.

그리고 핑글 도는 시야 사이로 레이커스가 황급히 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나를 달랑 들어 올려 제 어깨 너머로 내 고개가 나오도록 안아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여긴 안전해요.”

“……허억. 허. 후…… 후우…….”

“제가 곁에 있을 겁니다. 다시는 놈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여긴 안전해요. 안전해요.”

“어떻게 알고…… 후우…….”

“혹시 몰라 이 바로 옆의 서재에서 용무를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후우…….”

“마침 용무가 많아서요. 제 걱정은 마십시오. 숨을 깊게 들이쉬세요. 괜찮습니다. 다 괜찮아요.”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의 내용이 당장 와 닿지는 않았고, 레이커스에 대한 경계심도 다 풀어지지는 않았음에도 나는 점차 숨이 편안해졌다.

내가 완전히 안정을 되찾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을 거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인내심 있게 나를 달랬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어지럽게 생각했다.

‘내가 언제 방으로 돌아왔지? 언제 씻고 침대에 들었지? ……맞아, 경시청에서 조사가 나올 테니 우선 좀 자라고 해서, 잠깐 잔다는 게 밤이 되도록 잔 모양이야…….’

원래도 버거운 일이 있으면 도피성으로 잠을 자는 게 습관이었는데, 그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

난 호흡이 고르게 되자마자 놓아달라고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그는 성인 여자 한 명을 거뜬히 안은 채로 무겁지도 않은지 한참을 더 나를 토닥여 주었다.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하지만 짜증과 동시에 안도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이커스에 대한 공포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구해 주던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상, 납치범 자식으로부터의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레이커스가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이 기회에 이미지 쇄신 한번 확실하게 하네.’

나는 그가 내게 잘해 주는 게 혼란스럽기만 했다.

짜증도 부리고 싶었고, 할 일도 많을 텐데 왜 밤이 되도록 나를 지키고 있는 건지도 물어보고 싶었고,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나를 달래는 사이에, 난 레이커스가 나를 구하러 다니는 장면을 무심코 상상해 버렸다.

여기에서 꽤 먼 도시 외곽의 좁은 골목까지 돌아다니다가 그 흔하디흔한 들꽃의 꽃잎을 보고 나를 떠올렸을 그를, 총성이 들리자마자 달려왔을 그를.

“괜찮습니다. 여긴 안전해요.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한창 망설이던 중에, 내 등을 쓸어 주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가 그만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선생님! 일어나!”

“알비 선생님! 일어나세요!”

“선생님, 아직도 자?”

“알비 선생님! 루나, 그림 그려왔어요!”

잠결에 종알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침인가?’

더 귀를 기울여 보자, 언제나처럼 음울한 까마귀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네. 어제 하루 통째로 잤나 봐.’

몸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긴 시간을 잠으로 보낸 사람답지 않게 어쩐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쉬, 오늘은 공작님께서 특별히 선생님을 푹 쉬게 해 드리라고 했어요. 자, 우리 샤인 님과 루나 님은 식당으로 먼저 갈까요?”

블리에 씨의 사근사근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푹 쉬어? 하지만, 루나 그림 그렸는데! 선생님이 어제까지 해 오라고 한 건데!”

“루나, 선생님 쉬게 해 드리자. 우리끼리 먼저 가 있으면 오시겠지.”

샤인이 답지 않게 풀죽은 목소리로 루나를 달래는 게 들렸다.

“오빠……? 선생님 또 아파?”

루나의 목소리만 들어도 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모양이 상상되었다.

“내가 잘못해서 그래.”

“잘못? 오빠 혼나는 거야?”

“그건…… 모르겠지만. 자, 얼른 가자. 몸이 안 좋으신가 봐.”

“오빠는 바보야, 선생님이 루나한테 또 안 아프겠다고 했거든?”

“바보는 너야.”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꼬마들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한바탕 들리더니 일순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사위가 조용해지고,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까지 들리자 오히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식당에 가지 않으면 루나가 실망하겠는데.’

조금 더 쉬고 싶기도 했지만, 루나와 샤인 생각에 일어나기로 하고 기지개를 크게 폈다.

“흐아함.”

‘왜 이렇게 잠을 잘 못 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그 의문을 떠올림과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난 기지개를 켜는 자세 그대로 몸이 딱 굳었다.

납치당했던 때를 그대로 재현한, 지독히 불유쾌한 악몽을 꿨다. 한 번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꿈이었다.

아무런 일도 겪지 않고 잘 탈출했다고 생각했지만, 방 안에 갇혀 있는 시간 동안 온갖 상상을 다 떠올려야 했던 그 공포스러운 기억은 잔재를 남겼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옥 같은 꿈을 꿀 때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나를 달래 주었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매번 질리지도 않고 침착하고 인내심 있게, 내가 다시 평온하게 잠에 빠져들 때까지 곁에 있으면서 날 달래 주었던…….

‘……레이커스.’

난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의 안쪽 살을 깨물며 눈을 꽉 눌러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고마울 것 같아서. 너무 의지가 되고, 감동적이고, 고마울 것 같아서.

레이커스에게서 비롯된 일이라는 건 사실 납치범의 논리였고, 레이커스의 입장에서는 내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일일 텐데……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공작이라는 지위를 가진 그에게, 그와 가까이 지내려고 애쓰는 이들이 넘쳐 날 그에게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닐 텐데도 이렇게까지 해 줬다는 게…….

나는 천천히 몸을 고개를 숙여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가 나를 구한 시점부터, 더 엉망진창이야.’

전부터 레이커스에 대해서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고 생각했는데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이젠 정말 모든 게 엉망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다정한 건데? 왜 그렇게까지…….’

“……하.”

길게 숨을 내쉬어도 복잡하고 울렁이는 속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마음이 이상했다.

잘만 흐르고 있던 작은 강의 중간에 크고 묵직한 돌을 하나 가져다 둔 것처럼, 그 돌에 걸린 물살이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흐르게 된 것처럼.

곧장 일어나서 레이커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똑똑똑.

‘……레이커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드는데, 예상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식사 여기로 가져다 드리라고 할까요?”

블리에 씨의 목소리였다.

‘……휴.’

안도해서,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올라갔던 어깨가 절로 내려갔다.

그리고 동시에 어이없는 감정도 들었다.

레이커스가 아니라고 생각하자, 마음속 어딘가에서 안도감과 함께 이상한 아쉬움 같은 게 들었던 것 같아서.

‘반사작용이야. 어젯밤 내내 그가 괜히 이 방에 자꾸 들락날락해서, 반사적으로 그일 거라고 생각해 버린 거야.’

“아…… 식사요?”

“네. 어젯밤 식사도 안 하셔서 오늘 아침은 피곤하시더라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걱정이 스민 목소리에 어젯밤 나를 끌어안던 그녀의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괜한 걱정을 더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공포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내가 레이커스를 피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레이커스가 나한테 잘해 주는 것도 이 게임의 진엔딩을 보기 위해 써먹을 발판이라고 생각해야지. 내가 왜 피해?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지금이 그럴 때야?’

난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슬리퍼에 발을 꿰면서 문에 대고 말했다.

“지금 식당으로 갈게요.”

“괜찮으시겠어요?”

난 내 앞에 놓인 세로로 길쭉한 거울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식당에 들어서면서, 나는 정말 블리에 씨의 말대로 내가 꽤 허기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당 문 앞에서부터 나는 고소한 단호박 수프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어제는 정말 온종일 굶다시피 했지만, 음식 같은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어제 납치 사건을 겪은 사람이라기엔 너무 멀쩡했다.

‘……어젯밤, 레이커스가 내내 곁에 있어 준 덕분일까…….’

난 이젠 습관이 되어 버린 도리질을 치며 생각을 애써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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